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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엄마 Jun 15. 2020

나답게 육아 #9. 내 아이의 사회생활-1

나는 그녀와 달랐을까

띠리리리리~ 띠리리리리~

  택배 배달하신 분의 당황스러운 전화를 받고 한껏 불쾌해 있던 순간, 아파트 지하 1층 현관에서 호출이 왔다. 화면을 보니 아이의 동그란 머리와 함께 다급한 목소리가 들린다. “엄마 내려와 봐요.” “왜?” “이상한 누나가 날 괴롭혀요.” 내가 막 경험했던 일과 함께 불쾌함, 짜증남, 걱정됨 등이 잔뜩 섞인 채 마스크만 급히 찾아 쓰고는 내려갔다. “어떤 누나가 날 따라오면서 소리 질러요. 엄마가 혼내주세요.” 더는 자세한 설명 없이 엄마를 등에 없고는 <나쁜 누나>를 찾아 나선 아들은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더니 그 누나가 없다고 한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니 그제야 아이가 말하길 “내가 휴대폰이 땅에 떨어져 있어서 '휴대폰 주인~?'하고 물어보고 안 만지고 가만히 있었는데 어떤 누나가 그거 내 거야 하며 소리 지르고 따라왔어요.” 한다. “그래서 넌 어떻게 했어?” “도망갔어요.” “거기서 도망을 가면 어떡해. 네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머릿속으로 생각했던 아이와의 대화는 이런 게 아니었는데 이미 아이의 사건을 접하기 전 내가 불쾌한 일을 겪어서 기분이 배로 나빠지는 바람에 말이 좋게 나오지 않았다. 아파트 내 놀이터를 돌아다녀 봐도 그 누나는 보이지 않았고, 같이 놀이터에 있던 친구들에게 그 누나의 이름과 5시쯤 다시 올 거라는 것을 알고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가 4시 10분. 아이에게 어떻게 하겠냐고 물어보니 5시에 다시 내려갈 건데 엄마가 같이 가 줬으면 좋겠다고 한다. ‘그러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어서 “엄마가 아까는 기분 나쁜 일이 있었어. 그래서 화가 좀 나 있었는데 피하지 않고 그 사람에게 기분이 나쁘다고 문자를 보냈어. 그랬더니 그 사람이 사과를 했어. 피하기만 하는 건 해결이 되지 않아.”라고 말했다. 말하고 나니 또 이건 충분한 대화였을까 싶었다. 피하지 말라고 말했지만 피해야 하는 순간도 있는데 엄마의 말 때문에 되레 다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 그리고 가장 먼저 했어야 하는 건 그 순간 무섭고 당황했을 아이의 마음을 알아주는 것이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자책감. 

