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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엄마 Jun 22. 2020

나답게 육아 #10. 아이의 고집, 중요한건 그 다음.

  아이의 가방이 엉망이다. 이 주 전 학교 급식이었던 바나나를 가방에 넣어왔는데 잊어버리고 먹지 않고 방치하는 통에 가방에서 익어버려 가방의 한쪽이 녹은 바나나로 찐득해졌다. 세탁하게 꺼내 놓으라고 했지만 그대로 가방을 메고 다니다가 학교를 안 간 일주일은 방구석 어디쯤 가방을 뒀는지도 모르고 신나게 노는 아들이었다. 일주일 만에 다시 학교를 가려니 가방은 더럽고, 가방 가득 꽉 채워 책과 준비물은 넣어가야 하는데 바나나 얼룩이 졌고 딱딱하게 말라붙은 가방에 소지품을 닿지 않게 할 방법이 없다. “네가 세탁실에 내놓지 않았네. 학교 가방을 메고 갈 건지, 작은 가방을 메고 에코백에 책을 담아 갈 건지 네가 결정해”라고 말했다. 늘 지각을 하는 아이라 대답을 기다리는 1분이 흐르는 동안 엄마 심장은 200번은 더 뛰는 것 같은 초조함을 느낀다. 아이는 이렇게 할래요. 저렇게 할래요 라는 대답보다는 “그런데요 엄마 이 가방은......” 하고 말문을 열었다. 이미 내 마음속에는 다른 가방을 가지고 갔으면 좋겠다 라는 정해진 결말이 있었고, 바쁘다 보니까 결론만을 말했으면 좋겠는데 아이의 말이 길어질 모양새를 보이자 단박에 잘라버리곤 “아, 그럼 알아서 해.”라고 말해버렸다. 아이는 짜증을 냈고, 나는 그걸 보니 더 화가 났다. “엄마한테 말 그렇게 하는 거야? 그럼 너 알아서 가.” 아직 학교 사물함을 쓰지 못하는 아이의 책가방은 정말 무겁다. 5교시이지만 오늘 시간표인 영어를 뺀 국어, 수학, 과학, 사회는 책이 두 권 씩 이어서 옛날 어른들 말로 고시 가방만큼이나 무겁다.

 아침 일찍부터 “오늘은 가방이 무거워서 엄마가 같이 가 줬으면 좋겠어요.” 하던 아들이었는데 이제와 엄마에게 사과를 한 들 자신의 뜻하는 대로 엄마가 같이 가 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미적거리며 인사를 하고는 엘리베이터를 탄다. 가는 어깨 위로 무거운 가방이 놓인 걸 보는데 마음이 짠하다. “다녀와라.” 인사를 하고는 집에 들어와 얼른 옷을 갈아입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뛰다시피 아이를 찾았으나 어느새 아파트를 벗어나서는 통 찾을 수가 없다. 아파트 밖을 나가 횡단보도 앞에서야 겨우 아이를 찾았다. 기분이 괜찮아진 건지 등굣길 만난 친구와 이야기를 하며 걸어가고 있어서 천천히 걸어오라고, 가방은 엄마가 들어다 준다며 가방을 아이 어깨에서 내렸다.

 아이는 친구들과 이야기하며 뒤에 오고 있었고, 나는 교문 근처에서 가방을 들고 기다릴 생각이었는데 갑자기 총총 뛰는 발소리가 들리더니 내 옆에 조그만 그림자가 다가왔다. 아들이었다. “엄마한테 나쁘게 말하면 되는 거야? 안되는 거야?” 하자 아이는 나쁘게 말하면 안돼요 한다. 너한테 화났지만 그래도 무거운 가방 들고 가면 힘들까 봐 왔다고 하자 아이는 배시시 웃으며 “미안하고 고마워요.” 한다.


  교문 아래에서 아이와 인사하고, 아이가 뒤에 오는 친구들을 기다리는 걸 보며 나는 천천히 집으로 올라왔다. 오르막과 내리막을 반복하는 학교와 아파트 사이의 길을 걸으며 이 길이 나의 엄마로 사는 모습 같다는 생각을 했다. 어떤 날은 좀 수월했다가, 어떤 날은 또 숨 차고 힘들었다가.

