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도의 꿈] - 역류

은하수

by 하이디 준

Marie. Lucy. Sarah. Julie.

마리. 루시. 사라. 줄리.


여신들의 이름이라기엔 아주 소박한 단어들.

하지만 때론 누군가의 곁에 있기 위해선, 그런 소박함이 필요했다. 신에게조차.

예쁘장한 소녀의 모습을 한 그들은 그저 말없이 그녀를 들여다보곤 했다.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오로지 그 변함없는 굳건한 시선만이, 그녀에게선 소박함의 껍질을 하나하나 벗겨냈다.

그것은 곧, 함께 날아오르자고, 부드럽게 내민 손과도 같았다.


바닷가의 낡고 무너져가는 집의 계단 한 켠에 걸터앉아 에아는 떠올린다. 모래알처럼 맴도는 기억들. 그녀는 그 기억들을 분리해보려는 듯 손으로 바다의 모래를 헤집어 본다. 달빛을 받은 모래는 차가운 얼음 알갱이들 같다. 가볍게 쥔 손에서 모래가 작은 폭포처럼 흘러내리며, 그녀는 한숨 같은 깊은 숨을 내쉬었다. 새하얀 숨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시간의 축이 잠시 삐그덕거리며 멈췄다가, 무겁게 비틀며 조금씩 거꾸로 돌아간다. 마치, 알알이 흩어지는 모래의 가루가 반짝거리며 다시 손 안으로 빨려들어올 것만 같다. 바닷바람이 들자 집은 이음매마다 쑤시는 것처럼 꺽꺽 외마디소리를 질렀다. 철썩이며 뒤채는 바다의 잠꼬대가 귓가에 흘러들어 에아는 옷깃을 여미고 살며시 눈을 감았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왁자지껄했다. 누군가 낙엽 더미를 잔뜩 쥐고는 사방으로 던져버렸다. 아예 그 위를 강아지처럼 뒹구는 아이도 있었다. 정원에서 숨바꼭질이라도 하려는지 곧 아이들은 깔깔거리며 도망가거나 숨기 바빴다. 그녀의 허리께에 올 키들로, 잽싸고 가느다란 팔다리를 놀리며 어디든 비집고 들어갔다. 공간의 빈틈이 아니라 차원의 틈새로 숨어들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아이들만 갈 수 있는 아주 작은 시공간의 균열들로 잠시 사라졌다가 돌아오는 것처럼.


에아는 덩달아 즐겁고 들떴지만, 딱히 아이들에게 말을 걸거나 다가가진 않았다. 그녀는 새파랗게 시린 하늘로 얼굴을 향해 햇살이 그녀를 어루만지도록 두었다.


어느 순간 열 댓명의 아이들이 모두 꼭꼭 숨어버렸다. 온 세계가 조용해진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홀로 남아있었고, 모두가 나무의 귀퉁이나 수풀의 뒤쪽이 아니라, 아주 멀리 떠나버린 것만 같았다. 아이들의 숨죽인 호흡이나 미처 막지 못한 키득거림은 메아리처럼 들렸다. 발 아래에서 바스락대며 마른 잎들이 부서져갔다. 그녀는 잔잔한 파도처럼 밀려왔다 흩어지는 그 소리들에 감싸여 함께 부스러져버릴 것만 같은 자신의 무거운 심장을 애써 추스렸다.


정원을 적시는 마지막 햇볕은 따뜻하고 감미로웠다. 에아는 그 따스함을 등지고 집 안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현관 계단참에 자신을 밀어 올리는 한 발을 올려놓고 자신을 잡아채는 한 손으로는 난간을 붙든 채 잠시 가만히 서 있었다. 여전하다. 이도 저도 아닌 존재. 어디로도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 언제고, 그저 사이에 껴 있는 어정쩡한 무엇. 하지만 굳이 따지자면 그녀의 다리 힘이 더 세다. 에아는 난간을 손톱으로 긁어버릴 것처럼 매달리는 손을 억지로 떼어내고 집 안으로 들어간다.


“미에?”


희고 두툼하고 긴 머리를 단정히 묶은 여인이 현관을 돌아보며 묻듯이 고개를 살짝 뺀다. 수수한 옷감, 세월에 살짝 짓눌린 눈가, 하지만 여전히 꼿꼿한 허리와 희고 긴 팔. 처녀보다 더 가느다랗고 우아한 다리로 사뿐사뿐 걸어온 여인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린다. 여인의 시선이 에아를 미끄러지듯 스쳐간다. 에아의 형상이 마치 투명하고 굴곡진 유리인 것처럼. 눈빛이 탁하다.


