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던 잠은 누가 다 가져갔을까
“그런데 만일 정말로 잠이 신체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우리의 가장 근본적인 부분과 연결된 활동이라면 그것을 포기하는 사람들은 단순한 시간이 아닌 훨씬 더 중요한 것을 포기하는 것이 아닐까.”(돌봄인문학수업, 김희진 저, 92쪽)
엄마와 나 사이엔 내가 기억하는 어릴 때부터 보았던, 엄마 친구에 대한 유머가 있다. 요즘이야 그럴 수 없지만 이 년 전만해도 엄마 친구들끼리 여행을 가면 모두 잠자리에 누워서 “잘 자”, “잘 자요” 인사하려고 하면 이미 그 분은 머리가 내려가면서 베개에 닿기도 전에 잠이 들어 있다는 이야기다. 잠이 들 때까지의 시간이 오래 걸리는 엄마와 나는 늘 엄마가 여행만 다녀오면 그 분의 이야기를 하면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하며 신기하고 재미있어 하였다.
나도 그랬던 시기가 있었다. “머리가 베개로 내려가면서 이미 잠이 드는” 경지는 아니었지만 머리만 닿으면 자던 시기. 아주 가끔 ‘고민으로 밤 잠 이루지 못했다.’는 관용적인 표현을 쓸 일이 20대에는 있었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잘 잤다. 이 때의 나는 신상 핸드폰 배터리가 같았다. 충전기를 꽂으면 금방 완충이 되었다. 그러니 낮에는 쌩쌩하게 돌아갔고(?) 세상을 보는 나의 시각은 “의지가 있느냐, 없느냐”였다. 정해진 기한 내 하지 못하거나, 지각을 하거나, 일의 속도가 더딘 사람들은 게으른 사람이라고 딱지를 붙였다. 내 논리는 “아니, 할 일이 있는데 잠이 와? 잠 안자고 하면 될 거 아니야!”였다. 이런 자비less 같으니.
출산 후 조리원에서 집에 돌아온지 며칠 되지 않아 이 책의 저자가 72쪽에서 경험했던 것처럼 세상 밖으로 나온지 10일이 된 아들은 눈을 말똥말똥 뜨고서 밤 중 몇 시간을 깨어 있었다. 그 때부터가 시작이었다. 밤 중 수유도, 기저귀 가는 것도, 이유 모르게 깨어 징징거리던 아이. 덩달아 나도 깨어 있기 시작하니까 일을 하기 시작했다. 나의 밤잠은 그렇게 사라졌다.
퇴사를 염두에 두고 있던 출산휴가 기간이어서 나는 나의 쓸모에 대해서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내가 일을 하고 있다는 더 나아가서는 여전히 쓸모가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면 안심이 되었다.
아이를 돌보면서 불면이 시작된 줄 알았다. 지나고 보니 아니었다. 돌봄이라는 가장 쓸모있는 일을 하면서도 깨닫지 못했던 나는 일을 통해서 내가 쓸모가 있다는 것을 확인받으려고 했다. 심각한 불면은 아이가 밤중에 나를 필요로 하던 시기 이후에 나타났다. 밤에 잠을 못자니 낮에도 머리는 명료하지 않았다. 생각은 더디었고, 행동은 굼떴다. 체력적으로 버티기 힘들어졌고 작은 일로도 편협하고 과민하게 반응했다.
불면의 시기는 나에게 “아무 생각 없이 잘 잘 수 있었던 시기의 소중함”을, “무엇보다도 내 몸과 정신의 건강이 소중함”을 알려주었다. 한 때 잠은 무덤에서 실컷 자라는 말에 격하게 공감했었는데 지금은 “그러다 빨리 무덤 간다.”고 대꾸한다. 삼 년은 족히 쓴, 교체되지 않은 휴대폰의 배터리처럼 지금은 잠이라는 충전을 해도 완충이 되는 것 같지는 않다. 불면으로 짧지 않은 시간을 고민하면서 감사하게도 나에게 맞는 해결책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래도 힘든 날은 “낮잠이라니”하는 편견을 버리고 쪽잠을 청한다. 잠은 “마땅히 이래야 해.”, “저래야지”의 완고한 프레임을 뚫고, 내가 나를 돌보고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모습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