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는 없고, 순간만 잔뜩 있는 선명한 취향들
넌 뭐 좋아해? 라는 단순질문에
1초도 망설임없이 속사포처럼 쏟아내던 딸의 답들을 기록한다
딸(지유)-
"뭘 이라는 글자는 오브젝트를 뜻하는거 같잖아"
"명사"
내 또래 애들이면 보통
"나는 핸드폰 좋아해"
"아빠가 사 준 닌텐도 좋아해"
"게임"하는거 좋아해"
"인형 좋아해"
이렇게 말할거 같은데
나는 오브젝트나 명사가 떠오르진 않고
형용사가 붙은 명사가 떠올라
"적당히 몇년만에 산 핸드폰"이면 기쁠거 같아
그냥 핸드폰이면
누구나 느끼는 기분 좋은거잖아
그걸 행복이라고 말하기엔
너무 과분한 단어같아
게임할 때 행복한 건
그냥 일반적인 거잖아.
게임하면서 슬프고 억울한 사람은 없을거잖아.
내가 말하는 행복은
나만 느낄 수 있는 그런거야
나라면 그냥~~~~
"눈오는날 처음으로 만든 눈사람"
"눈오는날 잘 뭉쳐지는 눈"
바스스 하고
만지면 바로 녹아없어지는 눈들이 있거든?
근데 살짝만 만져도 잘 뭉쳐지는 눈!
그건 눈오고
몇시간 지나야 그렇게 되는데,
나는 그걸 보는것만으로도 좋아~
"길 지나가다
내 머리카락에 앉은 눈 결정도 좋고"
걸을때마다 들리는
뽀득뽀득 소리도 좋고
정말 작은거지만 그냥 기분이 좋아
여름에는 음료수 먹으면서 들리는 메미 소리도 좋고
푹푹 찌는 날에 에어컨 켜는소리..
"띠로롱~"..
하는 바로 그 소리!
그것만큼 기분 좋은 소리가 없어
학원갔다 와서 문을 열었는데
공기가 시원하면 너무 감사해
내가 젤 좋아하는
큰~~~ 수박 짤라서 맛이 있나 없나~~~
두근두근하는데
달달하고 아삭하면 기분 진짜 정~~말 좋아 ~
여름 아니어도 괜찮아
가을에는 그냥
첫학기날 새 교복 입고,
학교갈때 노래 들으면서 나서는 길도 좋고,
엄마한테 "다녀오겠습니다"..도 좋고
"다녀 왔습니다"도 좋아.
엄마가 "어.왔어?" 하는것도 좋아
봄에는 또오~~..
뭐가 있을까아아~~?
엄마가 말한 거처럼
초록색 나무잎이 보이고
바닥에는 개미가 보이고
그냥 봄이구나 느껴질때가 있어
"가디건을 입어도 춥지 않을때"
그때 기분 너무 좋지
나 진짜진짜 많아
"일기 쓸때도 기분 좋아"
"그냥 딱 쓰고나서 잠들면 되는 그 순간!
하루 정리하고 따뜻한 물 한 잔 마시고
"그냥 잘 수 있는 그 순간!"
그것만큼 좋은 거 없어
기분좋은 순간은..
음…
"흰양말 신을때 좋아."
이유는 모르겠는데,
새로 빨래 한 흰 양말..
그때 기분 너무 좋아.
요리할때..
버터나 치즈를 썰었는데,
딱 얇게,
일정한 두께로
예쁘게 썰릴때.
사소한데~ 너무 좋아
아는 사람 플레이리스트에
내가 좋아하던 노래가 있으면 좋아
"친구플레이리스트에
내가 좋아하는 아이유 노래가 나오면
어??? 너도????
이러면서 괜히 기분 좋아져.
새로 산 텀블러에 내가 좋아하는
밀크티를 마실때도 좋고
"처음 목도리를 맨 날도 좋아
그때부터 겨울인거잖아
계절이 바뀐걸
알아챘을때,
그게 좋아"
엄마는 뭐 좋아해?
“뭘 좋아해?”라는 질문 앞에서
늘 버퍼링이 걸린다.
뭉뚱그려 생각하거나
괜히 대단한걸 떠올리려고 한다
행복 자체가 부족했던 게 아니라,
반백살(?) 풍파에
내 감각이
오래 닫혀 있었던것 같다
1초만에 우루루루 쏟아내는
10대 딸의 "좋아함"을 듣고 있자니
결국 행복은
도처에 깔려 있는 순간을,
찰라처럼 지나가는 감각을,
자주 알아차리는 태도인것을..
오늘은
동료와의 재미진 인생과 사주 이야기
몇년만에 만난 후배의 주식이야기
딸래미 걱정하던 엄마의 대입축하 이야기
이야기보따리가 무려 3개나 있었네
들춰보니
온통 행벅행벅행벅쓰~~ ㅎㅎ
[얼마전 딸이 그려준 나를 다시 보니 정말 좋군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