자기주장이 분명한 아이는 나와 마찰이 잦은 편이다. 내가 생각했을 땐 이게 더 나은 거 같은데 아이는 저게 더 좋단다. 대부분의 경우 그래도 30년 더 산 내 생각이나 짐작이 맞을 때가 있지만 아이의 선택이 늘 잘못된 결과로 가지는 않는다. 어떤 땐 아이나 나 둘 다의 생각과는 정 다른 제3의 결과물이 나와서 머쓱할 때도 있다.

 하루는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흘러간다. 순식간에 지나가 버리는 일상을 좀 더 효율적으로 살기 위해 나는 빠르게 판단하고 결정한다. 그건 나의 일은 물론이고 아이의 일에도 그렇다. “너를 위해” 내가 이미 충분히 고민했고 더 나은 선택을 했으니 따라오라는 엄마의 마음과 달리 아이는 심사숙고해서 결정한다. 요즘은 더 자랐다고 고려하는 조건들이 많아졌다. 옷 하나를 입어도 친구들에게 어떻게 보일까, 책 하나를 챙겨도 선생님이 허락한 것인가 등.

 문제는 아이의 결정이 나와 다를 때, 내가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설 때 발생한다. 어릴 땐 화창한 날 비옷 입고 장화 신는 것 같은 일이 자라면서 더 많아지고 빈번해지고 다양해진다. 그럴 때면 내 마음속에선 나도 모르게 아이의 ‘고집’을 꺾어놓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처음 아이의 고집을 꺾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 건 신생아 때였다. 아이가 지나치게 울었고, 안으면 자고, 손에서 내리면 계속 우는데 그때는 안아 들어도 울었다. 좀 울려야겠다는 생각에 아이를 울게 했었다. 지나고 보니 내가 당시 스트레스 상황으로 이틀 전만 해도 문제없던 젖이 갑자기 말라버려 모유수유가 되지 않아서 아이는 그렇게나 운 거였다. 이 이야기는 지난번 다른 글에서도 한 적이 있어 간략히 줄인다. 아이의 고집을 꺾겠다고 시작한 일이었지만 결과는 나의 어리석음을 깨닫는 시간이었다.

이런 일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 뒤로 고집을 꺾겠다는 쓸모없는 시도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나는 계속해서 이런 시도를 했다. 6살 때 자기 손으로 밥을 먹지 않으면 밥그릇을 치운다거나, 화가 나서는 나갈 거야 하는 아이에게 그런 나쁜 말을 했으니 실제로 나가라고 하며 단 몇 분이라도 현관 입구에 서 있게 한다거나. 한마디로 “○○○해, 그렇지 않으면  △△△ 할 거야.”같이 아이에게 자신의 생각과 주장을 포기하는 대가로 얻을 수 있는 것들을 제시하고 으르거나 협박했다.


  아이의 고집을 꺾을 것인가 말 것인가. 놀이터에서 더 놀겠다는 아이와 저녁식사를 준비하러 데리고 들어가야 하는 엄마, 잘 시간을 넘기고도 졸린 눈을 비비며 아빠와 더 놀자는 아이들. 겨울이지만 여름 원피스를 입겠다는 아이, 초등학생인데도 여전히 화장실 뒤처리를 스스로 하기 싫어하는 아이 등등. 보호자들은 하루 중 수차례 접하게 되는 장면이라 생각한다. 매 순간순간 비슷한 상황이지만 모두 안 된다고 할 수도 없고 된다고 할 수 없을 때. 정말 안 되는 상황이라 안 된다고 했는데 아이가 평소답지 않게 지나치게 떼를 쓸 때면 허락해줬던 지난번이 잘못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별로 힘들어 보이지 않는 엄마가 있고, 무척이나 이 상황이 힘들게 보이는 엄마도 있다. 나는 전자의 엄마들을 고렙 엄마라고 부른다. 육아에 있어 산전수전 공중전을 다 겪은 듯 초탈해서 상황을 편안하게 넘기는, 게임에서 경험치 높은 유저 같은 엄마들. 타고나길 엄마로 타고난 것 같아 보이는 그들은 내가 참 부러운 존재들이다. 반면에 아이와 생활하는 것을 참 많이 힘들어하는 엄마가 있다. 내가 그런 엄마다. 완벽주의 성향이 높고, 권위적이며 상황을 통제하려는 엄마들은 일상 속 작은 변화도 균열로 느낀다.


