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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이디김 Sep 20. 2024

명절은 방울방울

못먹어도고 ♤ 빨뚜노뚜 ♧ 밤톨이 구토 @ 해피의 조퇴 | 스크롤압박

추석을 앞두고 들린 마트에서 퍼즐과 스케치북을 양손 가득 들고 계산대로 향했다. 환한 얼굴의 할머니는 자신의 카트도 가득 차 있는데 계산을 먼저 하라고 양보하셨다. 거꾸로 양보를 해도 부족한 마당에 양보를 받으니 고맙기 그지없다. 이런 순간을 기억하기 위해 기록한다. 그렇게, 행복감이란 일상에서 예기치 못하게 친절을 선물 받을 때 점점 쌓여가는 것이니까.


그 오빠랑 사귀어야 해요. 말아야 해요. 하는 조카 고민상담에 덩달아 20년 전 시간 여행을 다녀왔다. 새내기 조카 덕에 오래간만에 그맘때를 떠올려 본 자매들이다. 사귀어라 말아라 치아라 고마 사귀어라 놀리는 재미가 쏠쏠하다.


친정에서 한가위 이브날 식사가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  프랑스 와인 하나를 구해서 지친 몸인데도 네가 더 힘들어 보여서 라며.. 우리집에 들려준 조카와 언니와 가지는 뒤풀이 겸 수다타임덕에 사는 게 이런 거였어한다. 군인들이 걸그룹 위문 공연 보고 돌아오면 충전이 돼는게 이런 느낌일까? 그렇게 우리가 먹고 마셔서 만들어진 설거지는 짐스럽지도 않고 오히려 흥나게 정리하고 늦은 밤 잠을 청한다.



못먹어도 Go, 흥미진진


가족들이 하나둘 모이기 전에 중3인데 키가 훌쩍 커서 온 170cm 된 조카 하나와 169cm가 된 조카, 울 엄마가 벌인 고스톱은 올 추석 하이라이트.


키만 라이벌이 아니라 고스톱도 라이벌이 된 두 조카.


우리집 공인 타짜 울 아빠와 아라레언니는 자연스레 멘토가 되어 멀찌감치서 훈수를 둔다. '170(실명 대신 170으로 하자), 아, 맨 왼쪽 거를 내야지, 하이고오' 하는 아라레 언니 aka 170 엄마.


멀찍이 앉은 할아버지와 눈 맞춤으로 자문을 구하며 결국 여러 판에서 고득점을 따낸 169 조카. 할아버지의 못 먹어도 고를 따르다가 두 번이나 숨은 고수 할머니에게 진 것은 안 비밀.


왕년에 두 타짜들과 고스톱 치던 울 엄마는 과거는 묻지 마세요 하듯이 손주들과 한데 앉아 새침하게 '물게 없다, 칠게 없다'며 엄살 섞인 멘트를 연발했지만 고도리로 승기를 가져가면서 최다승을 기록했다.


고와 스탑 그 어지러운 혼란 속에서 우리 해피는 기쁨이를 도와 뽀로로퍼즐 맞추고 기쁨이 미디어 노출시간도 모니터 해 주느라 수고가 많았다.



한가위 토크 왕좌, 빨뚜?노뚜!


우리 '우비소년'형부는 밍키언니가 고2 아들의 중간고사와 이사 일정이 이어져서 생애 처음 고향에 오지 못 했다. 왠걸 형부는 한가위 식사자리에서 연이어 히트를 쳤다. 토크 점유율은 높지 않지만 안타를 곧잘 치는편이고 장난기도 많다. 장어를 굽느라 늦게 식사를 시작한 장모님에게 '싫지예'하며 울 아빠는 이미 일어나서 손대지 않는 장어구이 양념을 내밀었다.


참고로 우리 아빠 즉 형부의 장인은 매콤한 양념을 본인 입맛에 맞게 직접 만드신다. 그 양념은 매우 개인화되어 있다. 형부는 매우 순수한 얼굴이었고 노림수도 아니었는데 그게 터짐 포인트, 모두들 빵 터졌다.


엄마는 '왜, 확인받을라 그랬나?' 하고 재치 있게 받아쳤다.


조카는 참이슬 병을 보고 '오, 빨뚜'했다. 올해로 대학교 일학년이니, 알코올을 합법적으로 즐길 수 있음을 만끽하는 나이. '아아, 또 줄임말이구나,' 조카보다 나이가 많은 모든 어른들은 일동 침묵 약 2초, 형부가 그 조카를 보며, '오, 넌 노뚜!'


요건 노린 거였지만 통했다. 푸흐흐 피식 바람 세는 웃음소리가 난다. 노란 머리로 최근에 염색한 조카 머리가 빛이 난다.



명절이 끝나고 난 뒤,

밤톨이 구토 사건


아침에 밤톨이가 뜨거운 계란 스크램블을 입에 넣었다. 반시간이 지난 후 먹은 것을 게워내기 시작했다.


주려고 준 게 아니었다. 우리 딸 해피(어색하지만 애칭을 만들자 하니)를 위한 에그 스크램블을 프라이팬에서 접시로 옮기는 중이었다.


