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선택한 단어

돌아와 거울 앞에

by 아니

새벽부터 눈이 떠졌다. 좋은 꿈을 꿨다. 상대는 남자였는데 나의 투덜거림에도 기분 좋게 웃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상대가 나의 빈정거리듯 투덜거리는 것을 받아주는 느낌에 말을 하다가 나도 멈췄다. 그리고 말했다. "이제 당신이 말해보세요. " 누군지 특정할 수 없는 상대는 누구나였고, 누구도 아니었다. 꿈에서나마 이렇게 편안할 수 있다니. 꿈에서 깨어났고, 다시 잠들지 못한 채 약 한 시간을 누워 꿈을 곱씹었다.


꿈에서 깨자 어제부터 오늘까지 내 마음에 남아 있는 단어가 다시금 떠올랐다. "의무와 권리". 그는 나에게 무엇인가 받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는 나에게 의무를 다했나. 나는 어떤 권리를 받았나. 무엇보다도 저 단어가 가족 사이에 적용되는 단어인 걸까. 나의 만족과 행복과는 별개로 그는 나를 의무로 키웠나 보다. 그래서 그렇게나 중고등학생이던 나에게 공부를 못하면 새벽에 우유배달을 하든 학교를 때려치우고 공장을 다니라고 했나 보다.


아버지는 엄마가 아프면 나에게 문자를 했다. "엄마가 이러니, 엄마가 저러니~" 그럼 나는 죽을 싸가거나, 죽을 사가거나 전화를 드리거나 친정에 가 병원에 갈 것을 채근한다. 그러길 몇 번 하고 나서 엄마가 아버지를 나무랐다. 내가 아픈데 왜 아이를 부르냐고. 배우자인 당신이 챙기는 거라고. 그 뒤 꽤 오래도록, 몇 년 간 잠잠했는데 이번에 엄마가 보이는 모습은 또 혼자서 감당이 되지 않았나 보다. 보내온 문자는 내가 엄마를 잘 아니, 마음을 풀어주라는 것이었다. 지난여름 엄마와 나 사이 있었던 일이 스트레스의 원인이라고 추정하면서. 머리가 하얗게 질렸다. 내 상황을 전달했다. 나는 우울증으로 상담을 받고 있다고 도울 부분을 정확히 말씀하시라고. 여기에 심한 두통과 안압으로 인해 눈의 실핏줄이 다 터진 것에 대한 병원 검사를 준비하실 수 있게 내가 아는 선에서 말씀드렸다. 대화를 하면 좋겠다고 한다. 그리고 "가족이 뭐냐? 의무도 권리도 함께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라고 하셨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도 걸리지 않고 지나가는 말이 없어 머릿속은 또 한 번 하얗게 되었다. 잔 펀치를 연달아 맞은 기분이었다. 어떻게 내가 당신과 대화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걸까. 누구보다도 주장이 강하고, 자신만의 색깔이 분명한, 프레임이 고정되어 있는 그런 당신과 내가, 내 인내와 노력 없이 웃으며 이야기한 적이 있었던가. 그리고 의무와 권리라니. 두 시간이 지나도 마음에서 나가지 않는 그 단어에 종료된 대화를 다시 시작했다. 가족 간에는 '사랑'이라고. 그리고 내 문자에 대한 답은 '대충 살자.'였다. 대충이라는 단어가 참 우습다. 다른 사람도 아닌 아빠가,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을 평가할 때는 그렇게나 까다롭고 엄정한 잣대를 가져댜 대면서 자신에게는 다르게 적용되니. 그는 대충이라는 말로 다시 한번 내 마음을 짓뭉갰다.


대충 넘어갈 수 없다. 단어는 그 사람 생각의 핵심이다. 하고 싶은 말의 정수다. 비슷하거나 유사한 뜻의 단어가 있음에도 그 단어를 선택한 것은 그가 전하고자 하는 것이 그 안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사업이 망했음에도 나를 물리적으로 버리지 않아 감사하다. 한편으로는 그보다 더 오래전부터 나와 심리적으로 이어진 적이 없었다는 것을, 어쩌면 부모와 자식은 그래야 한다는 것조차 몰랐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심리적 고아로 자랐음을. 그런 내게 그가 권리와 의무를 이야기한다면 나는 더 해야 할 것을 찾지 못하겠다.


아버지를 사랑할 수 있을까. 내 마음에 대한 약간의 미심쩍음도 없이 아버지를 사랑하는 날이 오기는 올까.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라 좋은 꿈도 서글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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