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의 꿈] 시나리오

은하수

by 하이디 준

[#1 기억의 웜홀]


INT. 고등학교 / 대학교 / 회사 복도 - 아침


{불이 켜지는 것처럼 화면이 갑자기 밝아진다. 주인공 에아는 병실 침대에 누워 눈을 뜬다. 화면의 각도가 바뀌고 보면 그녀는 누워있는 게 아니라 복도에 서 있다. 그녀의 머리와 등에서 베개와 시트가 바닥으로 떨어져내린다.


그녀는 또 다른 에아다. 에아는 자신이 왜 복도에 서 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복도는 모두 비슷하게 생긴 것 같지만 살짝 다른 고등학교, 대학교, 회사의 복도가 겹치듯 어긋나듯 계속 번갈아가며 보인다. 화면에 오류가 난 것처럼.


끝없는 복도의 소실점에서 어떤 인물이 뛰어오고 있다. 과거 초등학교 시절 친구 이수가 어린 시절 모습 그대로 오고 있다. 아이의 뒤로 붉은 압류딱지들이 흩어진다. 아이가 뛰어오는 동안 에아에게 잡음 같은 과거의 소리들이 들린다. 아이는 가까이 다가올수록 점차 자란다. 에아 앞에 서는 순간엔 에아와 비슷한 나이대의 여자다. 이수는 숨을 몰아쉬지만 환히 웃고 있다.}


SFX: [지지직— 지직…엄마들의 수다]

- 사업이 망해서 야반도주하다시피 외국으로 갔대.

- 친구가 많으면 뭐해, 다 걔 엄마가 붙여준 거잖아.

- 둘째라 불쌍해. 그 집 부모가 첫째밖에 모른다며.


에아

(미간을 찌푸리며)

이수?


이수

(활짝 웃으며)

에아! 오랜만이야!

V.O. (희미하게 겹쳐서 들린다. 어린 이수의 목소리. 울먹이듯.)

나한텐 에아뿐이야. 알지?


에아

(난처한 웃음)

네가 여긴 어떻게?


이수

널 잠깐 보러 왔지. 넌 그대로네.

V.O. (어린 이수. 골이 난듯.)

언니 같은 건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에아

(창밖을 보며)

그럴 리가.


이수

아니야, 맞아. 내 눈은 정확해.

V.O. (어린 이수. 쓸쓸하게.)

엄마 아빤 항상 집에 없어.


에아

그렇게 보인다면 다행이지.


SFX: [지지직— 지직…]


V.O. (에아 엄마의 음성, 공격적이고 신경질적)

과거의 인간이야. 과거의 인간은 죽은 채로 있어야 해. 저런 건 알아서 피해. 옛날에 얼마나 귀찮았는지 벌써 까먹었어?


{에아는 틱 장애처럼 고개를 살짝 털어낸다. 귓가에 벌레라도 있는 듯한 몸짓.}


이수

(손을 잡고 싶어하며)

괜찮아. 넌 앞으로도 그대로일 거야.

V.O. (메아리치듯 따라붙는 어른 이수의 목소리. 다정히 속삭이듯.)

다 지나갔어.


에아

(자연스럽게 몸을 틀며 웃음)

얼마 전엔 다른 친구랑 여행도 다녀왔는걸. 이제 어린애도 아니야.


이수

(장난스럽게)

뭐야~ 나 말고 다른 친구랑? 다음엔 꼭 나랑 가자!

V.O. (어른 이수. 부드럽고 잔잔하게.)

이제 아프지 않아.


에아

(의아한 얼굴로 웃음)

응, 그럴게.


이수

(돌아서며)

나, 이제 가봐야 해.

V.O. (어른 이수.)

이제 외롭지 않아.


에아

(조금 아쉽지만 밝게)

응. 반가웠어. 너 이제 잘 웃네.


{이수의 얼굴에도 오류가 나기 시작한다. 이수의 얼굴에 에아 자신의 얼굴이 계속 겹친다. 에아는 틱 반응을 보이지만 오류는 사라지지 않는다.}


이수

(웃으며)

맞아. 그러니까 너도 괜찮아. 다음엔 우리 집에 놀러와. 내가 어묵탕 만들어줄게.