 사온 식재료를 손질하며 저녁 반찬을 만들다가 5시가 되어 아이와 함께 내려갔다. 현관문을 나선 아이의 발걸음이 갑자기 빨라지더니 “엄마! 있어요.” 한다. 아이는 긴장되었는지 평소보다 빨리 걷지도 뛰지도 못했다. 얼른 가서 따지고 싶은 마음과 무섭고 겁나서 대면의 순간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 동시에 드나 보다. 자전거를 타고 저만치 도는 그 ‘누나’의 움직임을 눈으로 보고 돌아올 길로 먼저 가서 섰다. 그리고 “얘, 애가 너한테 할 말이 있데.”하고 불러 세우고는 아이에게 어서 오라 했다. 아이가 내 옆에 서더니 “누나 나 아까 누나 핸드폰 안 만졌어. 근데 계속 따라오면서 소리 질러서 무서웠어.”라고 한다. 누나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내가 나서서 “아줌마는 얘 엄마야. 얘가 말하길 바닥에 휴대폰이 떨어져 있어서 주인이 누구냐고 하니까 네가 따라와서 소리를 질렀다고 하던데?” 했다. 그러자 그 누나 말은 “휴대폰은 제 껀데 얘가 제 것이 아니라고 했어요.”하자 아들은 “아니야. 난 그런 말 한 적 없어.”라고 대답했고 서로 그 말을 했다, 하지 않았다며 옥신각신하기 시작했다. 했어, 안 했어의 말만 오갈 땐 상황이 끝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길에 떨어진 휴대폰 주인을 찾아주려고 물어보고 손을 대지 않았다는 거지?”하고 아들의 입장과 “휴대폰이 누나 것이 아니라고 해서 내 거야 라고 했다는 거지?”하고 누나의 입장을 정리했다. 그리고 “서로 오해가 있었나 보다. 얘가 누나 것이 아니라고 말할 이유는 없고, 만약 그렇게 들었다면 너도 화가 났겠다.” 그러자 “얘 이름이 뭐예요.”하고 물어본다. “***야.”하고 말해주면서 “넌 이름이 뭐니?”하니 “6학년 3반 @@@ 이예요.” 하고는 “**아 내가 소리 질러서 미안해.”한다. 아이가 이렇게 순순히 사과할 줄을 몰랐던 나는 조금 놀랐다. 아들도 놀랐던지 괜찮다고 하며 부끄러워서 내 뒤로 숨는다. 나름 용기를 짜 내어 말을 했던 모양이다. 긴장이 풀리고 오해가 풀리니 분해 했던 자기가 부끄러운지 집으로 가자고 한다. 6학년 누나에게 “아줌마는 정말 놀랐어. 너처럼 사과를 하는 6학년은 잘 보지 못했어. 사과해 줘서 고맙다.”하니 역시나 부끄러워하며 “네”한다. “또 보자.”하며 돌아서서 집에 들어오는데 화가 나면서도 무서운 감정이 가득한 마음이 풀린 아들은 홀가분한 듯 얼굴이 밝았다. 반대로 내 마음 한편은 좀 무겁고 답답해져 왔다. 그리고 나는 그녀와 달랐을까 하는 생각이 계속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녀는 내 아이의 유치원 친구이자 같은 학교를 다니는, 같은 아파트에 사는 아이의 엄마다. 1학년 때 하교한 아이를 데리러 가면 하지 말라고 해도 꼭 그렇게나 발로 모래를 일으키며 놀고 있었다. 그 엄마는 그런 나의 아이로 인해 자신의 아이가 피해를 본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두어 번 아이에게 한마디 하는 듯했지만 나부터 흙을 던지며 놀거나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노는 것을 잘못했다고 지적해 왔던 거여서 가급적 상황을 그냥 두고 봤다.  아니 좀 더 사실대로 말하면 나는 문제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무리 지어 같이 놀던 초등학교 1학년 아이들은 그 친구의 엄마가 오면 누가 그 친구를 괴롭혔다는 식으로 이르듯 되어 있었고. 결국 사건은 일어났는데 운동장 미끄럼틀 위에서 아들이 그 친구의 팔을 잡았다고 했다. 그리고는 사과를 했다고 하는데 그걸 그 아이 엄마가 아이를 데리러 왔다가 알게 되고는 아들에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아이를 데리러 갔다가 그 모습을 보고는 너무 황당해 왜 그러시냐고 하니 같은 유치원이라서 잘해 주려고 했는데 왜 자신의 아들을 괴롭히냐, &&(자기 아들)이 만만하냐 라는 거였다. 당황했지만 “그래도 애한테 소리를 지르시면 안 되지요.” 했는데 아이는 엄마에게도 혼이 날 것이 걱정이 되었는지 울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이 년이 지난 일이다. 많이 괜찮아졌다고 생각했지만 아직도 이 일을 적는데 손이 떨려오고 가슴이 죄여 온다. 나는 아직 괜찮지 않다. 그리고 아이도. 아이는 아직 그녀의 차가 지나가면 경직이 된다. 


 아이의 친구들을 스파이 인양 이용하며 일러주는 아이를 칭찬하고, 조금이라도 아이와 어떤 일이 있었던 아이들을 미워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다른 아이를 타이른다면 선생님을 통해서 하거나 차분히 양쪽 입장을 들어보고 말했어야 했다. 무엇보다 자신의 아이는 보호해야 하는 존재고 그 외는 모두 필요에 따라 취사선택하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 그 발상은 잘못된 거였다. 그녀는. 부부싸움을 할 때나 똑같은 성인에게나 할 법한 큰 목소리와 억양으로 소리 지르며 아들에게 겁을 줘서는 안 되는 거였다. 


