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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엄마 May 11. 2020

나답게 육아 #3. 아들아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

아이의 성장 정도를 또래와 비교하며 마음이 바빠지는 보호자에게.

   아이가 어릴 때 백화점에 모유수유실이 근사하게 생기기 시작했다. 엄마가 되고서야 보이는 것 중의 하나가 모유수유실이었고, 종종 이용했었다. 한 번은 모유수유실에서 수유를 마치고 아이를 챙겨 나올 차비를 하고 있는데 키가 몹시 작은 아이가 열심히 걸음마를 하고 있었다. 아무리 보아도 돌이 지난 걸로는 보이지 않아 애 엄마에게 “몇 개월이에요? 엄청 잘 걷네요.” 했더니 이제 돌이라며 아이가 9개월부터 혼자 걸었다고 했다. 너무 놀라서 9개월요? 하고 다시 되물을 정도였다. 그러고 나서는 내 아이를 다시 한번 내려다보게 되었다. 여전히 엄마가 아기띠에 감싸 안아주기를 바라며 나를 올려다보는 아이를 보는데...... 고백한다. 순간이었지만 ‘넌 언제나 걷니?’ 하는, 한숨 나는 심정이었다. 

아이는 돌이 되는 날에도 여전히 걸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렇게 태어난 지 일 년이 되는 날로부터 정확히 보름이 지나고 아이는 주방에 앉아있다가 싱크대를 잡고 섰다. 그러더니 갑자기 싱크대에서 손을 떼고는 거실에 있던 나를 향해 몇 발 자국 걷지 않아 주저앉았지만 나는 그 순간 무척이나 놀랐고, 신기했으며, 감탄했고, 그리고 부끄러웠다. 나는 아이가 아주 늦게 걸을 줄 알았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그 간 벽을 잡고 서서 손을 뗀다던지, 걸음마를 시도했는데 주저앉았다던지 하는 어떤 준비과정이 없었다. 혼자 걷는 것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는 것 같았던 아이가 갑자기 일어나 혼자 걸으니 신기할 수밖에. 그렇게 아이는 내게 또래는 걷는데 안아달라 칭얼거리기만 하는 모자란 녀석에서 놀랍게도 단 한 번만에 일어나 걸음마를 하는 천재가 되어 있었다. 


  걷고 나니까 이제는 말하는 것이 문제였다. 빵, 바나나, 계란, 밥, 아빠, 엄마, 할아버지, 할머니 등의 몇 개 되지 않는 단어만을 말했다. 심지어 발음도 정확하지 않고, 할머니를 “이야”라고 부른다던지 전혀 알 수 없는 소리로 말하는 것도 있었다. 4살이 되면 어린이집을 보내야지 생각했는데 개월 수가 늦어 4살이 되는 해 3월은 개월 수로는 30개월밖에 되지 않았다. ‘말이라도 해야 어린이집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빨리 알아챌 텐데.’ 말을 하길 바라는 마음은 9시 저녁 뉴스의 메인을 차지하기 시작하는 어린이집의 각종 학대 사건에 맞춰 더 조급해졌다. 두 돌이 지나도 별반 말이 없고, 표현이 없는 아이를 보고 지켜보던 친정엄마가 “언어치료실이 있다던데 그런 곳을 가보지?”라는 말을 할 정도였다. 정말 그래야 할까 하는 마음이었지만 “조금만 더 있어보고요.”라고 했었다. 그러던 아이는 어느 날 갑자기 27개월 무렵 내가 운전하는 차 뒷좌석에 혼자 앉아 “엄마, 지난번에 oooo 했었잖아요.”라고 말을 해 놀랐다. 그리고 어제까지만 해도 할머니께 “이야~” 하던 아이가 다음 날 갑자기 “함 모미 이거 해주세요.”라고 말을 해 듣고 있던 나와 친정엄마를 경악에 가까운 감정에 몰아넣었다. 