“아, 미안해요. 어서 와요. 내가 요즘 좀 정신이 그래. 들어와서 앉아. 뭐 마실 거라도?”


여인이 곧장 부엌의 선반으로 향한다. 에아는 딱히 거절도 제안도 하지 않는다. 그저 가만히 소파 옆의 다른 의자에 오도카니 앉아본다. 집안엔 익숙한 냄새가 흐른다. 풀내, 타는 내, 끈적하게 눌러 붙은 내, 그것을 모두 가만가만히 덮는 부드러운 여인의 향내까지.


여인은 손님용인듯 가볍고 넓게 퍼진 노란 빛의 찻잔에 말갛게 갠 미지근한 찻물을 또르르 따르곤 치마 소리도 내지않고 다가와 살짝 에아 앞에 올려두었다. 찻잔은 여전히 예뻤지만 역시 시간의 마모를 피하지는 못했다. 군데군데 칠이 벗겨지고 가느다란 실금이 있다.


“신경 쓰지 말고 편히 있어요. 안에 할배도 있는데 아마 곧 내려오지 싶어.”


여인은 원래 앉아있던 소파의 자리로 돌아가며 홀로 중얼거렸다. 옆의 작은 탁자에 놔두었던 자그마한 안경을 다시 올려쓰고 소파 한 켠에 쌓아둔 신문 더미에서 하나를 집어든다. 에아는 그저 물끄러미 그 모습을 바라본다. 조금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누군가 계단을 쿵쿵 내려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역시 새하얀 머리가 온통 날리듯 더벅머리인 남자가 내려왔다. 이쪽은 세월의 풍랑이 더 거셌거나 그걸 정면으로 마주한 것처럼 얼굴의 선들이 조금 더 깊게 패여있었다. 살짝 휜 코를 습관처럼 킁킁거리며 내려온 그는 언제나 탐탁치 않은 가늘게 뜬 눈으로 현관을 한 번 슬쩍 확인하고 툴툴거리듯 말한다.


“뭐야, 뭐가 왔나?”


“응, 여기. 잠깐 들렸나봐요.”


신문에서 고개를 돌리지도 않은 채 여인은 웅얼댔다. 그리곤 탁자 위 접시에 놓여있던 견과류들에서 아몬드를 하나 집어 입을 조그맣게 벌리고 쏙 넣었다.


남자는 부엌의 아일랜드 탁자로 다가가 주름지고 거친 손으로 커다란 머그잔을 놓고 여지껏 김을 피우며 쿰쿰하고 씁쓸하고 이상한 냄새를 풍기던 주전자에서 걸쭉한 액체를 따라 가득 담았다. 그는 그걸 단숨에 꿀꺽꿀꺽 마시더니 묘하게 다시 현관을 노려봤다. 아주 순간적으로 에아에게 시선이 머문 것 같았지만 피하듯 쓱 돌아간다. 입안이 쓴 표정이다. 시선을 떨구고 빈 컵 안을 들여다보며 다시 지나가듯 말한다.


“미에라고 하잖았어?”


여인은 곧바로 반응하진 않았다. 대략 서너 호흡이 지나고 나서야 문득 생각난 것처럼 신문을 힘없이 내리고, 남자도 에아도 아닌 그저 먼 허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참 이상하지. 어제 꿈을 꿔서 그랬나봐. 아니, 자다가 갑자기 깬 것 같은데, 침대 옆에 미에가 방에서 자다 나온 것처럼 서있지 뭐야. 그냥 우릴 내려다보면서. 왜 그래, 어디 아파? 하고 묻고 나도 일어나려는데, 그게 꿈이더라고. 정말 이상하지. 걔가 집에 있을 때도 그런 일은 없었는데.”


“그 뭐 맨날 허접쓰레기 같은 꿈 얘기만 몇 번째인지. 하여간 병원에 가봐야 한다고 내가 그러는데 들어먹질 않어. 몸은 거죽만 붙었으면서 고집만 내내 천년 묵은 나무처럼 굵어졌어 아주.”


남자는 딱히 에아에게 말하는 것 같지 않으면서도 힐끗힐끗 그녀를 보며 하소연을 털고는 컵을 들고 남은 한 방울도 마저 입 안으로 떨어냈다. 에아는 그저 늘상 보는 낡고 다정한 그림처럼 그들을 번갈아 보며 얌전히 듣기만 했다. 여인은 그제사 남자를 흘겨보며 입을 삐죽댔다.