  학교 담임 선생님과 돌봄 교실 선생님을 통해 이 사실을 상담했다. 돌봄 선생님이 다른 아이를 야단칠 때는 선생님을 통해서 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하자 “아이고 또 누가 일렀나 보지요.”라고 했다고 한다. 예전 같으면 이 사건이 내 마음에 큰 충격을 줬겠지만 이미 일 년 전 다른 사건에서 표현하는 방법이 일반적이지 않다고 생각했고, 다른 분이 전화가 와서 뒷이야기를 들은지라 큰 기대가 없던 사람이어서 그 사람에 대한 실망은 오히려 그리 크지 않았다. 다만 그 상황에서 내 아들이 얼마나 무서웠을까. 그 사람처럼 다다다다 분노하며 큰 소리 높이지 못한 엄마가 자신을 충분히 보호하지 못했다고 느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아직 남아 있어 나를 불편하게 한다. 

아이와 나는 무섭고 공포스러운 분위기에 쉽게 위축된다. 이건 어쩔 수 없다. 기질이니까. 호전적이고 전투적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우리처럼 마음이 여리고 큰 소리 나는 것이 싫은 사람도 있다. 저런 상황에서는 이기고 지고를 이야기한다면 우리는 지는 편이다. 할 말을 다 하지 못해서 졌다는 패배감에 아직도 가끔 분 할 때가 있다. 가끔은 그때 학교에 좀 더 강력히 말해서 CCTV를 받아다 소송을 걸었어야 하나 생각도 한다. 해당 건이 아동학대로 분류되는 건이라는 걸 알게 되고서는 더더욱 그냥 그렇게 넘어가지 말았어야 하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 후 태풍으로 조기 하교하게 되어 아이를 데리러 갔는데 그녀의 아이를 복도에서 만났다. 시력이 나쁜 내가 미처 알기도 전에 그 아이가 날 보고는 놀라서 “헉” 소리를 내는 것을 한 템포 늦게 파악하면서 그 집 아이에 대한 안쓰러운 마음과 엄마에 대한 한심한 마음이 동시에 들기도 했다. “사람이 어쩜” 하는 내 마음과 달리 아이는 시간이 조금 지나니 또 괜찮은지 방과 후 교실에서 그 친구가 말을 걸어오면 대답도 곧 잘하고, 올해처럼 오랜만에 학교를 가서 만나니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했는지 먼저 인사하고 어떻게 지내냐고도 물었다고 한다. 그 집 아이도, 우리 집 아이도 야단스러운 아이들은 아니라서 같이 잘 놀면 좋겠다 했었다. 유치원 다닐 때 경험한 황당한 사건이 있었어도 그래도 엄마끼리 친해질 필요는 없지만 애들은 같이 놀아도 좋겠다고 단순히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미 아이들 싸움은 엄마 싸움이 되어 버렸고, 아이들 사이의 일상적인 일에도 계속해서 간섭을 하는 사람이 엄마인 아이라면 문제의 소지를 만들지 않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 방과 후 학교 프로그램에서도 자리를 멀리 배치해 줄 것을 따로 전화드려 부탁드리곤 했다. 



  그래도 꽤나 담담해졌던 그 사건이, 그녀가 다시금 떠오른 것은 아이와 만난 그 ‘누나’와의 일 때문이었다. 원래부터 마음이 여린 편인데, 그 일을 겪고는 더더욱 누군가가 소리치는 것을 두려워하는 아이다. 혼자서 충분한 해명을 못하는 데다가 상황이 그랬다 안 그랬다 자신의 입장만 주장할 때에는 초등학생들끼리 잘 풀어나가기가 어렵기도 했다. 하지만 그 6학년 누나에게 나는 그녀 같지는 않았을까? 한 순간도, 단 1분도 그렇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웠다. 불러 세운 것, 둘이서 맞다 그르다 할 때 정리를 한 것 외에는 끼어든 것은 없었나? 머릿속으로 상황을 리플레이, 리플레이하면서 나중에는 괜한 걱정도 들었다. 서로 사과를 주고받는 게 예뻐 기특하다 했는데 마스크 쓰고 하는 말과 표정이 잘 전달이 되었을까 까지. 염려의 끝에 입장이 바뀌어 누군가 내 아이에게, 내가 6학년 누나에게 했던 것처럼 말을 했다면 어떨까 생각해봤다. 괜찮을 것 같다. 음, 괜찮겠다.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덧, 다음날 옆집 동생이 유치원차에서 내리는 걸 보려고 아파트 입구에 서 있다가 6학년을 만났다. 아들은 아주 반갑게 “누나 안녕” 인사하고, 그 아이도 “안녕~ 누구 기다려?” 한다. 나도 웃으며 안녕하고는 옆집 동생 기다려하고 그 아이도 웃으며 안녕하세요 한다. 우리는 모두 안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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