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불면이 언젠가 쓰임이 있기를 바라며.
분명 창밖은 깜깜한데 꽤 오래 누워있었던 것 같은 느낌에 일어났다. 어두운 창 너머를 보며 시간을 가늠하다가 꺼 놓고 누웠던 휴대전화를 켰다. 평소보다 조금 이른 시간일까 했는데 이제 겨우 한 시를 넘긴 새벽이다.
자기 전부터 먹어야 될 것 같다 생각했던 수면유도제를 찾아 일어났다. 몇 시간 후 일어날 것을 생각해 아침에 몸을 일으키기가 수월한 수면유도차를 마셨다. 도로 자리에 누워 자는 아이를 안아 봐도, 이불을 뒤집어써 봐도, 눈을 감고 기도문을 외워 봐도 잠이 오지 않는다.
잠이 오지 않는다. 이런 불면의 밤이면 미처 끝내지 못한 글이나, 시작하지 못한 글들이 생각난다. 써야 했는데, 써야 하는데 하는 생각은 늘 자괴감으로 이어진다. 해내고 싶었는데 해내지 못했다는, 해내지 못한 것은 나의 부족함 때문이라는 자책. 한정된 시간 동안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 생업을 위한 일(事)과 아이를 챙기는 일과(日課), 그리고 그보다는 당당하게 말할 수 없는 체력적으로 지칠 때면 어김없이 같이 오던 무기력감 속에서 의미 없이 스마트폰을 쥐고 보냈던 시간들.
참 쉽게 깨어지는 몰입은 글을 완성하는데 대표적인 어려움이다. 그 감정과 생각을 그대로 가지고서 한 자리에 써 내려가야 글을 쓸 수 있었다. 처음 책을 준비하면서 한 꼭지를 A4 기본 설정으로 3페이지는 써야 한다고 들었던 것이 부담이 되었다. 한 자리에 앉아서 생각을 정리하며 3쪽의 글을 쓰는 것은 주말 온종일이 걸렸다. 언젠가 느꼈던 고마운 깨달음을 나누고 싶다는 이유로 컴퓨터 앞에만 앉아서는 “엄마” 하며 다가오는 아이를 어를 때에 느껴지는 모순이란.
누구도 남의 일기를 사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말도 나를 머뭇거리게 하는 것 중의 하나였다. 초심은 계속 흔들렸다. 일반인이 쓰는 육아서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한 명의 자녀와 살며 내가 느낀 것이 일반화할 수 있는 걸까 라는 생각은 계속 들었다. 자녀가 한 명이라고 해도 전문가라면 이야기가 다를 것이다. 그럼 전문가란 무엇일까. 관련 학과를 졸업하고, 관련 세미나와 학회에 다수 참여하고, 자격증이 있고.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전문가는 될 수 없었다. 관련 일은 하지만 어떤 이론과 확신에 차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알게 된 것을 나누는 정도였다. 그리고 그 알게 된 것을 살면서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할 뿐.
이야기의 끝은 모두 ‘나’였다. 마땅히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원칙과 당위성을 이야기하는 이면에는 존재를 인정받고 싶어 하는 아이가 있었다. 불의한 것에 분노하는 이면에는 자신의 감정을 알아달라고 하는 아이가 있었다. 몇 살쯤 된 걸까 이 아이는. 몇 살인지도 알 수 없는 아이는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부터 꾸준히 키워야 하는 것 같다. 한 순간이라도 돌봄을 멈추면 여전히 그 자리다. 결국 내가 달래고, 말을 걸고, 글을 써야 하는 대상은 자궁을 통해 나온 아들이 아니라 내 마음속 텅 빈 집에 사는 것 같은 그 ‘아이’, 나였다. 이걸 알게 되면서 어설프게나마 짜 놓았던 목차가 흔들렸다. 그리고 돌파구를 찾지 못했다.
서문에나 넣을 수 있을 법한 이 글이 서문으로 쓰이는 날이 오길 바라며. 불면의 밤에 기대 본다. 아직 노트북 문서 파일 안에는 끝내지 못한 글들이 미련처럼 덕지덕지 남아서는 노트북이 더디 돌아가는 원인이 된다. 내 속에도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한 생각과 행동이 그렇게 나를 잡는다. 어디로 걸어야 할지 아직 길을 잡지 못했지만 가다 보면 무엇을 보든, 무엇이 되어 있든, 그래서 어떤 길로든 통하게 되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