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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엄마 Sep 04. 2020

나답게 육아 #13. 슬픈 평행이론

내가 원하는 엄마가 되기 위하여.

  며칠간 고민하던 엄마 생신과 관련해 마무리를 지으려 아침에 전화를 드렸다. 운동을 다녀오셨냐고 하니 오늘은 안 갔다고 하신다. 아버지와 같이 헬스장을 다니시는데 안 가셨다 하면 뭔가 두 분이 틀어져 있다는 거다. 며칠 전 이번 주 일요일인 엄마 생신으로 작은 말다툼이 있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더 커져서 그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던 아버지를 향한 엄마의 분노가 눈덩이처럼 커져서 결혼 생활의 결말을 이야기할 정도가 되었던 거다. 

  아버지는 나름대로 화해의 제스처를 보내고 싶으신 듯 보였지만 그게 엄마에게는 전달되지 못한 듯했다. 나는 지난 며칠간 동생들이 오지 못하는 엄마 생신을 어떻게 보낼까에 대해 여러모로 혼자 고민하고 있었다. 동생들은 없는데 삼 남매가 모으는 통장에서 식사비를 빼 써도 될지, 시국이 이런 시국인데 밖에서 외식해도 될지, 도시락을 주문하면 서운하시진 않을지,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고 하시지만 정말 그래도 다른 말씀이 없으실지 등등. 이런 고민을 가지고 있던 내게 엄마의 화는 고민거리가 하나 더해진 듯 해 불편했다. 답답함을 이야기하던 엄마의 목소리는 더욱 커지고 높아졌다. 잘 들으려고 노력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엄마의 이야기에 나 역시 감정적이 되었다. “너희 아빠가 챙겨주는 생일 밥상 안 받으련다. 내년에도 오는 게 생일인데.”라는 순간 나도 “내년에 누가 생일을 맞을지 못 맞을지 어떻게 알아요.”라고 하지 않았어야 할 말을 쏘듯 뱉어버렸다. 엄마도 몇 마디 더 하시고, 나도 몇 마디 더 하다 그렇게 끊었다. 하지 말았어야 하는 말인데 하는 생각에 ‘죽음’이 너무나 가까이 있다고 느낄 수밖에 없는 지금의 내 상황을 엄마께 문자로 보냈다. 


 “엄마는 늘 이런 식이야.” 전화를 끊은 후 내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아버지가 원망스럽고, 엄마의 말들이 나를 불편하게 찌르는 만큼 감정적으로 이해는 되었고, 그래서 또다시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엄마는 맏이인 나에게 아버지를 상대로 다 풀지 못한 분노와 한탄을 늘어놓았지. 나보고 어떡하라고. 화가 나고 슬펐다. 분명 엄마의 푸념을, 넋두리를 잘 들어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나는 화가 나 있었다. 아마 내가 생신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부담감과 부모님의 갈등 등이 나를 압박했었나 보다. 그 와중에 가장 나를 자극했던 말은 동생네 다녀와서 아버지랑 정리하겠다는 말이었다. 나는 그 말이 두려웠고, 나이 마흔에도 부모님의 이혼을 겁내고 있는 나를 발견하는 순간 상처와 두려움은 분노로 변했다. 그리고 차분하고 냉정한 머리로 생각을 하지 못하고 방어적으로 내가 받은 상처를 엄마에게 돌려주고 있었다. 잔인한 말로. 


  내가 부모님의 싸움으로 상처를 받았구나, 가족이 해체가 된다는 것이 지금도 심리적으로 큰 부담이구나 하는 걸 느끼는 순간 아들이 생각이 났다. 방학이라 옆에 있는 아들에게 물어봤다. “민아, 너도 엄마 아빠가 너로 인해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고 말해도 좀 겁이 나거나 무섭니?” 아들이 대답했다. “아니요. 조금이 아니라 아주 많이 겁나요.” 그랬구나. 나는 늘 무섭고 움츠러드는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지금 나의 아들이 그 일을 겪고 있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아침에 있었던 사건이 하나하나 분리가 되었다. 그리고 엄마의 모습이 나의 모습과 오버랩이 되기 시작했다. 첫 번째, 엄마의 분노와 하소연. 나는 참 많이 들었던 것이다. 가끔은 알지 못한다면 더 좋았을걸 이라고 생각되는 것들도 있었다. 가족은 같은 시간과 공간을 지니기에 분위기로 알게 모르게 전달된다. 또는 직접적으로 듣게 되기도 한다. 직접 듣게 되는 경우는 담담하기는 어렵다. 나는 참 싫고 힘들었는데, 나는 이러고 싶지 않았는데 나 역시 남편에게 분노할 때면 어린 아들을 잡고 하소연을 하듯 분노를 쏟아낸 적이 있다. 아들이 남편과 똑같은 행동을 할 때면 “너희 조 씨들은 다 그래?”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부끄럽다. 내가 참 싫은 말이었는데 나 역시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게. 

