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낮은 자존감을 높일 수 있을까.
와아-하는 비명소리와 함께 거센 빗줄기가 떨어진다. 곧이어 번개도 내려 꽂힌다. ‘번쩍’ 할 때마다 천장의 무늬는 이렇게 저렇게 갈라진다. 자려고 계속 누워있었지만 이미 잠은 달아난 지 오래다. 한숨을 쉬고 일어나 앉았다. 오전 네 시 반. 마음에 짐 덩어리를 넣고 있는 것 치고는 감사하게도 그래도 잘 잤다.
어제 오전, 열 시 사십 분이 좀 넘어서 전화가 왔다. 7백 번대다. 내일, 이제는 오늘이 된 수요일 계획되어 있던 강의건 확인으로 해당 유치원에서 전화를 하셨나 생각했다. 먼저 걸려왔던 정수기 시공과 관련된 통화가 끝나고 부재중이 들어온 전화를 바로 눌러 걸었다. 느지막이 먹고 있던 아침밥의 젓가락질을 멈추지 않은 채. 전화를 거니 “선생님!” 하고 부르는 목소리는 단단하게 경직되어 있다. “**유치원 강의 안 갔습니까?”라는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쿵 떨어졌다. “그 건은 내일인 걸로 알고 있는데요.” 분명 아침에도 한 번 더 보느라고 펼쳐 놓은 다이어리에는 22일에 **유치원 강의라고 되어 있었다. 휴대폰 알람도 21일인 어제는 지난주 해당 교육장 사정으로 변경되어 일정 조절된 오후 강의밖에 없었다. 설마, 혹시. 불안감이 온몸을 뒤덮었고 교육을 배정해준 센터에서는 “21일입니다. 일단 알겠습니다.” 하고 끊었다. 배정 전 담당자가 일정 확인을 하는 카카오톡 메시지, 배정 후 보내는 문자, 그리고 메일까지 전부 뒤졌다. 교육일은 21일이었다. 그리고 강의 시간은 이미 지나 있었다.
센터를 통해 교육을 배정받으면 기관의 담당 선생님과 연락을 하게 되어 있다. 당시 상황이 생각난다. 21일, 22일. 전화로 말을 할 때는 발음이 참 헷갈리기가 쉽다. 신경 써서 발음해야겠다, 요일을 말하며 혹시라도 오해가 생기지 않게 해야겠다 생각하고 전화통화를 했었다. 세 반, 세 번을 수업해야 했고 순서에 따른 연령대도 미리 확인해뒀다. 그런데 정작 다이어리에 적고, 휴대폰 일정을 넣을 땐 22일로 입력해둔 것이다. 유치원으로 전화를 했고, 담당 선생님은 연락이 되지 않아 메모를 남겼다. 센터에 전화해 체크를 잘못해둔 내 잘못이다, 죄송하다, 유치원에는 제가 사과 전화를 드리겠다고 했다. 센터에서는 자꾸 사과할 것 없다, 유치원 수업에 방해가 될 수 있다, 담당 선생님이 외근 나가셨으니 오후에 전화를 드릴 것이다. 이 상황이 센터의 일 년 사업에 오점이 되었다는 것만 알고 있어라 하며 전화를 끊었다.
식탁 위 다 먹지도 못하고 이미 말라버린 찬을 싱크대에 넣었다. 어쩌다 이런 일이, 어쩌다가. 허깨비에 홀린 듯 21일 일정이 22일로 다이어리에 적혀 있고, 휴대폰에 알람이 되어 있는 것을 보면서 할 말이 없었다. 기가 찼고, 어처구니가 없었으며 황당했고, 분노했다. 숨을 쉬기가 어렵게 가슴이 꽉 조이며 답답해져 왔다. 어쩌다가, 도대체 어쩌다가 이런 일이 벌어졌단 말인가.
아이가 네 살 때부터 짬짬이 강의를 했다. 다니던 회사를 그만 둔지 삼 년 만이었다. 내 평생을 남 앞에서 이야기를 하는 날이 올 거라고 생각지 못했는데 아이를 키우면서 다른 일에 비해서는 내 시간이 자유롭다는 점에서 강사는 참 적합한 일이었다. 일과 중에 강의를 준비하고, 아이가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을 가 있는 동안 강의하고, 조금 늦을 땐 친정엄마께 부탁드리거나 남편이 휴가를 쓰곤 했다. 소속도 없는 프리랜서, 고용 관계가 아닌 위촉으로 언제든지 끝날 수 있는 관계. 그 간 세 곳에서 해촉에 대한 연락도 없이 강의가 끝난 적이 있었다. 한 곳에서는 국민연금 등을 내가 부담한다면 전임교수 자리를 주겠다고 했으나 마른 수건도 다시 짜는 식의 외부 인력에 대한 비용절감 방법이 씁쓸해 그만두었다. 홈페이지에는 전문 인력으로 내가 소개되고 있었지만 마땅한 강의는 없었던 적도 있었다. 강사는 진입장벽이 참 낮은 일이라 수는 참 많은데, 그에 비하면 강의장은 턱없이 부족했다. 과연 이 일을 생계로 할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하고 의구심을 가지기도 했다. 어떠한 내용의 강의나 교육이든 기본적으로 발전, 향상을 목표로 하는 거라 올해처럼 전염병으로 그저 유지만을 해야 할 때면, 더욱이 사람과의 대면을 최소화해야 할 때면 직격탄을 맞는 일 중 하나이기도 하다. 강의 기회는 적고, 강사 수는 하루가 멀다 하게 더 많아지고, 시장 원리와 운이 더해진 보이지 않는 손으로 유지가 되는 곳이라 최저임금은 오르는데 각종 기관과 센터를 통한 강사료는 유지되거나 삭감되었다. 새로운 강의를 해볼까 싶어 몇 십만 원을 들여 강의를 듣고, 그것을 투자라 생각했다. 어디든 면접보고 시연하고 청강하고 교육을 들으며 자격을 얻어야만 했다. 그리고 강의에 배치되면 머리를 싸매고 콘텐츠를 고민하고, 원고를 쓰며. 기관 대 개인이라는 이미 시작부터 불합리한 관계로 인해 또는 강의 장에서 겪는 생각지 못한 모욕에 좌절하고 격려에 어깨춤을 추는 날들을 보내면서 그래도 이 일이 좋았다. 번쩍이는 건물 어딘가 어느 유리창 하나를 닦고 있는 것 같은 기분. 나도 뭔가를 하고 있고 그것이 남에게 이로움을 주는 일이라는 생각. 그러면서도 아이 옆에 원할 때엔 있어 줄 수 있다는 것이 내가 이 일을 하며 느끼는 만족감이었다.
