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쓰는 엄마 Jun 07. 2020

나답게 육아 #8. 내가 아이를 하나만 낳은 이유

"엄마에게 동생 낳아 달라고 해."라는 말은 이제 그만!

  아이가 드디어 학교를 갔다. 겨울방학 이후 6월 3일, 3학년으로써의 첫 등교. 그리고 오늘은  집에서 학교, 학교에서 집으로 가고 오는 모든 것을 온전히 혼자 했다. 오후 한 시에 돌아와 잠시 두유와 과자를 먹으며 학교가 어떤지 말해주더니 그 뒤 거의 네 시간 가까이 거실 한편에 앉아 꼼짝도 하지 않고 책만 보고 있다. 며칠 전만 해도 입에서 “엄마” 소리가 떨어지지 않던 아이인데 그 사이 혼자 있는 시간이 더 길어진 걸 느끼며 아이가 부쩍 자랐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한 편으로는 이게 외동인 아이의 온전한 휴식시간일까 하는 생각도 든다. 

 아이는 외동이다. 내가 어릴 때 쌍둥이 다음으로 부러워했던 외동. 나는 1학년 때도 혼자 등하교를 했지만 정작 아이는 2학년이 끝나가는 연말에서야 혼자 등교를 시켜봤다. 2학년 때에도 하굣길은 반드시 데리러 갔는데 그때도 같은 돌봄 교실이었던, 우리 아이보다 한 살 어린 1학년은 혼자 하교를 하고 있었다. 엄마인 나부터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하는 걱정과 불안이 높아 아이에게 독립적인 것에 대한 요구가 높지 않은 편이고, 아이도 엄마 아빠 품에 있거나 손 타는 것을 좋아한다. 

 아이가 6,7살만 해도 아직 늦지 않았다고 생각했는지 지인들에게는 물론이고 길을 가다가도, 지하철에서도 “동생 낳아야지.”하는 말을 심심찮게 들었다. 그런 말은 나이가 좀 지긋한 분들이거나, 자녀가 둘, 셋인 분들에게서 많이 들었다. 그렇다고 또 자녀가 하나 인 사람은 그런 말을 안 했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다. 우리 아이와 동갑인 아이를 키우는 사람도 내게 그런 말을 했으니까. 어쩌면 부부간의 내밀한 문제일 수도 있는 일인데, 지극히 개인적인 사생활인데 “오늘 날씨 참 좋죠?” 정도의 일상적인 무심함으로 “둘은 놓아야지,”하며 말을 꺼내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당황스러웠다. 특히 아파트 같은 라인에 사시는 분은 만날 때마다 “애가 많이 컸다.”라는 애정 어린 관심과 함께 “하나 더 낳아야지. 아이가 외롭다.”라고 하시거나 아이더러 “엄마한테 동생 낳아달라고 해.”라고 할 때마다 빨리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길 바라며 형식적으로 웃었다. 10년 인생 동안 단 한 번도 동생을 원해 본 적이 없는 아이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굳어 있었고. 그분이 5년을 한 아파트에서 살면서 뵐 때마다 정다웠던 ‘좋은 분’ 이어서 나는 더 곤란했다. 


 아이는 한 명만 낳기로 했다. 우리 부부 사이에도 합의된 일은 아니었다. 종교가 있는 사람으로서 오만한 말인 것을 알지만 아이를 낳을 것인가, 그리고 몇이나 낳을 것인가에 대한 최종 결정은 여성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아이는 선물이다. 내 노력으로 생기는 것이라기보다는 내게로 보내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매우 은혜로운 것이라고 해도 선물을 거부할 수도 있다. 평양감사도 제가 싫으면 그만이라고 하지 않았나. 더 이상의 임신과 출산을 하지 않겠다는 결정은 임신 기간 내 코끼리처럼 부어 걷기조차 힘들던 다리, 노약자 석에 앉았다고 경험했던 설움에 무통주사를 맞고 아직도 생생한 온몸에 오한이 오며 춥던 그 순간, 간호사가 배 위로 올라와 아이를 밀어내던 야만적인 출산 과정, 출산 후 쉬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던 혈압 등이 어릴 적 맏이여서 느낀 피곤함 위에 차곡차곡 쌓이면서 최종적으로 내 맘 속에서 꽝꽝 꽝 승인 도장을 받았다. 내가 형제가 있어 부침이 심했고, 아이를 만나고 낳고 키울 때의 과정에서 엄마인 내 노력이 다수 들어가면서 꽤나 힘들었기 때문이라고, 그런 말에 타인이 납득해 준다면 좋을 텐데. “다들 그렇게 산다.”로 마무리되는 것이 싫었다. 내 인생인들 뭐가 그리 남들과 다르며, 그렇게나 힘들고, 그렇게나 특별할까마는. 그래도 내 힘듦과 애씀을 다른 사람의 그것보다 가치를 더 쳐 달라는 것이 아니니 너무나 쉽게 일반화하고 계량화하지 말았으면 했다. 


 어떤 아이를 키우는 사람이든, 아무리 순한 아이라고 한들 보호자의 노력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을까. 말로 다 할 수 없는 그 지극한 노력을 또 하고 싶지 않았던 나의 단호한 결정은 ‘하나만 키우겠다.’였다. 그러나 이런 마음이 흔들리는 순간도 있었으니 바로 “애가 크면 외롭다.”와 “엄마한테는 딸이 있어야 한다.”라는 말 앞에서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들은 자기  외 다른 아이를 원하지 않았다. 사랑받고 싶은 욕구가 매우 높아서 넘치도록 많은 사랑과 관심을 받고 싶어 하다 보니 사촌동생들의 존재만으로도 심하게 예민해지는 아이였다. ‘한 아이의 엄마가 되겠다.’는 내 마음과 ‘엄마는 온전히 내 엄마’라는 아이의 마음은 더없이 잘 맞아 나도 아이도 지금 이 상황에 만족하고 살았다. 그러나 가끔 인생의 갖은 불운함이 멀리 있지 않다는 것, 나라고 예외 없다는 생각이 들 때면 혼자인 아이에게 부모로서 부담을 주게 되는 순간이 오진 않을까 걱정이 들었다. 또 자연의 순리에 따라 남편과 내가 먼저 저 세상을 가면 함께 부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없는 아이가 느낄 쓸쓸함에 대해 벌써부터 마음이 아파왔다. 