그 밑에서 호시탐탐 엿보다가 기회를 잡았는데 결국 탈이 났다. 네 동생 기쁨이(마찬가지 이제야 애칭을 하나 만드네)가 엄마 밤톨이 토해요라고 소리쳤다. 아이고 토한 걸 또 먹으려고 하네, 후딱 치웠다.


몇 달 전 과산화수소수 사건 때문에 동물병원에서 받아 온 강아지 구토 방지 약이 있어서 얼른 먹였다.


우리 밤톨이는 더 많이 먹여응가로 나오고, 살로 도통 가지를 않는다. 그래서 앙상한 어깨뼈가 걸을 때마다 둠칫둠칫거리는데, 그래도 아기 강아지라 늘 사람 음식 욕심을 낸다. 된통 당했다.


추석 저녁 자리에도 같이 간 밤톨이는 기회만 엿봤지, 친정에 잘 다녀왔는데 되려 집에 와서 탈이 났구나.


이제 좀 부엌에 설 때면 내 발치에 안 오려나. 아침 먹은 거에 엊저녁 먹은 거도 토한 것 같다. 소파에 기대어 뒤로 똬리를 튼 모습이 애처롭다.



그리고 우리 넘편, 내편

고생했어


뜬금없지만, 나 밤톨이가 안쓰러운 만큼 남편을 애처로이 여기지 못했다. 애증 관계다. 가족이란 좀 그래.


올 추석 홀로 본가를 다녀와서 식사자리에 조인했다. 교통정체 최고 절정시간에 가서 온몸으로 격하게 일박을 끝내고 왔다. 안 막히면 세 시간 반 거리였겠지만 대략 두 배 시간을 더 쓰고서.


예쁜 모습 미운 모습 다 보고 다 기억하고 사니까. 트라우마와 애증이 한데 뒤섞인 잡탕 같은 감정에다 타이밍도 엉망이라 진지한 대화가 어려워 갑작스레 건네는 장난스러운 시선마저 어쩔 땐 서로에게 발작버튼이 되고 만다.


그러게 '첫 키스만 50번째'에 나오는 드류 베리모어는 늘 처음 보는 사람이 남편이고 아이면 매일매일 낯설어도 기본 예의는 차릴 것이다. 마음은 더 편할 것이고.


늘 얼굴 보고 살아온 사이는 생략이 많다. 문장 속 필히 들어가야 할 주어도, 서로가 바라는 것도, 서로에게 꼭 전해야 할 말들도. 혼자 다녀온다고 고생했다는 소리가 쓸데없이 길었네.




이것도 끝날 줄 알았지, 해피의 조퇴 


%@%다시 암호 풀기 아니 추리게임(이)가 시작되었다, 하이디김! 기회가 왔다고, 어서 정신을 차리라고 이번엔 좀 더 잘할 수 없겠어?@%@


'엄마, 자습이 잘 안 되어서...'

학년실에 간 해피가 전화를 했다.


무슨 말일까,


'어떻게 하고 싶어?...... 아, 보건실에서 진통제를 받아왔구나, 잘했어. 바로 집에 올래? 그냥 조퇴해도 좋아,...... 학교 시험이 다음 주라서 많이 긴장했나 보다.'


'응, 너무 뒷목이 땡겨.'


'그랬구나. 어떻게 보건실이나 도서실에서 좀 더 쉬어 볼래? 하필 오후 수업이 영어랑 수학, 음악이네, 빠져도 괜찮은 거야?'


'음악은 꼭 샘 보고 싶은데, 모르겠어.'


'그럼... 어떻게 할지 생각해 보고 알려줄래?'


', 알았어. '


그리고 뚝


₩♧해피 마음 읽기에 '실패'하셨습니다.$


다시 걸려 온 해피 전화에 목소리는 담임 선생님이었다.


'어머님, 우리 해피 조퇴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지난번이랑 비슷했어요. 혹시 명절 동안 해피가 많이 힘들었을까요?'


'아니에요, 일부러 멀리 가지도 않은걸요. '


앗하, 내 돌 아니 머릿속에서 뎅 뎅 종이 울린다.


그랬구나. 우리 딸은 아직 자기 상태와 감정에 대한 자각이 안 되는구나.


앞서 경험한 바 있다.


담임은 해피가 평소 하지 않을 것 같은 말을 하러 학년실을 찾아온 시그널을 놓친 것 같았다고  적이 있었다.


그 교훈을 기억한 덕에 지난주에도 샘 추천으로 한 번 조퇴를 했었고 이번에도 그 시그널이 울린 거였다.


시험을 앞두고 자습시간을 가졌는데, 당최 자기에게 집중하지 못한 해피의 상태를 샘이 더 재빠르게 알아챘다.


감사합니다. 당신은 명교사셔요. 올해 꼭 표창장을 제 이름으로 출력하여 드리고 말 거여요. 선 조치 감사드립니다. 나도 곧 출동.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네 감정을 스스로 깨닫게 하려고 이것저것 물어본 시도가 헛되진 않았다고 결론짓는다.


언젠가는 네가 먼저,


아이고 나 또 집중이 안되고 다른 소리에 신경이 흐트러졌구나라고 느끼고,


뒷목이 좀 땡기는 걸?


조퇴 허락 맡으러 엄마에게 전화해야겠다까지,

발전되기를


그날을 고대해 본다.

한가위 맞아 받은 보약. 밥이 보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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