지난 7년 간 한 번도 없었던 일을, 상상도 해 본 적이 없던 일을 저질러 버린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남편과 친구에게 하소연을 하고, 다음 주 배정된 해당 센터의 다른 강의에 같이 가는 선생님께 강사 변경이 있을 수도 있다는 연락을 드렸다. 내 잘못이라는 걸, 명백한 내 실수라는 걸 알면서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꿈이었으면 했다. 지난 월요일 지독한 악몽을 꿨었는데 이어서 꾸는 꿈이길 진심으로 바랐다. 월요일 묘하게 스케줄을 다시 확인하고 싶었는데 또 나의 불안도가 높아진 거라 생각하며 애써 외면했던 나를 원망했다. 유사한 일이 있었던 주변 선생님들의 경험담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지만 어떤 것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들은 최소한 펑크는 내지 않았다. 약속을 잊거나 시간에 늦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실수지만 이 일을 하는 사람에게서 만큼은 절대 허락되지 않는 일이었다.
나는 내가 미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미 몸에서는 신체화 증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배가 아파오고 화장실을 몇 번이나 들락거렸는지 모른다. 손발과 어깨의 경직이 느껴지고 폐와 심장은 열로 가득 찬 듯 숨을 내 쉴 때마다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새삼스럽게 몸의 변화를 느끼면서 내 마음은 어떻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만히 내 감정을 들여다보았다. 나는 불안했다. 이 곳은 이번에 새롭게 강의를 시작한 센터인데 매년 새롭게 강사를 재공고 하는데 이것이 사유가 되어 떨어질까 봐. 나는 부끄러웠다. 내가 생각하는 괜찮은 강사의 모습을 보이지 못해서. 불안과 부끄러움은 깊어져 내가 나를 미워하게 하고 있었다. 이미 벌어져버린 일이건만 내 마음속에선 ‘이런 일이 어떻게 벌어질 수 있는 거야!’하며 화내고 혼을 내는 또 다른 목소리가 있었다. 그 목소리는 하루 종일 나를 따라다니며 결국엔 나를 울렸다.
이런 나를 보며 자존감을 생각했다. 미국의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가 처음 사용했다는 ‘자존감’이라는 단어는 자신이 사랑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소중한 존재이고, 어떤 목표를 이루어낼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는 마음이라고 한다. 내가 자존감이 낮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나는 늘 나를 단죄했다. 쉽게 용서하지 못했다. 나는 내가 사랑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를 의심해왔다. 목표를 이루어가고 있는지, 내 인생을 내가 멀리서 볼 수는 없어 목표점에 어느 정도 도달했는지 알 수 없어 불안해했다. 그리고 슬프게도 이런 나의 낮은 자존감은 아이에게도 유전되듯, 전염되듯 했다.
어제 아이는 학교를 다녀와 “엄마 잘못했어요. 내가 또 내 팔을 긁었어요.” 했다. 지난번 멍이 들도록 자신을 때렸던 아이는 어제 또 팔을 긁어왔다. 왜 그랬냐고 묻자 화가 많이 났고 학교에서는 시간이 없기 때문에 빨리 화를 풀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순간 아이의 자해가 화가 났고, 그리고 안쓰러웠다. 가엾은 아이는 화를 푸는 더 나은 방법을 알지 못한다. 화가 났을 때 숨을 크게 쉬라던지, 이미지화해서 몸 밖으로 내보낸다던지 하는 건 아직까지는 아이에게 이렇다 할 효과를 보이진 못했다. 아이가 잘 해결하는 방법을 익히길, 자기만의 방법을 찾아나가길 바란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나 자신의 자존감을 채울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어제오늘처럼 이렇게 실망스러운 내 모습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뿐이다. 나는 나대로 살아가야 한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아이도 실망스러운, 화가 나는, 한심한 모습일 때의 자신을 받아들이고 스스로를 보듬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리라 믿는 수밖에.
아직도 내가 밉다. 그리고 이해도, 용서도 안 된다. 앞으로 내가 적은 모든 일정이 의심이 되고 불안해질 것이다. 높아지는 불안감을 낮추려 나는 또 얼마나 애써야 할까. 그래도, 그래도 이런 나를 폭식이나 폭음으로, 또는 식사를 하지 않는 것으로 벌주지 않으려 한다. 밉다. 그래도 받아들여야 한다. 싫다. 그래도 용서해야 한다.
열 살 아들과 마흔 살 엄마는 이렇게 같이 자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