“고집은 무슨. 사돈 남말도 유분수지. 내가 그 냄새나는 것 좀 그만 마시라니까. 온 집안에 다 배는 걸 갖다가 정말 지독해서 원. 자기는 뭐 그걸로 천년만년 살줄 아나. 간만 녹아난다고 매번 얘기하는데.”


남자는 여인의 말조차 귓가에서 털어내는 것처럼 머리를 흔들더니 부엌에서 걸어나와 벽 한 켠에 걸린 작업 장갑과 모자를 들고 수건을 하나 목에 걸치고는 현관에 앉아 낑낑대며 장화를 신었다. 에아가 일어나 배웅하려 하자 남자는 손을 들어 됐다는 듯이 막고는 뒤통수로 말하듯 먹먹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거, 그럼, 놀다가요.”


에아는 문득 그를 쫓아 함께 정원으로 도로 나가고 싶었다. 그녀의 무겁던 심장이 이번엔 위로 튀어나가 쫓으려는 듯 목구멍을 조여왔지만 가까스로 주저앉혔다.


그녀가 다시 돌아앉아 여인을 마주했을 땐 이미 태엽 인형처럼 여인은 다시 신문을 들고 있었다. 에아는 어쩐지 흘려넣는 찻물이 모두 엷은 막 같은 그녀의 존재 사이사이로 새어버릴 것 같단 생각을 하며 찻잔을 조금씩 비워갔다.


한참을 마시고, 한참을 읽었다. 신문의 페이지는 끝나지 않을 것처럼 차륵차륵 넘기는 소리를 내다가 결국 다시 차곡차곡 접혀 한쪽에 내려졌다. 에아의 빈 찻잔도 내려졌다. 여인이 안경을 벗고 다시 그 때서야 그녀를 발견한 것처럼 희미한 미소를 띠고 말했다.


“아, 오늘도 미에는 안 오려는 모양인데. 그래도 기다릴래요?”


에아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결국 그녀의 심장이 좁디좁은 목구멍을 통과하려다 움켜쥔 토마토처럼 터져버리고 말았다. 다만 그건 밖으론 새어나오지 않고 그저 안으로 안으로 흘러 그녀의 온 몸을 적셨다. 머리로도 번진 그 심장의 즙은 집의 새하얀 벽지에 휘갈기듯 새겨넣고 있었다.


‘기다리는 건 당신이잖아. 코 앞에 왔는데도 못 알아보는 것도 당신들이고. 아니, 알아보고 싶지 않은 것 뿐이잖아. 미에는 당신들 딸이지만, 에아는 아니라서.


근데 그거 알아? 나도 알아. 미에는 에아가 아니야. 에아도 미에가 아니야. 하지만 그래도 말이야, 이제 미에는 에아가 돼버린거야. 한 번쯤은 그걸 알아봐줄 줄 알았어. 당신들만의 딸이 아니더라도 내 눈을 마주하고 내 이름을 불러줄 줄 알았어.


아니, 실은, 그런 일은 없을 거란 걸 잘 알면서도, 그냥 기대했어. 당신들이 매일, 이렇게 돌아오지 않을 미에를 기다리는 것처럼.’


에아는 그저 아련한 미소로 얼굴을 덮으며 고개를 저었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인은 따라나오지 않고 저녁 준비를 하려는 듯 부엌으로 가며 가볍게 말했다.


“그럼 다음에 또 놀러와요.”


에아는 등 뒤를 서늘하게 감싸는 베일처럼 그 말을 걸치고 문 밖으로 나갔다. 문을 닫고 기대어 그대로 스르륵 주저앉았다. 하지만 모든 것이 흐릿했다. 집도, 정원도, 모두 흐물흐물 녹아내리듯 사라져 가는 듯 했다. 에아는 무릎을 감싸고 앉아 두 눈을 꼭 감고 남은 심장의 즙을 짜버리며 작게 우스갯소리처럼 중얼거리고 미소지었다.


“알아. 이 집도 있었던 적은 없지.”







에아는 파르르 떨며 다시 눈을 떴다. 외투도 두건도 두툼하지만 그럼에도 바닷가의 추위가 매섭다. 아직 밤은 한창이었고, 불을 피우는 편이 좋을지도 모른다. 에아는 깊고 하얀 숨을 내뱉으며 일어나 부서지고 남은 폐허 같은 집 안으로 가본다.


