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이십오년 시월 십오일

by 아니

아침. 마음이 급하다. 오늘은 먼 곳을 가야 한다는 불안감에 알람이 울리기 전부터 눈이 떠졌다. 그러면서 계속 자고 싶은 마음에 쉬 일어나지 못했다. 남편이 새벽 한 시 반에나 들어왔고, 화장실을 가는 소리에 나 역시 깊이 자지 못하고 뒤척였다. 오늘은 남편 회사 창립 기념일이라 휴무다. 오늘만큼은 아침에 아이 학교 등교를 맡아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는데 여지없다. 남편은 남편이다. 내일이 쉬는 날이면 오늘은 반드시, 늦게까지 술을 마셔야 직성이 풀린다. 그걸로 인해 그렇게나 싸웠음에도. 그 사람은 내 불만이 불편하지 않다. 최소한 내 잔소리가, 악담이 그리고 이어지는 다툼이 전부 술 마시는 만족감보다는 적어 견딜만하다는 뜻이겠지.


머리카락이 길어서 머리 감는 게 참 싫다. 자꾸만 굼떠지려는 손을 움직여 머리를 감는다. 재빨리 씻고 아이를 깨운다. 한참이 걸려서야 아이가 일어난다. 어제 손빨래해 둔 아이의 생활복 하의와 며칠 전 세탁했는데 아이가 정리하지 않은 빨랫대의 생활복 상의를 챙겨다 안겨준다. 아침은 전날 먹고 국물만 남은 국에 밥을 말아먹고 가겠다고 한다. 뭐라도 먹는데 의의를 두고서 평소 먹던 밥의 절반만이라도 먹고 가도록 했다. 어제도 엄마가 먼 학교를 가야 했는데 오늘도 그러니 지하철 타고 가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당부한다. 아이도 나름 서둘러 움직이는 것 같았지만 역시나 잠이 덜 깨서인지 움직임이 둔하다. 준비를 다 하고 집을 나서려는 시간이 7시 58분. 지금은 지하철을 타도 늦을 시간. 뛰어가겠다는 아이가 안쓰러워 잠시 망설이다가 엄마가 너를 내려주고 가마 했다. 내비게이션 시간은 20분이 더 늘어났다. 파운데이션과 아이브로우를 가방 속에 던지듯 넣고, 짐을 챙겨 급히 차를 몰아 나온다. 다행히 아이를 제시간에 내려주고, 다시 집 근처로 돌아와 외곽도로로 차를 올렸다.


두 번이나 길을 잃는 실수를 했다. 고가도로에서 내렸어야 하는데 놓쳤다. 다시금 잡은 경로에서 왼쪽으로 가야 할 것을 오른쪽으로 왔는지 또 틀렸다는 알림이 울린다. 학교 근처에서는 주차장을 찾지 못해 두 바퀴를 돌았다. 이틀 전 있었던 교리교사 단톡방에서의 일로 통화를 하며 운전하는데 마음이 심란해 더 헤맨 듯하다. 늦지 않아 정말 다행이다. 15분가량 기다려 수업에 들어갔다가 나왔다.


근처에 성당이 있단다. 가서 묵주기도를 했다. 5단을 했는데 분심이 들어 다시 했더니 시간이 꽤 걸렸다. 30~40분을 운전해 집에 돌아온다. 오는 길, 아이의 상담센터 선생님이 전화가 왔다. 이번 주 아이가 시험공부한다고 상담을 가지 않겠다고 했더니 걱정이 되신 모양이다. 아이가 잘 지낸다고, 다만 학원을 다니게 되면서 상담에 가는 시간을 아깝다고 생각하는데 토요일로 바꿔서 조금 더 했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렸다. 선생님도 아이가 좋아지고 있지만 지금 이대로 끝나면 양은냄비처럼 금세 식을 수 있다, 무의식에서 에너지를 끌어다 쓸 수 있기 위해서는 조금 더 상담을 진행했으면 했다. 근황을 나누고, 일정을 조율하는 사이 집에 도착했다. 전화를 끊고 주차하고 집에 들어갔다.