 그리고 엄마에겐 딸이 있어야 한다는 말. 나도 엄마에게 딸이다. 내가 잘하는 딸이냐 하면 참 대답하기 어렵다. 잘하는 딸들보다는 좀 부족한 딸, 못하는 딸들보다는 잘하는 딸이라고 하면 맞을 것 같다. 부모님 마음에는 충분하지 않겠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려고 노력하는 딸이다. 아들인 남편이 시어른께 하는 걸 보면 힘을 쓰는 일은 요청하면 해결해준다. 하지만 말하지 않은 것은 잘 모르고 알아보려는 노력이 없다. 반면에 딸인 나는 친정엄마와 수시로 전화하고 속 깊은 이야기도 잘 나누는 편이다. 일상에 있어 그렇게나 큰 비밀이 없어 대부분 많은 것을 공유하고 있다. 고해성사 본 내용을 말할 수 있으니까. 누군가 이야기를 들어주고 나눌 사람이 있다는 것, 아플 때 죽을 끓여다 주고, 돌보러 와 줄 수 있다는 건 세상을 살면서 참 든든한 일이다. 자식에게 엄마가 하는 것을 비슷하게나마 받게 되는 행운은 대부분 딸을 통해서라고 생각이 되었다. 


  그래서 이런 말들 앞에선 나도 작아진다. “내 결정이 옳은 걸까?” 연두색의 여린 잎사귀가 푸릇푸릇한 초록이 되고 잎의 좀 더 두꺼워지듯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아이를 볼 때면 다시 못 볼 여릿함을 아쉬워하다 저 물음이 다시금 떠오르곤 했다. 잊을 만하면 새로 나오는 동생 놔달라는 공익광고 역시 한 사회 구성원으로서 나의 역할을 다하지 못한 건 아닌가 하는, 어딘가 모르게 불편한 감정을 주기도 하고. 

그러다 얼마 전 브런치의 글을 읽게 되었다. 글쓴이의 남편은 외동인데 학교를 다녀오면 집에서 충분히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글쓴이가 형제관계에서 느낀 감정을 아주 적게 그리고 담백하게 적었지만 이 분도 나처럼 적지 않은 내 외면적 갈등을 겪었겠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고. 그 말이 나에겐 참 응원이 되었다. 그리고 외동 = 외로움이라는 등식이 나도 모르게 가슴속에 위치하게 된 것을 찬찬히 살펴보니 내가 아는 외동인 그분이 떠올랐다. 그분이 사람과 관계하는 것, 이성을 대하는 모습이 나에겐 위태로워 보였다. 그리고 그 위태로움을 이해하기 위해 그분의 상황을 끌어들여 이해하려고 했었다. 형제가 둘인 나는 그럼 외롭지 않은가 하면 그렇지 않다. 어릴 때부터 언제나 적용이 되던 대결구도, 내 것을 찾아 먹어야 했고(엄마가 말씀하시길 어릴 적 내 동생에게 똑같은 과자를 주면서 언니랑 나눠먹으라고 하면 내게 주는 순간까지 두 개를 대어보며 어떤 게 큰지 확인하더라고 했다.), 오롯이 ‘나’라는 존재보다는 가족 내의 위치와 서열, 역할로 이름 지어졌었다. 외동이든 형제가 있든 비슷할 순 있겠지만 모두가 같을 순 없다는 거. 결국은 모든 것이 내 입장에서의 생각이고, 내 프레임으로 본 것이었을 뿐. 


  세상을 먼저 살아본 분들의 말이 틀리진 않겠지만 반드시 옳은 것도 아니다. 외동이라 외로워하는 아이가 있을 수도 있고, 외동이라 더 좋아하는 아이도 있을 수 있다. 형제가 있어 좋을 수도 있고, 형제가 있어도 외롭거나 있어서 괴로울 수도 있다. 그건 아이마다 다를 거다. 

외동의 이유가 경제적인 부담, 직장과 육아의 병행에 있어 시간적 육체적인 어려움 등 외적인 부분이라면 우리나라의 상황적 개선이 필요하다. 대학원 수업을 들을 때의 일인데 나이가 지긋한, 특히 연배가 높은 남자분들은 육아의 어려움을 모르더라. 그 시대가 남자가 육아를 직접 해 보지 않았기 때문이겠지. 그래서 지금의 육아 정책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20, 30, 40대가 좀 더 목소리를 낼 필요가 있다. 

반면에 나의 경우 외동의 이유가 내적인 부분이었다. 누구 엄마도 나지만, 누구 엄마로 오래도록 살기보다는 나로 살고 싶은 것. 집이 조용해서 평화로운 것. 그걸 바라고 한 아이의 엄마로 살아가기에 그냥 지금에 만족하기로 했다. 가보지 않은 길을 끝없이 떠올리면 ‘~ 한 건 아닐까?’로 불안해하기보다는 아이도 편안하고 나도 편안한 지금 이 순간을 충분하게 즐기는 걸로. 

작가의 이전글 나답게 육아 #7. 아이와 좋은 관계 맺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