가재 도구나 가구들이 어지러이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다. 그마저도 몇 안되지만. 아마도 난로였을 법한 곳엔 잡동사니 쓰레기가 그득했다. 다행히 그 옆에 쓰고 남은 듯한 장작이 비스듬히 쌓여있다. 벗어 넣어두었던 장갑을 끼고 살짝 젖어 눅눅하고 썩은 듯한 위쪽 것들을 치우자 그나마 마른 것들이 좀 나왔다.


에아는 잡동사니 중에서도 잘 탈 법한 천 조각이나 찢어진 책 같은 것을 골라내 함께 들고나와 모래사장 위에 내려놓았다. 그나마 바람을 피할 구석은 남은 집이라 해도, 그녀는 안에 있고 싶지 않았다. 세월에 바랜 케케묵은 먼지와 곰팡이와 짠내를 맡느니, 모닥불을 동무 삼아 언제까지고 해변에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지켜보고 싶었다.


에아는 적당히 구덩이를 파고, 땔감을 쑤석거리며 쌓은 뒤, 품에서 부싯돌을 꺼내 작게 불을 붙이고 입을 오므린 채 후하고 입김을 불어넣었다. 언젠가 자상한 누군가에게 배운 그대로.


작게 기지개를 켜며 깨어나는 불씨가 자못 사랑스럽다. 그녀의 숨결을 양껏 먹으며 불은 금세 몸집을 키운다. 머리 위의 장작을 들어올리고 싶은 듯 들썩거린다. 발갛게 단 손길을 여기저기 대본다. 저항하지 못하는 종잇조각들이 그대로 사로잡혀 안긴 채 한 몸이 되어버린다. 피어오르는 불티들이 따끔하도록 사무친다.


에아는 눈을 감고, 모닥불의 열기가 몸을 데우며 그녀의 눈두덩 안쪽까지 환하게 스며드는 걸 느낀다.







그의 눈썹은 가지런하고 짙었다. 새근새근 잠든 양은 그저 소년 같았지만 에아는 그의 얼굴 선을 손가락으로 조심스레 따라 그리며 그가 될 청년과, 아버지와, 노인의 얼굴까지 겹쳐보았다. 그것을 지우듯이 그녀는 그의 눈썹을 지그시 쓸고, 쓸고, 또 부드럽게 쓸어 내렸다. 영원히 간직하고 싶은 얼굴이었다.


순수한 열정으로 그녀를 안는 품보다, 다정한 어투로 그녀를 반기는 목소리보다, 오로지 곤히 잠든 그의 얼굴만을 이토록 한없이 바라고 또 바란다는 것을 그가 알면 뭐라고 할까. 여전히 두려움에 떨고 있다고 생각할까. 그녀 자신이, 사라져버릴 것만 같은 두려움에.


“나는 공주도 아니고 마녀라고! 저주 받을 마녀!”


“응. 근데 나도 왕자 같은 건 아니거든. 그럼 된 거 아닌가.”


땀에 젖어 헝클어진 머리를 한 채 미친 것처럼 소리치는 에아를 향해 소년은 아무렇지 않은 듯 살짝 눈을 굴리며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울창한 숲 속에서 산새들이 간간히 맞장구를 치듯 우짖었다. 겁을 주어 쫓아버리려던 대상이 되려 그렇게 나오자 그녀가 질려버렸다. 그녀는 주춤주춤 비틀거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짙고 습한 녹음이 다리에 엉겨붙는듯 했다. 울먹이는 듯한 스스로의 목소리가 그렇게 듣기 싫을 수 없었다.


“나는.. 나는 가까이 오는 모든 사람들을.. 태워버린다고 했어..”


소년은 고개를 한쪽으로 갸웃했다가 명쾌해진듯 활짝 웃고는 품에서 부싯돌 하나를 꺼내 공중으로 휙 던졌다 받더니 답했다.


“잘됐네. 난 남들보다 불 다루는 거 하나는 자신있거든. 걱정마. 난 그을리지조차 않을 테니까.”


그것이 소년의 자신감에 홀린 그녀의 선택이었는지, 혹은 언제나처럼 매혹적인 불길에 홀린 그저 한 인간의 선택이었는지 지금도 에아는 알 수 없었다. 심지어 그것이 여신들이 그녀를 위해 마련한 작은 피난처이자 선물인지, 혹은 잔혹하고 비정한 농간인지조차 구분하기 어려웠다.


