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lo Santiago
날이 밝음과 동시에 비가 그쳤다. 밤새 내린 비로 땅이 촉촉하고 날이 서늘해서 조식으로 따끈한 빵과 차를 마시고 길을 출발했다. 오늘은 푸엔테 라 레이나를 떠나 에스떼야로 간다.
푸엔테 라 레이나의 1000년이 넘었다는 여왕의 다리를 지나 본격적인 오늘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각자의 속도가 다르기 때문에 나와 해인이, 성우오빠 그리고 세 자매 이모님들은 다리 위에서 다 함께 사진을 찍고 헤어졌다.
오늘 가는 길은 오르막과 내리막이 가파르진 않았지만 계속해서 반복되는 길이었다. 작은 언덕을 넘으면 또 다른 작은 언덕이 나온다. 언덕과 함께 하늘의 구름도 밝았다 어두워졌다를 반복한다.
한참을 걸으니 내 컨디션과는 전혀 다른 아름다운 유채꽃 길이 펼쳐진다. 끝없는 길 위해 넓게 펼쳐진 유채꽃 사진을 계속해서 찍어 본다.
내가 산티아고 순례길을 시작하고 나서 우리 가족에게 새롭게 생긴 취미가 있는데, 바로 영상통화였다. 꽃을 좋아하는 엄마에게 이 길을 보여주고 싶어 영상통화를 거니, 전화기 너머 있는 엄마와 언니가 혹시 제주도에 있는 것 아니냐며 놀려댄다.
들판을 넘어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알베르게를 함께 운영하는 바에서 한국인 사장님이 나와 반갑게 맞이하여 주신다. 최근 6일간 내가 가장 먹고 싶어 했던 것은 김치찌개도, 제육볶음도 아닌 아이스 아메리카노였는데 나처럼 아이스커피를 찾는 한국인이 많은지 길거리 가판에 "아이스커피"라고 파란색으로 강조하여 적어두셨다. 우리는 샐러드와 또르띠야, 아이스커피를 점심으로 주문해서 먹고, 이제부터 각자의 페이스대로 걷기로 하며 헤어졌다.
일행과 헤어진 후 휴대폰에서 음악을 켜고 혼자 느긋하게 걸었다. 오늘의 컨디션은 최악 그 자체. 어제저녁을 먹고 누웠을 때부터 열이 나기 시작해 약을 먹었지만 도무지 열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마도 비를 맞아서 감기가 더 심해졌나 보다.
혼자서 느긋하게 걷다 보니 아침에만 해도 예뻐 보였던 길이 조금은 지루하고 지겹기 시작한다. 컨디션이 좋지 않으니 당장이라도 배낭을 벗어던지고 싶어졌다.
걸을수록 점점 몸이 더 좋지 않았다. 마음속에 가지고 있던 짜증과 힘듦이 겉으로 표가 날 정도로 밀려온다. 도대체 내가 왜 여기에 있지, 여기서 뭘 하는 거지, 이런다고 뭐가 좋아지나 온갖 부정적인 생각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때마침 걸려온 언니의 전화에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나 집에 가고 싶어
원래 타지에서 아픈 것이 가장 서럽다고, 끝없이 펼쳐진 평원과 도무지 끝나지 않은 오늘의 길이 한 순간에 무너지게 만들었다. 괜찮아지기 위해서 온 건데, 벌써 한국을 떠난 지 7일이나 됐는데 아직도 이러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과 이렇게 계속해서 돈을 벌지 못하고 쓰기만 하는 것이 괜찮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냥 아파서 하루 쉬고 싶었을 뿐인데, 사람 한 명 없는 길 위에 덩그러니 혼자 걸어가다 보니 더구나 열감기에 물갈이로 온몸이 아프다 보니 생각이 가지를 피우고 멀리 가고 있다.
한참을 하소연을 들어주던 언니는 "순례길 권태기"라고 지금의 상태를 표현했다. 퇴직금이 들어오면 기분이 좋아질 거라며 대신 맛있는 것을 좀 먹어보면 어떻겠냐고 한다.
맛있는 것보다, 몸이 너무 아픈데 함부로 기침 소리를 내기도 어려운, 따듯한 물로 제대로 씻지도 못하는 알베르게 생활이 너무 힘들다며 다시 한번 칭얼거려 본다.
사실 함께 걷는 일행들과의 시간이 너무 즐겁고 좋았지만 타인이기에 나의 이런 심리적 불편함을 표출하는 것이 그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줄까 봐 늘 괜찮다며 밝은 얼굴로 웃기만 했기에 오랜만에 언니와의 통화에 참고 참은 것이 터져 나온 것 같았다.
한참을 하소연을 듣던 언니가 안 그래도 예민한데 몸까지 좋지 않으니 오늘은 알베르게 말고 좋은 곳에서 자라며 갑자기 50유로를 보내왔다.
사실 하소연을 좀 하다 보니 이미 기분은 조금 풀렸다. 조금 이성적으로 생각해 현재의 상태에서 탈출할 방법을 고민해 보았는데, 역시 50유로를 써버리기로 다짐했다.
오늘의 목적지인 에스 떼야는 팜플로나만큼은 아니지만 큰 도시 중 하나다. 그만큼 다양한 형태의 숙소들이 있는 도시였다. 오늘은 해인이, 성우오빠와 평소보다 조금 더 많은 숙박비를 모아 아파트를 빌려 하루 묵기로 했다. 따뜻한 물로 충분히 씻고, 편하고 푹신한, 넓은 침대에서 충분히 쉬어서 건강을 되찾는 것이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감사하게도 언니에게 받은 걱정과 격려의 비용 50유로는 오늘 나에게 아주 큰 선물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