 오늘 아침 내가 바란 것은 아이가 교과서에 얼룩이 묻거나 냄새날 염려 없는 다른 가방을 가지고 가는 거였다. 혹여라도 아이가 지저분하다고 알려지는 걸 원하지 않았다. 아이가 쾌적하게 지내다 오길 바랐다. 아이는 그러고 싶지 않아 했다. 그 이유가 친구들은 다 학교 가방을 메고 가는데 자기는 소풍가방을 메고 가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고, 아끼는 에코백을 집 밖 공간에 가지고 가서 오염되는 것이 싫었을 수도 있다. 나는 쓰고 세탁하면 된다고 생각했고, 아이는 안 그래도 하루 중 손을 열두 번도 더 씻던 아인데 코로나 이후에는 더 예민해져서 눈에 보이지 않는 병균, 바이러스에 한껏 예민해져 있다. 더군다나 교과서에는 별다른 애정이 없으니까, 굳이 교과서에 에코백을 내 줄 이유가 없는 거다(아이는 그 에코백을 집에서 좋아하는 책을 넣고 이 방, 저 방 옮겨 다니는 데 사용한다). 내 생각도 일리가 있고, 아이가 싫은 것도 이해는 된다. 하지만 둘 다 가질 순 없으니까 우리는 이때 선택해야 한다. 아이의 생각대로 할 건지, 엄마의 생각대로 할 건지. 아이가 주장하는 것이 쓸데없는 고집이라 생각되면 상황을 통제하려는 엄마는 고집 꺾기에 돌입한다. 매섭게 다그치거나, 조건을 달아 뜻을 관철시키거나, 화내고 토라지거나.


  아이가 혼자 가기 싫어 현관에서 머뭇거리는 그 순간, 나는 생각했다. “30분 뒤의 내가 후회하지 않으려면 지금 나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나는 같이 가는 것을 선택했다. 가방이 엉망으로 얼룩진 더러운 채로 가겠다는 아이와 동행하는 걸로.

아이와 학교를 향해 가면서도, 집으로 돌아오면서도 왜 내가 그런 선택을 했을까 생각해봤다.

무거운 가방을 짊어지고 가는 안쓰러움? 나의 잘못된 대화 방식에 대한 미안함의 표현? 아마도 가장 큰 마음은 아이에게 올바른 것을 알려주는 과정에서 멀어지고 싶지 않아서였던 거 같다.

나는 (내가 볼 때엔) 지저분하게 해 다니는 아이의 고집을 꺾느라 애쓰는 과정에서 아이가 나와 단절이 되어 외롭다는 생각을 하는 일이 없길 바랐다. 내 어린 날을 생각하면 부모님께 혼이 나서 외로웠던 것이 아니라 야단맞은 후 혼자 있는 그 순간, 이해받지 못했고, 수용되지 못했다는 생각이 나를 외롭게 했었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부모님이 나를 부모님의 방식으로 사랑하셨다는 걸 알지만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늘 결핍감 속에서 자랐다. 애정의 결핍. 사랑을 받았으나 사랑받는 줄 몰랐던 아픈 유년. 왜곡된 사실은 진실이 되었다. 그리고 돌고 돌아 겨우 여기까지 오는 데에도 시간이 얼마나 걸렸는지, 그리고 나와 가족들을 얼마나 아프게 찔러댔었는지 말로 다 할 수 없다. 나는 아이와의 관계에서는 그런 일을 겪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네가 내 생각과 다르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언제나 손을 마주 잡고 서로를 안아줄 수 있다고.


허락해야 하나, 안된다고 해야 하나에 낚이지 말고. 네가 양보할 수 없고, 엄마가 허락할 수 없는 그 순간에도, 어느 한쪽은 만족스럽지 않은 그 시간에도 내가 널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려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아가고 싶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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