아침에 미처 하지 못한 설거지가 그대로 놓여있다. 여기저기 바닥을 뒹구는 머리카락들. 남편은 없다. 아마도 병원 등의 자기 볼 일을 보러 갔겠지. 창을 열고, 청소기를 돌린다. 배는 고픈데 날 위해 뭔가를 챙겨 먹을 힘은 없다. 식탁 위에 있는 식빵을 프라이팬에 앞 뒤로 구워 먹는다. 인스턴트커피도 한 잔 탔다. 오훈데 생각하면서도 그래도 술은 아니잖아라고 정당화하면서 마셨다.

이틀 전 일로 속상해 있을 분께 전화를 한다. 받지 않는다. 잠시 기다렸다가 다시 전화를 한다. 여전히 받지 않는다. 성당에 앉아 보냈던 카톡의 1은 사라지지 않았다. 마음이 많이 아픈가 보다. 이 정도까지 상황이 심각해질 일인지 이해가 되지 않아 마음이 답답하다. 주일 일정 때문에 교무 선생님, 신부님과 각각 통화를 했다. 기분 전환을 위해 친구와 통화한다. 몸의 긴장이 낮아지지 않는다. 전화를 끊고서 일어나 설거지를 하고, 세수를 했다. 얼굴에 마스크 팩을 하며 잠시 쉬다가 아까 친구 딸의 귀가로 끊겼던 친구와의 통화가 다시 이어졌고, 이번엔 내 쪽에서 남편과 아들의 귀가로 통화를 종료했다.

아이 간식을 챙겨주려고 하니 평소와 달리 학교에서 뭘 많이 먹어서 음식이 들어가지 않는단다. 11월과 12월 강의 배정이 된 곳 중 세 곳에 전화를 했다. 해야 할 일들이 눈앞을, 머리를 채운다. 어제 데쳐놓은 나물을, 오늘은 무쳐야 한다. 시간 맞춰서 학원을 가라고 아들에게 당부하고 마늘을 사러 나가면서 된장찌개도 끓이기로 하고, 애호박과 버섯, 무도 함께 사 왔다. 집에 돌아와 법륜스님 즉문즉설을 틀어 놓고 반찬을 만든다. 설거지를 하며 만들지만 좁은 주방은 완성된 고사리나물, 절여지고 있는 무, 끓이고 있는 다시마 육수로 아사리판이다.


두 시간가량 서서 반찬을 하며 상을 준비했다. 아이가 들어온다. 급하게 오리고기 팩을 뜯어 약속했던 오리 고기를 구워준다. 저녁을 먹는다. 아이는 또 자전거 교체에 대한 이야기다. 학생이 자전거에 100만 원을 쓰는 것을 허락해 준 것이 왜 쉬운 일이라고 여기는 걸까. 그런 자전거를 얼마 되지 않아 교체한다는 것을 왜 부모가 허락해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아이의 분노에 걸려들지 않으려 담담하게 말하면서 바뀌지 않은 내 생각을 말해줬다. 그때부터 아이는 화가 났다. 설거지를 마치고 낮에 청소기를 돌려둔 바닥에 물걸레질을 한다. 같이 링 위로 올라가지 않는다. 같이 소리 높이거나 분노하지 않는다. 아이는 남편과 산책을 다녀왔고, 그래도 풀리지 않는 분과 엄마에 대한 원망과, 자기 잘못에 대한 부끄러움이 섞여 슬쩍슬쩍 건드린다.


화장실에서 거실로 치약을 던지고 내 말꼬리를 잡아 놀리듯 흉내 낸다. '저렇게 살아서.'라고 했던가. 내 삶을 비웃는다. 나는 내 삶에 만족한다고 했다. 최선을 다해서 살아왔다고. 이제야 컴퓨터 앞에 앉아 결과보고서라도 쓰려는 나에게 커터칼을 들고 와서 말한다. 자기 말대로 해주지 않으면 그어버리겠다고. 이건 협박이고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하자 그럼 엄마를 찌르겠다고 한다. 찌르라고 했다. 엄마도 커터칼로 스스로를 그으란다. 나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고 하자 자기는 했다고 한다. 그건 너의 선택이었다고 했다. 그동안 커터칼로 긋지 않았는데 왜 못하게 하냐고 한다. 화가 난다고 자해를 하는 것은 좋은 선택이 아니니까, 그것을 대신할 수 있는 선택을 너에게 말해주지 않았었냐고도 했다. 아이는 칼을 넣었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나는 동안 남편은 자신의 침대에 누워 있었다는 것이 더 놀랍다. 아침 6시 10분부터 밤 11시를 1분 남겨둔 나의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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