그는 그 모든 것이었으니까. 그가 그녀를 송두리째 흔들 수 있다는 사실만이, 가장 찬란하고 끔찍한 진실이었다. 그로 인해 간신히 숨이 쉬어지는 날이 있는 반면, 그로 인해 호흡이 막혀 그대로 산산이 부서지고만 싶은 날들도 있었다. 그저 전부, 그녀 자신의 탓이었다. 일렁이는 자신의 불길이 만들어낸 온갖 그림자들에 제풀에 놀라거나 시달리는 것 뿐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한사코 에아의 곁에 붙어 그녀를 지탱해주려 애썼지만, 차마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는 데이지 않고 그녀를 감쌀 수는 있었지만, 세차게 타오르는 불빛 안쪽의 어둠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은 없었다. 어쩌면 찌르는 듯한 빛을 넘어 그 어둠을 마주할 눈을 가진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에아는 알고 있었다. 그 어둠이 아니고선, 그녀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그 암흑을 마주하지 못하면, 결국 누군가 보는 건 그녀가 아니라 그녀의 껍데기뿐이라는 것을.


“다치지 마.”


“피를 보는 건 무섭지 않아.”


“... 그런 뜻이 아니잖아.”


소년은 에아의 팔 위로 진득하게 흐르는 핏줄기를 보드라운 천으로 세심히 닦아내고 붕대를 천천히, 꼼꼼히 감았다. 새하얀 붕대 위로 진홍색 핏빛이 불꽃처럼 번졌다. 그녀는 통증을 느꼈지만 그대로 신음조차 삼켰다. 그리곤 고개를 살짝 더 치켜들고 일부러 입매를 단단히 조였다.


“나는 날 지킬 수 있어. 여신님들이 지켜보시니까. 네가 날 돌보지 않아도 돼.”


“네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하는 거라면, 나는 얼마든지 대신해줄 수 있어. 난 네 피를 보는 게, 무서워.”


여전히 붕대를 가볍게 어루만지며 침울한 눈으로 말하는 그를 보며, 에아는 안에서 자신의 어둠이 슬쩍, 어긋나는 걸 느꼈다. 그럼 그가 다치는 건 괜찮고? 그녀가 부서지는 그를 보는 건 아무렇지도 않고? 분명 말했는데, 그녀는 공주가 아니라 마녀라고. 그런데 왜, 왜 자꾸 그는 그녀를 그의 품 안으로 숨기고, 숨기기만 하려는 걸까? 세차게 솟아오르는 새카만 어둠의 덩어리를, 에아는 간신히 다시 삼켰다.


“마리, 루시, 사라, 줄리.”


에아가 입가로 나직히 속삭이는 그 이름의 주인들은 이미 모조리, 알고 있었다. 그네들은 당연한 것처럼, 자비를 베푸는 것처럼 손을 내밀었다. 마침내 에아는 그 손들 위에 무엇을 올려야 할지 깨달았고, 끓어오르는 것 같은 눈물이 흐르는 와중에도 일그러진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거스를 수 있다고 생각했던, 혹은 예외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자신이, 또는 그가, 너무 한심하고 애처롭고 우스꽝스럽도록 가여워져서.


그것은 도저히 말이 되어 나오지도 않아서, 에아는 그저 계속 잠든 그의 눈썹만을 쓸고, 또 쓰는 것이었다. 그것이 그녀의 소원을 이루어줄 여신들의 예지와도 같았다. 영원히 잠든 그의 얼굴.


창가로 넘칠 듯 흘러드는 보름달빛이 차갑게 식은 제단을 비추고, 잿빛의 베일을 미망인처럼 드리운 에아는 두 손에 머리를 들고 걸어간다. 밤공기는 달큰한 초의 향 같아서 그녀를 에워싸고 바라보는 그림자들도 들썩거리며 달뜨는 느낌이다. 무거운 발걸음이 제단에 닿자 기대에 찬 웅성거림은 후끈한 열기가 되어 정신을 아득히 흐려놓는다.


촉촉해진 얼굴에 끈적히 달라붙을 것 같은 베일을 걷어올리고 에아는 두 손으로 든 머리를 조심스럽게 들어올린다. 마지막으로 놓기 전, 그녀는 베였다기 보다 그저 원래부터 그런 모양의 조각상인것만 같은 머리를 들여다본다. 평온하게, 그저 잠들어 있는 것 같은 그의 얼굴. 에아는 그보다 더 부드러울 수 없을만큼 살포시 그의 입술 위에 입맞춤을 남긴다.


