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둘이서 경주 여행을 갔다. 가기 전 날에도 여행 짐을 싸지 않자 남편이 "내일 가는 거 맞아?"라고 물었다. 아이도 나도 일이 코 앞으로 다가와야 하는 편이라 짐 가방을 준비하라며 잔소리를 하려는 남편을 "우리끼리 가니까 우리가 알아서 할게." 하고 선을 그었다. 그러나 역시나. 큰소리친 게 무색하게 중요한 것을 두고 왔다. 매일 밤 9시면 먹는 아이의 정신의학과 약.
약을 먹기 시작한 후에도 여러 차례 여행을 가거나 다른 곳에서 자고 오는 일이 있어 나는 아이가 당연히 약을 챙겨 올 줄 알았다. 아이에게 물어보니 긴장된 얼굴로 생각은 했는데 깜빡했단다. 순간 내 목구멍까지 타박이 올라왔지만 꾹 눌렀다. 아이를 타박해서 뭐 하랴. 그러는 나 역시 기관지 상태가 좋지 않아 뿌리려고 챙겨둔 약과 아이의 인후 스프레이를 여행 짐에 넣으려고 '분명히' 손에 쥐었는데 여행 가방 속에는 없는 걸. 모전자전이다. "엄마가 한 번 더 확인해 볼걸. 하루니까 오늘은 그냥 지내보자. 이 참에 약 안 먹으면 기분이나 몸이 어떻게 다른 지도 느껴보자."
밤 9시에 약을 먹은 지도 이미 일 년이 되어간다. 내가 알게 된 아이의 질병 이름이 우울증, 조울증, 조현병 증상을 동반한 조울증으로 바뀌는 동안 아이의 약은 용량이 조금씩 늘었고, 약이 바뀌기도 했다. 아이의 감기약 하나도 찾아보며 키웠는데 이 약만큼은 마주 볼 용기가 없었다. 아직도 약의 이름조차 제대로 알지 못한다. 약을 먹던 초반에는 9시에 먹으면 9시 30분쯤에는 머릿속에 불이 딱 꺼지는 거 같다고 했다. 약은 반추 사고를 하는 아이 마음과 생각의 전원을 강제 종료하는 듯했다. 약이 어느 정도 익숙해진 후에도 매일 정해진 시간에 약을 먹은 후 아이의 상태는 직전 또는 그날의 전반적인 무드에 따라 보여주는 모습이 조금씩 다른 거 같다. 전처럼 바로 전원이 오프 되는 것 같지는 않지만 잠에 취해 업 될 때가 있고, 다운될 때가 있다. 과격해질 때가 있고, 기운이 없어 보여 걱정이 될 만큼 가라앉은 채 자러 들어갈 때도 있다.
그러니까 약을 먹지 않은 아들은 일 년 만이었다.
경주는 APEC 정상회담을 준비하며 도로 곳곳이 공사 중이었다. 차가 밀려 다른 때보다 이동 시간이 더 걸렸고, 저녁 식사도 늦었다. 늦은 저녁 식사 후, 아이가 좋아하는 카페에서 샀던 빵을 가지고 숙소로 들어왔다. 내가 먼저 씻는 사이 아이는 자기가 고른 빵의 맛을 연신 감탄하며, 흡족해하면서 먹었다. 즐거워하지만 표현이나 행동이 과하지는 않았다. 11시 30분이 넘어서까지 깨어 있으면서 그다지 졸려하지 않았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혼자 스마트폰을 보기도 하고, 또 그러다가 애교를 부리기도 했다. 12시를 넘겨서야 자자고 하는 내 옆에 붙어 내 팔에 자신의 등을 붙인 채 잠이 들었다.
나는 여행지에서는 잠을 거의 이루지 못하니 중간중간 계속 눈이 떠졌다. 에어컨 소리에 깨고, 온도에 깨고. 그럴 때마다 아이를 봤는데 아이도 네댓 번 나와 눈이 마주치고 뒤척인다. 약을 먹기 전엔 잠들 때까지는 힘들었지만 잠이 들면 다음 날 아침 깨기 전까지는 숙면을 취하는 아이였다. 아이는 이제 잠을 잘 자지 못한다. 깊은 잠에 들지 못하고 뒤척인다. 자다 깨서는 불안한지 나를 확인하고 다시 눈을 감는다. 깊이 자지도 못하고, 충분히 자지도 못하고 아침 일찍 일어난다. 자연히 다음 날 몸의 상태도 최상은 아니어서 약간의 피로가 남아 있다. 아이가 혼잣말로 말한다. "이제 약을 안 먹으면 잠을 못 자."
약은 내 아이에게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방학 중, 내가 다른 일상을 접고 아이와 단 둘이 지내는 시간에 조금만 신경 쓰면 아이가 민감해지거나 예민해질 일이 적다. '조'가 될 일도 '울'이 될 일도 없다. 하지만 학교를 가는 일과를 할 때면 아이에게는 많은 자극이 밀려온다. 다른 아이들의 말과 행동, 자신의 능력과 한계치, 하기 싫지만 해야 하는 것과 하고 싶지만 할 수 없는 것들 등. 이런 것은 자극이 되어 아이가 칼이나 가위를, 클립을 세워 자기 스스로를 공격하게 한다. 그 일을 막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 일을 막는 과정에서 약은 나와 아이의 선택이 아니라 정신과 의사의 소견으로, 우리는 '선택해야만' 하는 거다.
어느 날 저녁, 집에서 문제집을 풀던 아이는 화가 나자 소리를 쳤다. "빨리 약을 달라고요." 앞뒤 맥락 없이 말하는 것 같지만 아이는 약을 먹으면 생각이 멎는다는 것을 이미 체험하고 있었다는 반증일 거다. 반면에 저녁 8시부터 2시간 하는 온라인 수업에서 9시에 약을 먹으면 아이는 그 이후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다고 했다. 이른 아침에만 보이던 기립성 저혈압인 듯했던 증상은 종종 "얼굴에 피가 통하지 않는 것 같아요.", "머리가 아파요."로 오후에도 두통을 호소하는 것으로 확대되었다. 진료를 보면서 말하니 의사는 물을 많이 마시고 충분한 수면과 휴식을 취하게 하라고 한다.
이대로 괜찮은걸까. 약이 조심스러운 나의 기우일까. 아이가 실수로 약을 가지고 오지 않았던 여행의 그 날 나는 또 답이 없는 고민과 걱정 속에 놓인다.
2025 .7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