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이십오년 십일월 팔일

by 아니

토요일이다. 마음이 바쁘다. 전 날 가지 못했던 정형외과를 갔다가, 아이 상담을 가려고 하니 토요일에도 여유가 없다. 11시 30분까지 상담, 40분에서 한 시간가량 상담을 받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바로 성당 주일학교 교사 회의에 참여해야 한다. 그래서 지난주와 오늘처럼 아이를 혼자 둘 떼면 마음이 편치 않다. 지난주 남편은 개인적인 약속으로, 이번 주는 출근한다고 했다. 시간에 있어 남편의 도움을 받는 게 참...... 어렵고 힘드네.

결국은 몸을 쉽게 일으키지 못하는 아이로 병원 진료는 못 가고 거즈를 떼어내고 메디폼을 붙이고 버스를 타기 위해 집을 나섰다.


상담은 지난주와 동일하게 내가 함께 들어갔다. 이번에는 모래판 앞이다. 나는 모래를 만지고 싶지 않다. 나는 아이 상담에 함께 들어가고 싶지 않다. 아이에게 어둡고 깊은 나의 내면을 다 보이고 싶지 않다. 하지만 함께하는 것이 아이를 위할 수 있는 거라면 해야겠지. 오늘은 모래판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만들어보는 거였다. 아이도 나도 섬을 만들었는데 아이는 가운데 하나의 섬을 만들고 주변을 바다로 만들었고, 나는 섬 세 개를 만들었다. 거리가 멀고 지대가 높은 왼쪽 섬에는 남편이, 오른쪽 평편한 섬에는 내가, 내 섬과 가까이 붙어 있다시피 하지만 경계가 그어져 있는 위쪽의 삼각형 모양 가장 큰 섬엔 아들을 뒀다. 아들은 남편과 몸은 가까이 있었지만 나와 마주 보고 있었고 내 섬은 아이와의 어릴 적 추억을 회상하는 피겨 두 개가 있었다. 아이의 섬에는 아이가 어릴 적 좋아했던 흔들의자, 개미, 새, 토끼로 채워져 있었다. 상담사는 우리 각자의 설명을 듣고는 아이에게 엄마의 모래판에서 궁금한 것이 있냐고 물었다. 아이가 물었다. "왜 나를 이렇게 멀리 뒀어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잠시 말을 골라야 했다. 엄마가 깐깐하다고 하니 이런 내가 너에게 상처를 줄까 봐, 그리고 너도 나와는 다른 하나의 인격체임을 인정하기 위해서 그랬다고 했다. 하지만 사실하지 못한 말은 네가 아빠와 단 둘이 산책 가서 엄마 험담을 아빠에게 많이 한다고 전해 들었다고, 그게 나에겐 상처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어떻게 아이에게 할 수 있는지 나는 알지 못했고, 여전히 알지 못한다.

어쨌든 아이는 원하는 대로 옮겨 보라는 상담사의 말에 자신과 토끼 피겨를 내 섬으로 옮겨 던지듯 눕혀뒀다. 자기는 아직은 더 이렇게 엄마 가까이 있고 싶다고도 말했다. 나는 달리 할 말이 없어서 나와 아이 섬의 경계를 더 옅게 손보고 내 피겨 방향을 다시금 바뀐 아이의 위치에 맞춰 돌렸다.


상담비 결제를 하고 돌아왔다. 학원비에 이어 상담비까지. 월초인데 벌써 90만 원이 육아로 쓰였다. 마음이 묵직하다. 돈을 아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한편, 아이가 썩 원치 않는 상담을 하는데 뭐라도 밖에서 맛있는 걸 사주며 이 시간을 좋아하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동네 시장통의 저렴한 런치 가격의 초밥집을 갈까 물으니 간다고 해서 갔는데...... 세상에 주문하고 40분이 넘어서야 식사를 받았다. 아무래도 일어나야 할 것 같아 포장이 되냐고 물어보니 포장도 안된다고 해서 5~6분 만에 급히 먹고 일어났다. 아이는 배가 고파서, 나는 시간에 쫏겨 기분이 썩 좋지 않은 상태로 식사를 마무리해 유감이었다.


주일학교와 어린이 미사를 마치고, 성당에서 중고등부 미사에 온 아이를 만나 배가 고파하는 아이에게 내가 받은 간식인 빵을 먹였다. 주일학교 교사는 내년에도 하고 싶지만 이렇게 애가 제대로 끼니를 못 챙기는 걸 보면 속이 상한다. 분명 시작할 때 가족의 동의를 얻고 한 것이지만 이런 순간마다 '내가 뭐 하러' 하는 생각이 든다. 아이가 짠하고 안쓰러워서.

아이와 남편이 미사를 보는 사이 나는 코스트코 가서 장을 봤다. 장 본 짐을 실을 겸, 골라둔 아이 운동화도 신어볼 겸 남편과 아이가 왔는데 아이만 매장으로 내려왔다. 신발을 신어보던 아이는 어느 순간 기분이 나빠지는 것 같다가 계산 후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주차장에 가서 남편 차를 찾았다. 차가 보이지 않자 결국엔 참던 짜증까지 낸다. 아빠가 주차하고서 내려오지 않고 차에 있는 게 못마땅했나 보다.


장 본 것을 정리하고 나니까 배가 고프다. 토요일은 늘 저녁을 먹지 못하니 늦은 시간 군것질을 한다. 사 온 빵에 남편이 어딘가에서 받아온 밤 잼을 발라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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