마침내 여신들의 손 위에 그의 머리가 올려진 순간, 자동인형처럼 스르르 그의 두 눈이 떠진다. 속삭임들이 멎는다. 에아는 물끄러미 그 눈을 들여다보다가 더운 숨을 흐느끼듯 천천히 토하며 손바닥으로 그의 눈꺼풀을 쓸어내린다.


감겨지지 않는다.


에아가 손을 떼자 다시 그저 그녀를 보고 싶은 것처럼 그의 눈은 차분하게 떠진다.


원망하지 않는다.

비난하지 않는다.


여전히 그의 눈은 못내 자상할 뿐이다. 그녀가 그 순간에 멈춰 놓았으니까. 한 번 더 에아는 애써 울음 대신 미소를 머금으며 그의 눈꺼풀을 쓸어내린다. 소용없다. 이제는 다만 그녀에게 조용히 묻고 있다.


‘왜?’


너무 늦은 질문이다.

여전히 그녀를 이해하고 싶어하는 자의 갈망.

하지만 또한, 여전히 그녀를 이해하지 못한 자의 절망.


에아는 그 모든 것들을 결국 새하얀 천 하나로 덮어버린다. 그의 머리 위로 사뿐히 내려앉는 마지막 망각의 축복. 이것이 그녀가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선물이었다. 연인으로서가 아닌, 불을 꺼트리고 싶지도, 누군가를 태우고 싶지도 않은 마녀로서의 선물.


잿빛의 베일이 안개처럼 드리운다.


이것이 그의 예정된 미래이든, 그녀가 지난밤 흘려보낸 꿈결이든, 아무래도 좋았다.


존재해서는 안 되는 세계였다.


에아는 그의 눈썹을 매만지던 손을 거두고, 아직 선명히 맥동하는 따스한 그의 목덜미에 마지막으로 얼굴을 파묻었다.


“내가 널 망가뜨리도록 두지 않아.”


가느다란 그녀의 속삭임이 그의 고른 숨결을 타고 그의 몸 곳곳에 파고들었다.


“잘 자. 너에게 아침을 남길게.”







에아는 모닥불의 아득한 따스함에서 고개를 돌리고 다시 바다의 선득하고 신선한 어둠을 향해 눈을 떴다. 몸은 노곤했지만 머리는 다시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일부러 길고 조그맣게 입김을 불어 새하얀 숨결이 멀리까지 이어져나가는 걸 지켜보았다.


달은 고즈넉히 더 뒤로 누웠고, 모래사장은 아직 반짝이는 꿈을 꾸며 파도의 이불을 조금 멀리 차놓았다. 어쩐지 슬며시 자리를 내어주며 와보라는 듯한 바다의 몸짓에 에아는 몸을 탁탁 털며 일어나 조금 더 가깝게 다가갔다. 이불이 살짝 걷힌 자리엔 모래사장이 낮에 열심히 모아둔 작은 보물들이 여기저기 콕콕 박힌 채 숨어있었다.


에아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희미하게 빛나는 조각들을 손으로 집어 올렸다. 안쪽에 비단결 같은 무늬가 아롱대는 자그마한 조개 껍데기. 소라게가 이사하고 남은 낡고 까슬한 집. 둥글게 깎여나간 은은한 초록빛 유리 파편. 그녀는 마지막으로 곡선의 줄무늬가 멋진 돌멩이 하나까지 손에 쥐고 조금 떨어진 곳에 마침맞게 드러누운 뒤틀린 표류목 위에 걸터앉았다.


손바닥 위에 올려진 모래사장의 장난감들이 어쩐지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에아는 슬쩍 그 소금기 어린 재잘거림에 귀를 기울여 보았다.







호박벌 한 마리가 고롱고롱 콧노래를 부르며 만발한 꽃 사이를 엉거주춤 날았다. 주렁주렁 걸린 등나무꽃들조차 들이붓는 햇살에 취해서 늘어진 것처럼 보였다. 동백나무는 진한 초록빛의 윤기가 흐르는 오동통한 잎을 자랑하며 한껏 부풀어올라 있다. 담벼락의 장미들은 거의 앞다투어 머리를 들이밀듯 저마다의 붉음으로 아우성이다.


