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지의 꿈] 만나야만 하는 사람

은하수

by 하이디 준

안녕 아가야.


전화로도 충분할 세상에 왜 너에게 이런 편지를 줄까 의아하겠지. 하지만 너도 이미 알다시피 엄마는 글을 쓸 때 가장 편안하고 자연스럽단다. 전화로는 너에게 잔소리밖에 더할까. 밥 챙겨먹어라, 감기 조심해라, 나쁜 사람은 피해라. 결국 네가 직접 겪기 전엔 모를 그 모든 일들. 그 누가 뭐라든 너 스스로의 언어로 표현하기 전까진 절대 이해하지 못할 것들. 읽지 않을 걸 알면서도 끝없이 보내는 엄마의 세계 설명서는 너의 방에 얼마나 쌓였을까.


이곳에 돌아와보니 기억나더구나. 끝없는 평원과 하늘 사이에 자유롭게 풀려났던 30년 전의 내 그림자 속에서 나는 너를 본단다. 아직 가녀린 풀처럼 흔들리는, 수많은 별의 흐름 속에 길을 잃은, 어디까지고 자신의 두 발로 맹렬하게 달려보고 싶은 지금의 너를. 그럼에도 내가 너를 온전히 다 안다고 말하지는 않으마. 나는 그저 오래 전 네가 했던 질문에 대한 답을 해주고 싶었을 뿐이란다.


어느 어린 날에 너는 나에게 물었지. 왜 아빠랑 결혼했어요? 그 어디에도 강조점은 없는 그저 무구한 질문에 나는 다만 웃었다. 마치 어른만 이해하는 비밀인 양 너는 재차 캐물었고 나는 글쎄라는 흐릿한 말로 너를 간지럽히기만 했다. 이제야 밝히지만 나도 그때는 몰랐던 게 아닐까? 삶이란 그저 미로이고 어느 길이든 어떤 문으로는 이어져 있지. 그런데 매번 택하는 길에 대한 모든 이유들을 다 기억하는 사람은 없지 않겠니. 그저 그 날은 오른쪽 기분이었을 수도 있고. 어떤 날은 이쪽 길 냄새가 좋았을 수도 있고.


그런데 이 여행에서 일자로 쭉 뻗은 대로들을 달리며 표지판들을 마주치다 보니, 실은 미로 같았던 그 길이 이미 나에게는 표지판을 따라 흘러온 유일한 답이었나 싶더구나. 심지어 엄마에겐 이상한 나침반이 있었단다. 형태도 없고 편의성도 없지만 아주 정확한 나침반. 다행히 나는 그 시절에도 이상한 것들은 기록하는 습관이 있어서 여전히 흔적이 남아있단다.


내가 이곳에 왔던 30년전 그 때, 네 아빠가 남편도 아빠도 아니던 시절에, 나는 묘한 향수병 어린 꿈을 꿨단다. 꿈에서 나는 또 집안에 가득한 불화의 소리를 듣고 있었지. 나는 도망치고 싶었어. 네 아빠를 만나 데이트를 했는데, 마치 처음인 양 나는 네 아빠조차 거부하고 달아났단다. 맨발인 채로 울며 체리 나무가 가득한 고향의 언덕을 쏘다니다가, 어느 순간 다시 집에 갇혀버렸어. 창가에서 나는 내다보았는데, 화창한 봄날 아래에 나는 네 아빠와 어느 어린 아이를 보았단다. 서너 살 밖에 안 된, 봄보다 찬란한 아이였어. 떨어지는 꽃잎을 잡으려는 그 아이의 웃음과 생기는 지나가던 어른들을 모두 매료시켰다. 헌데 그 아이를 바라보고 지나가는 이들의 칭찬을 듣는 네 아빠만은 홀로 가을에 있는 것 같더구나. 내 가슴이 미어지는 미소를 짓고 있었어.


그 순간 깨달았다.

내가 저기 없구나.


시끄럽던 내 부모에게 잡혀 어디론가 끌려가다가, 나는 돌아서서 달렸다. 사라져버릴 것 같은 창밖의 풍경에 내가 뛰어들어야만 할 것 같아서. 내가 무엇을 놓치고 떠나려는지 내 고향은 이미 아는 것만 같아서. 전혀 모르지만, 그럼에도 반드시 만나야만 하는 사람이 있어서.


그리고 닭이 울었단다. 이곳엔 농장도 많으니까.

나는 그렇게 그 꿈을 끄적이곤 모두 잊어버렸다.

미로 속에서 하루 하루치의 생각만으로도 버거웠으니까.


하지만 우습게도 삶은 정말 희한한 미로여서,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나는 한 번 지났던 자리에 돌아와 있구나. 그리고 그 세월이 다 지나고서야 알아차린 거다. 그게 너였다는 걸. 그 작고 환하고 빛나는 내 표지가, 결국 너였다는 걸. 그걸 내 몸이, 내 꿈들이 기억하고 나를 여기까지 이끌었다는 걸.


그러니 아가야. 엄마조차 아직도 모른단다. 삶이 끝없이 세계 설명서를 보내주는데도, 읽을 줄을 몰라. 그래도 다행인 건, 읽지 않아도 그건 어디엔가 남아있어. 그리고 언젠가 네가 가장 필요로 하는 그 날에, 너에게 발견된단다. 그게 그 날의 너를 웃게 만들어준다면, 그걸로 충분해. 지금은 몰라도 좋아. 그저 달려도 좋아.


이걸로 너의 작은 의문이 해결되었으면 좋겠구나. 너조차 잊고 맑게 가라앉아 버린 질문 말이야. 오랜 세월 나 역시 답하지 못했던 작고 동그란 수수께끼를 이제서야 풀었다.


하늘이 청량하고 눈부시구나. 나는 이제 다시 시동을 걸어야 한단다. 하지만 걱정하지도 궁금해하지도 마렴. 그 어떤 길로 가든 결국 내 목적지는 정해져 있으니까.


나는 아마, 너를 만나러 달려가고 있는 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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