V.O. (어른 이수.)

내일에서 만나.


에아

(놀란 눈, 애매한 웃음)

그래.


{이수가 달려 멀어지고, 에아는 한참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돌아선다. 지직거리던 오류가 그치고 대신 걸어가는 에아의 뒤쪽으로 복도가 살아있는 시간의 통로처럼 빛의 숨을 쉬며 자글거리는 주름이 팽창하고 수축한다.


에아가 걸어가는 동안 뒤쪽 배경으로 다른 소품들과 사람들이 시간의 폭풍에 휩쓸려 날아오듯 자리잡는다. 교실 / 회의실이 완성되고 에아가 발표 자리에 올라 뒤를 돌면 칠판 / 프로젝터 앞에 사람들을 마주하고 선 에아가 보인다.}



[#2 위선의 접신]


INT. 고등학교 / 대학교 교실 / 회사 프레젠테이션실 - 낮


{오류는 여전히 진행 중. 화면이 겹치고 흔들리며, 사람들의 얼굴은 그대로지만 교복과 평상복이 번갈아가며 뒤섞인다. 소리 역시 먹먹했다가 현장감 있게 커지기를 반복한다.


에아는 혼자 교실 / 회의실 앞에 서 있다. 손에는 종이를 들고 있다. 종이 위의 글자들이 계속 겹쳐지며 움직이고 있어 읽기 불가능하다. 에아는 집중하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 헛기침을 한다.


소용없다. 여전히 시끄럽다.}


에아

(떨림이 있지만 소리치듯)

저희 아버지는 대학 병원 의사입니다. 현재 평천하 병원의 외과의로 근무하고 계시며…


SFX: [지지직—]


V.O. (엄마의 목소리, 신경질적이고 격한)

병을 고쳐? 병을 만드는 놈이 무슨 병을 고쳐. 사람 병신 만드는 게 일인데.


{에아는 머리를 틱처럼 털어내고 경련처럼 몸을 아주 살짝 움직인다. 사람들이 모두 무표정한 얼굴로 에아를 정면으로 쳐다본다. 이번엔 모두 의사 가운이나 간호사 복장을 하고 있다. 에아는 애써 침을 삼키고 발표를 계속 이어가려 한다. 종이에는 여전히 글자가 보이지 않지만 그녀는 눈을 떼지 않는다. 손이 떨린다.}


에아

(종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자상하고 꼼꼼한 보살핌으로 환자들을 항상 대하시고…


SFX: [지지지직– 현실적인 음성, 낮고 수군거리는 병원 관계자들]

- 원장님 사모님이 입원하셨다던데. 무슨 일이에요?

- 넘어지셨다고 하던데… 정확한 상황은 설명을 못 하시던데요.


{틱 장애 반복. 에아는 어깨를 살짝 으쓱하고 다시 손을 모은다. 종이는 어느새 입원동의서로 바뀌어 있다. 보호자란에 있는 아버지의 서명은 휘갈겨져 있어 알아볼 수 없다. 에아는 종이를 정면으로 들고 있다가, 그 서명란만 주욱 찢어낸다. 사람들이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노려본다.}


에아

(허공을 응시하며, 인형처럼)

동료와 선후배에게 항상 존경받는 인물로서…


V.O. (엄마의 목소리, 더 격하게 터지는 외침.)

백날 상장 받으면 인간이 바뀌나! 간호사랑 붙어먹고 골프나 치러가는 새끼한테 뭘 잘했다고 내가 굽신거려!


