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이 왔다. 부들대는 손을 잡고서 급히 방으로 피신했다. 아직 완성되지 못한 그것은 내 뒤에서 잽싸게 모습을 바꾸었다. 마치 세이렌이 뱃사람들을 부르듯 익숙한 곡조를 내뱉었지만 세이렌과의 차이라면 그것은 성체가 되지 못하여 보이는 현상이다. 쫓기어 방으로 대피하고서야 그것임을 깨달았다. 그것이다. 그것이 오고야 말았다. 아. 탄식이 나왔다.
나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 아니, 나쁜 예감은 내게는 공기처럼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것이 올 것을 알고 있었다. 언젠가 나타나 내 일상을 할퀼 것을, 그로 인해 내가 많이 울 것을, 그리고 그것보다 더 많이 분노할 것을. 종내에는 옷으로 아무리 가려도 가슴팍을 파고드는 시린 바람을 막을 수 없을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조금은 더 준비할 시간이 있으리라 믿었다. 나는 다 계획이 있었다. 권위로 무장을 하리라. 예의로 길을 내리라. 그렇게 끝내 이기리라 하는 원대한 계획. 그것의 존재를 알고, 언젠간 찾아올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 미리 대비하지 못한 실책은 꽤나 컸다. 이렇게 소리 소문 없이 나타나 이틀 만에 내 입에 뜨거운 감자를 쑤셔 놓고 울게 할 줄은 몰랐다. 그렇다. 나는 울었다. 바보처럼 고작 이틀 만에 성체도 아닌 그것에게 진 것이다.
아이가 그것에 대해 물어올 때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던 것이 이제야 떠올랐다. 그것이 올까 봐 두려워하는 아이에게 웃으며 넌 아직 아기라고 말했던 두 달 전의 머저리가 나였다. 돌이켜보면 징조가 있었다. 여전히 엄마와 등하교를 하고 싶다고 해서 아이랑 같이 나섰던 등굣길, 작년처럼 손을 잡을 수도 없었고, 헤어질 때 포옹 인사도 없었다. 친구를 만나면 눈을 내리깔고 복화술처럼 “엄마는 이제 가세요.”라고 할 때 돌아서며 아이의 책가방 옆에서 웃고 있는 듯한 그림자를 보았던 거 같기도 하다. 집에서 둘이서 장난을 치다가 “뽀뽀” 하면 입을 맞춰주며 “치욕스럽다옹”이라고 할 때 어디서 저런 말을 들었는지 신기하게 여기며 장난인 줄만 알았던 그 말속에도 그것은 숨어 있었다. “이제 내 엉덩이 만지지 마세요.” 할 때엔 그것은 이미 실체를 갖추었다. 뭐든 처음이라, 아들의 모든 순간이 내게는 엄마로서 처음이라 몰랐다. 핑계 같지만 여전히 엄마랑 한 침대에서 자려고 들고, 아기 흉내를 내며, 집에선 자주 안겨와 몰랐다. 백 날 천 날 들어봐야 한 번 보고 한 번 겪는 것에 비할 바가 못 된다. 그래서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했던가. 조상들의 말은 틀린 게 없다.
이제 그것은 나를 향해 목소리를 높인다. “내게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나는 싫어요.”, “애들은 엄마처럼 생각하지 않을 수 있어요.”, “이번 주가 아니라 다음 주!”이렇게 아이는 나를 지적하기 시작하고, 통제 욕구에 브레이크를 걸어오며 권위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그다지 괜찮은 엄마가 아니어서 지적당할 것은 참으로 많다. 먼저 태어났다는 것으로, 내가 경제생활을 한다는 이유로 아이에게 우기고 생색내 왔던 것들은 이젠 입 밖으로 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현실에서 부당함을 느낄 때마다 가장 이상적인 형태와 상태를 들이대며 비교할 것이다. 본능적으로 부모의 말과 행동에 부조리함을 찾아내고 모순을 지적할 것이다. 몸을 사려야 한다. 훗날도 살아있어야 도모하는 거라고 했다. 필사즉생, 필생즉사. 어차피 다듬어졌어야 하는 부분이었다. 언젠간 겪을 일이었다. 입을 닫고 지갑을 열어야 하는 건 사회생활에서만은 아니다. 이렇게 시작되었다. 초등 4학년 아들의 사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