배경에 어울리게 얌전한 원피스를 입은 소녀가 뾰로통한 표정으로 잔디 위에 새 에나멜 구두를 질질 끌며 걸어온다. 구두와 양말에 금세 풀물이 얼룩진다. 잠시 걱정스레 허리를 숙여 손으로 뒤늦게 문질러보지만 더 번질 뿐이다. 다시 짜증스런 얼굴로 돌아와 이번엔 목을 조이는 옷깃을 신경질적으로 당겨낸다. 원피스가 살짝 망가질 듯 늘어났지만 소녀는 심통맞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테라스에 마련된 의자에 눌러앉았다.


얼마 되지 않아, 누군가 그 뒤로 살금살금 걸어왔다. 세련된 갈색빛이 도는 머리칼을 멋지게 휘감아 올린, 예쁘기보다 잘생긴 여자였다. 한 켠에 잠시 손에 들었던 큼지막한 선물 상자를 조심스레 내려놓고, 소녀가 앉은 의자 뒤로 웃음기를 참은 채 길고 늘씬한 다리로 걸어가 냉큼 두 손으로 소녀의 눈을 가려버린다.


“누구~게!”


“어? 어?!... 고모??”


“뭐야 귀신 같이 맞히네?”


여자가 두 손을 풀자 소녀는 의자에서 번쩍 일어나 한달음에 여자의 품에 안겼다.


“진짜 고모다!”


“진짜 미에다! 근데 더 크고 더 예쁜 미에다!”


둘은 부둥켜 안고 기우뚱거리며 한참을 낄낄거렸다. 그러다 아차하며 여자는 소녀를 놓고 뒤로 돌아 달려가 선물상자를 도로 들고 소녀에게 불쑥 내밀었다.


“짜잔~ 그럼 이건 뭐~게?”


흐읍하며 숨을 들이쉬고 휘둥그런 눈으로 선물을 받아든 소녀는 당장 열어봐도 되냐는 듯 입술을 만 채 여자의 눈치를 봤다. 여자는 뭘 기다리냐는 얼굴로 크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붉은 리본으로 포장된 초록빛 상자는 날짜를 좀 지난 것 같았지만 소녀는 모른척하고 조심스레 테이프를 뜯어냈다. 여자는 좀 더 쫙쫙 찢어주길 기대한 것 같았지만 잠자코 소녀가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안의 상자가 드러나자 투명한 비닐 막 너머로 화려한 여자 아이 인형이 소녀를 마주했다. 소녀는 감히 눈을 떼지 못했다. 진초록빛의 주름진 천이 빳빳한 원피스를 당당하게 소화하는 아이였다. 같은 천의 챙 넓은 모자를 자줏빛 곱슬 머리 위에 비스듬히 쓰고 얼굴은 한껏 생기로 넘쳤다. 톡톡 터질 것 같은 엷은 분홍 장미 봉오리 장식들이 돋보였다. 소녀는 거의 모시듯 인형을 상자에서 꺼내 애틋하게 품에 안았다.


“어때? 마음에 들어?”


“...완벽해.”


여자는 소녀의 신들린 듯한 대답에 만족한 듯 만면에 미소를 띠었다. 뚫어져라 감탄하는 소녀를 두고 잠시 집 쪽을 살피는 듯 하던 여자는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근데 왜 밖에 나와 있어? 들어가자.”


“집에 무슨 이상한… ‘무녀?’님이 와 있어. 난 들어가면 안 된대.”


“아아, 그래서 삐져있었구나.”


여자는 팔짱을 끼고 한 손으로 턱을 두드리며 곰곰히 생각하는 척 하더니 빠르게 말했다.


“근데 거실에 있을 거잖아. 네 방에 가면 안된단 말은 아니었을 거 아냐.”


“그렇긴 한데…”


“아~ 이 고모가 선물해 준 인형으로 세트가 완성되는 걸 너~무 너무 보고싶어졌는데에… 어떡하지? 고모가 조르면 미에는 거절할 수가 없잖아, 그치?”


여자의 은근한 제안을 못 이기는 척 받아들인 소녀는 여자와 키득거리며 현관 문을 지났다. 소녀의 방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거실에 앉은 손님과 주인 내외가 보였다. 공모하는 두 도둑들처럼 지나가려던 소녀와 여자에게 문득 손님의 눈길이 멎은 것 같았다. 손님을 상대하던 안주인이 뒤를 돌아 소녀를 발견하곤 손짓했다.


“얘, 미에야, 여기 와 보렴. 아, 아가씨도 오셨군요. 들어오세요.”