시간이 지나고서 주변에서 들은 이야기로는 말이 늦거나 표현이 적절하지 않은 아이들은 구강구조에 문제가 있는 경우 외에도, 말하기 전에 이미 모든 것이 해결이 되어 표현할 필요가 없는 환경에서 살거나, 문장을 머릿속으로 완벽하게 만들어 말하고 싶은 조심성이 많은 성격 또는 완벽주의적 성향에 그럴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남들이 한다는 시기 즈음 아이의 발달을 기대하고, 그러다 또래보다 느린 속도에 실망하고, 그리고 다시 감탄하기를 몇 차례. 이런 일들을 겪으며 그 순간마다 나는 다짐했었다. 내 아이에게는 그만의 속도가 있다고. 다른 아이와 비교하지 말자고. 하지만 마음은 쿠크다스 같아서 생활 속에서 쉽게 부서지고 가루가 되었다. 이후에도 나는 아이보다 월령이 훨씬 느리지만 가위질을 무척 잘하는 아이를 보면서, 아이보다 조금 빨리 나긴 했지만 어른의 말을 구사하는 누군가의 딸을 보면서 끊임없이 내 아이와 견주었다. 그리고 이런 살핌에는 아이가 잘 자라고 있는지 하는 불안과 염려, 걱정이 있었고, 종국엔 엄마인 나의 '역할 수행평가'가 있었다. 엄마로서 잘하고 있는가, 아이가 느린 것이 내 탓은 아닌가. 예를 들면 아이가 가위질을 못하는 건 소근육 발달에 힘써 주지 않은 내 탓이라고 생각하는 거다. 그런 자책과 함께 소근육은 뇌와 연결되어 있는데 게으르고 부족한 내 탓에 아이가 지능이 떨어지면 어쩌지 하는 걱정. 또 이런 게 있었다. 말이 느린 내 아이를 보고 말을 잘하는 딸을 둔, 당시 알던 분이 나에게 “너 집에서 말 별로 안 하지?” 라며 엄마는 수다쟁이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나는 경계도 심한 편이고, 말 수 자체도 적다. 말을 하면 몸속 배터리가 쭉쭉 줄어드는 것 같은 사람이다. 그러니 아이와 단 둘이 있을 땐 그렇지 않아도 몸을 많이 써야 하니 지치기도 했고, 자연스럽게 말이 없었다. 아이의 말이 느렸던 것은 그런 영향이 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만이 이유다, 아니다 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우리는 왜 그렇게 아이를 비교 대조하게 되는 걸까.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건데 우리나라는 지리적으로, 사회문화적으로 남과 더불어 살아간다는 공동체 의식이 강하다. 이 공동체 의식은 위기상황에서 단결해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데에는 큰 장점을 지닌다. 반면에 개인과 개인 간의 경계가 약해서 의도치 않게 침범을 할 수도 있다. 나도 모르게 침범을 하고, 침범을 받는 것. 상대가 할 수 있는 말 같은데 기분이 괜스레 나쁘다거나, 내가 생각했을 때 별 대수롭지 않은 말이나 행동에 발끈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경계가 지켜지지 않은 경우가 아닐까 싶다. 이렇다 보니 온전히 자기만의 기준을 가지기 어렵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맞춰 간다고나 할까. 평균점을 찾고 나도 그 줄에 맞춰 선다. 그렇게 자라온 우리라서 자녀에 대해서도 나도 모르게 다른 아이들을 살피며 공통점과 차이점을 찾아내며 줄을 세운다. 아이가 또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길 바라는 마음, 비슷비슷하게 무리 지어 ‘우리 편’이라고 하길 바라는 마음일 수 있다. 

 또는 아이의 발달에 대한 염려일 수 있다. 지나고 돌아보니 내가 아이를 또래와 내내 비교하게 되는 마음은 대부분 <걱정>이었다. 처음 하는 엄마라는 역할에 ‘아이들은 원래 이러기도 하더라. ’라는 감이 없는 상태에서는 아이의 작은 행동이 큰 기쁨이기도 하지만 대수롭지 않은 것에도 깊은 염려를 하게 된다. 영유아 검진을 갔을 때의 일이다. 아이가 모둠발로 뛸 수 있습니까? 등의 질문 앞에서 나는 늘 고민했다. 고등수학만큼 어려웠다. 모둠발로 뛸 수 있냐? 한 발로만 서 있을 수 있느냐 등의 질문은 그나마 양호했다. 바로 그 자리에서 해보면 되니까. 하지만 사람을 그릴 수 있는지 같은 질문은 난감했다. 아이가 했던가? 못했던가? 이 개월 수에 이걸 못하면 문제가 되는 걸까? 

영유아 검진을 하면서부터는 아이의 발달과 관련된 이상을 조기에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 큰 장점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아이의 언어, 인지발달과 관련된 치료센터가 생기는 것도 발달이 늦은 아이들을 조기에 발견하고 적절히 대처해 나가는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실제로 주변에는 언어치료를 받아 훨씬 좋아졌다는 보호자들도 보았다. 전문가의 판단에 따라 치료가 필요하다면 진행할 수도 있다. 여유와 적시 사이의 선택은 어떤 것이든 당사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결국 선택은 보호자의 몫이다. 다만 내 아이가 또래보다 부족하거나 모자라 보일 때 그래서 마음이 급해지거나 불안할 때에는 잠시만 걱정을 내려놓고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 쉬어 보자.  ‘내가 이만큼 아이를 걱정하고 있구나.’라는 자신의 마음을 살펴본다면 좀 더 나은 결정을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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