 두 번째는 싸움마다 “끝”을 말하는 것. 말하는 엄마에게는 결코 쉽게 말한 게 아닐 거다. 나 역시 쉽게 말하진 않았다. 말이 통하지 않고, 이렇게 사는 게 서로에게 좋지 않다고 생각할 때면 이혼 이야기가 나왔다. 나도 이미 법원 양식을 몇 번이나 다운로드하여 몇 번이고 썼었다. 너무 많이 지쳤을 수도, 이미 받았던 해결되지 않은 상처가 많았을 수도 있지만 이제와 생각해보면 너무 완벽한 결혼생활을 꿈꾸었던 것 같다. 살아가면서 갈등이 없을 수 있을까. 나는 지적하고 너는 고치고, 그렇지 않으면 너는 잘못된 것, 너는 결혼생활을 이어갈 생각이 없는 것이라는 흑백논리에서만 생각했다. 가족이 해체된다는 것,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사라진다는 생각은 어린 날이 나에게는 두려운 일이었다. 마흔이 넘었지만 엄마로부터 갈라서야겠다는 말을 들을 때면 가족이 사라지는 것 같은 생각에 두려워하는 어린 내가 있다. 그렇게 두려웠으면서도 엄마가 되어선 잊고 나 역시 아이에게 말했다. “엄마랑 살 거야? 아빠랑 살 거야?”, “넌 엄마랑 살아야지.” 아이가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느꼈을 막막함 보다는 이 상황에서도 나는 아이를 책임질 거라는 것만을 전달하기에 급급했다. 


  내가 부부간의 갈등에 나타나는 많은 모습들은 엄마와 아빠가 보여주던 모습이었다. 어린 날의 내가 그 순간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낭패감과 함께 느꼈던 좌절감을 내 아이에게도 전하고 있는 격이었다. 슬펐다. 정말 많이. 

 내가 힘들어봤으니까 아이는 힘들지 않게 좀 더 나은 엄마가 되도록 노력했으면 좋았을 텐데, 이렇게 가슴을 쥐어뜯으며 후회하지 않았을 텐데 나는 내가 자라온 방식 그대로 아이를 키우고 있었다. 무표정하거나 화내거나, 소리치거나 아이를 을러서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도록 했다. 남편과 싸우고, 그때마다 ‘내가 왜 이러고 살아야 하나.’하는 생각에 갈라서자고 또는 내 집에서 나가라고 했다. 아이에게 남편의 모습이 보일 때마다 싸잡아 비난했다. 그랬다. 정말이지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지금까지, 아니 이 글을 적는 순간까지의 나는 이랬다. 


  그 순간 엄마와 내 삶이 평행이론처럼 겹쳐 보였다. 너무나 슬프고 지독한 평행이론. 가장 사랑하는 누군가를 아프게 하는 평행이론. 우리 가족 한 명 한 명의 면면을 살펴보면 모두가 피해자다. 정상적인 가정생활을 하지 않았던 할아버지 밑에서 자란 가엾은 아버지. 어린 시절부터 돈을 벌며 할머니의 악다구니를 견뎌야 했던 착한 둘째 아들이었던 아버지는 결혼생활이 어떤 건지 알지 못하고 결혼하셨다. 배우자와 잘 지낸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몰랐던 아버지로 인해 친정부모님 사이엔 잦은 갈등이 있었다. 아직도 이걸 생각하면 아버지가 가엾다는 생각만큼이나 왜 아버지도 할아버지처럼 사셨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타지에서 자식 셋을 낳고 기르신 엄마는 남들과는 원만히, 좋은 관계로 지내는 능력이 탁월한데 첫째인 나에게는 푸근함이 늘 아쉬웠다. 그런 엄마께 사랑받고 싶었던 어린 나, 부모님이 원하는 모습을 원하는 행동을 하려고 했던 나, 그리고 자라선 가해자가 된 나. 


 아이를 십 년 키우면서 엄마로서 못난 내 모습으로 부모님이 떠올랐던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오래도록 미워하고, 슬퍼하고, 비워내다 보니 이제는 원망스러움은 많이 사그라들었다. 내가 들어보지 못해서 해주지 못하는 말, 내가 받아보지 못해서 해주지 못하는 행동. 그걸 언제까지나 부모님 탓을 할 수는 없다. 사랑받고 자라는 기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존재만으로도 환영받는 기분, 나는 아이가 이런 걸 느끼며 자라길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제는 정말 바뀌어야만 한다. 똑같은 자극에 이전과 같은 반응이 아니라 다른 반응이 필요할 때라는 것을 크게 느꼈다. 다르게, 다르게 살고 싶다. 이제는. 머리로 아는걸 몸으로 실천하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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