{에아는 몸을 가볍게 부르르 떨며 경련을 일으키듯 반응한다. 순간적으로 신들린 듯한 상태가 된다. 사람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박수를 치지만,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완전한 무음. 에아는 간신히 몸을 돌려 발표 자리를 내려온다. 그녀의 등 뒤, 칠판 / 프로젝터에는 여러 사람들이 휘갈겨 쓴 듯 다양한 글씨체로 반복된 낙서가 보인다: “거짓말쟁이”}


V.O. (엄마의 목소리. 더욱 귓가에 가까워진 쇳소리.)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입 밖으로 내는 순간 니 인생 끝이야. 누가 이런 집 애랑 붙어있고 싶어해? 속 시끄러워서…



[#3 각성의 다리]


INT. 다리 위를 지나는 지하철 - 해질녘


{에아가 교실 / 회의실을 나서며 문을 열고 나오면 이쪽 벽은 지하철 통로 문으로 바뀐다. 에아의 뒤로 문 틈새로는 교실 / 회의실 풍경이 잠깐 비쳤다가 불이 탁하고 나가버리듯 꺼지고 문이 닫힌다. 이어지던 엄마의 목소리도 문이 닫힘과 동시에 끊어진다. 서정적인 음악 시작. 지하철은 한없이 긴 다리 위를 지나가고 있고 창밖으론 하늘 위인 것처럼 구름이 깔려있다. 도시의 건물들이 구름 속에 묻혀있다.


에아는 바닥만 보며 걸어간다. 서있는 사람은 없고 앉은 사람들은 모두 유리로 조각된 인형처럼 보인다. 모두 갖가지 빛을 반사하고 반짝거리며 조용하고 움직임이 없다. 누구의 시선도 에아에게 있지는 않다. 에아에게는 사람들에게서 반사된 색색의 빛이 아른거린다. 에아는 끝없이 걷지만 지하철 한 칸은 끝나지 않고 에아는 마치 트레드밀 위를 걷고 있는 것 같다.


마침내 그녀가 멈춰서고 고개를 들자, 순간 둔중한 폭발음과 파괴음들이 음악 아래로 진동처럼 깔린다. 지하철 밖, 구름 너머로 보이는 도시가 폭발하고 불타오르기 시작한다. 창문 밖이 화염과 연기로 순식간에 뒤덮이고 폭발이 가까워지는가 싶더니 에아가 뒤돌아 서자 지하철의 모든 창문이 깨지며 슬로우모션이 시작된다. 유리조각 사람들은 모두 사방으로 터지며 파편화된다. 조각들이 모두 불을 반사해 보석이 흩뿌려지듯 아름답다. 음악의 클라이막스. 슬로우모션이 끝나고 지하철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를 낸다. 음악이 끊어진다.


지하철이 에아가 선 자리에서 두 동강 나며 뒤는 떨어져나가고 앞쪽 반칸은 비틀린다. 비틀린 채 철로를 미끄러져 가던 앞쪽 칸이 다리 위에 위태롭게 선다. 뚫린 쪽이 서서히 아래로 기울고 에아는 그대로 쓰러지며 가장자리까지 휩쓸려가 간신히 매달린다. 파편들도 쏟아져 내리는 가운데 누군가 여유롭게 기울어진 지하철 안을 걸어온다. 만화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각진 남자다. 폼을 잡으며 서더니 에아에게 두 손가락으로 눈썹에서 경례를 날린다.}


???

안녕. 난 탐정이라고 해. 코난이지.

(마지막은 손가락 총으로 에아를 가리킨다.)


{에아는 별다른 반응 없이 그저 뚫어져라 그를 바라보기만 한다. 그가 뚜벅뚜벅 더 가까이 걸어와 몸을 숙이고 손을 내민다.}


???

손을 잡아. 그러면 답을 알려줄게.


{에아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지기 시작하더니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린다. 남자는 당황해서 쳐다보다 자신의 손을 들여다보다 어쩔 줄 몰라한다. 에아의 얼굴 클로즈업. 카메라맨의 멱살을 잡는 듯 에아가 더 가까이 들이댄다. 눈에는 눈물이 흐르지만 입은 비웃고 있다.}


에아

(화면을 정면으로 노려보며 강렬하게 외치듯.)

일어나 멍청아. 이건 꿈이야.


{에아는 그 말과 동시에 잡았던 손들을 모두 밀치듯 놓고 뒤로 다이빙하듯 허공으로 떨어져간다. 멀어져가는 얼굴이 잠든듯 평화롭다.}


FADE TO WH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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