쭈볏거리며 얼어붙은 소녀의 어깨를 다독이듯 감싼 여자가 함께 거실로 들어섰다. 이상한 손님은 쭈글쭈글한 노파처럼 보였다. 낡고 해진 외투를 벗지도 않고 홀로 거대한 손님용 소파를 차지하고 앉아 고소하고 톡 쏘는 향이 나는 값비싼 커피를 홀짝홀짝 들이키고 있었다. 테두리에 금박을 두르고 꽃 모양으로 펼쳐진 샛노란 잔은 노파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찻잔이 노파를 대접하는 게 아니라 노파가 찻잔을 모셔야 할 것 같았다.


한참을 지낼 모양인 듯 우아한 탁자 위엔 간식으로 가득한 접시와 뚱뚱하게 부푼 커피 주전자가 한 상 차려져 있다. 열어 놓은 테라스 창문 때문에 엷은 커튼이 간간이 흔들리며 안으로 진한 라일락 향을 넘실넘실 실어 보냈다. 거실 한 구석에는 손님을 살짝 등지고 앉은 더벅머리의 주인 양반이 작은 트레이에 금빛이 영롱한 위스키를 올려놓고 두터운 책을 손에 든 채 가끔 잔을 기울였다. 한 모금 들이킬 때마다 휘어진 코가 킁킁거렸다.


안주인이 여자에게 의자를 가리켰다. 여자가 의자에 먼저 앉으라고 소녀를 밀어줬지만 소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런 소녀를 안주인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살피더니 대번에 표정이 굳었다.


“넌 또 왜… 대체 왜 매번 옷이나 신발에 뭘 묻히고 돌아다니는 거니? 제대로 지워지지도 않아서 죄 그냥 버려야하는 걸 정말. 뭘 아낄 줄을 몰라요. 그저 지 멋대로야 아주.”


“거 손님 있는데 애 지적질 좀 하지 마. 옷이야 뭐가 좀 묻을 수도 있는 거지.”


무심히 책을 보는 것 같던 주인양반이 한 마디 참견하자 안주인은 대뜸 발끈했다.


“저번에도 애 옷 하나 제대로 못 입힌다고 나한테 따진 게 누군데. 그 땐 당신 손님이라 잘 보여야 하고 지금은 내 손님이라 상관 없다 이거에요?”


“자자, 설마 그런 뜻이겠어요, 언니. 오빠도 참, 언니가 살림 알뜰한 거 알면서 괜한 소리를. 언니도 속상해서 그런 거잖아요. 다들 그만하시고. 나 여기 과자 참 맛있게 생겼는데 목이 칼칼해서 좀 안 넘어가네…”


여자가 능청스레 부부의 칼부림 사이에 끼어들자 한껏 어깨를 움츠린 채 긴장하고 있던 소녀는 주춤거리며 여자의 의자 뒤로 아예 숨듯이 서버렸다. 주인양반은 위스키로 목이 거칠어진 양 크흠크흠 괜한 헛기침을 하고 다시 책으로 눈을 돌렸다. 안주인은 바늘눈은 풀지 못한 채 뾰로통하게 여자에게 남은 컵에 커피를 따라 건넸다.


그 와중에도 노파는 평온하게 포크를 들고 케이크 한 조각을 잘라내고 있었다. 전혀 신경 쓰지도 않는 것 같은 손님에게 오히려 무안해진 안주인만 호들갑스런 이상한 웃음을 흘리곤 자기도 재빨리 아몬드 하나를 입에 쏙 집어넣고 굴리듯 씹었다.


“죄송해요, 호호. 저희 집이 좀 원래 이래요.”


“... 딸애가… 미에라고 했니?”


무마하려는 안주인의 빈말을 가볍게 무시하듯 노파는 스르르 고개를 돌려 소녀를 바라보며 말을 붙였다. 소녀는 더더욱 어쩔 줄 모르다가 시선을 내리깐 채 여자가 앉은 의자 등받이를 두 손으로 꼭 잡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네.”


그 이후로 노파는 아무 말도 않은 채 한참을 소녀만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소녀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앉은 모두가 불편해질 정적이었다. 등을 돌렸어도 귀는 내내 한쪽으로 열려있던 주인양반마저 뭔가 싶어 노파를 새삼 돌아보았다. 안주인이 안절부절하다 뭣 때문에 그러시냐는 말을 내뱉으려 할 때 노파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저 아이는 무녀가 될 운명이야.”


뜬금없는 선언에 누구도 한 번에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어지러이 섞인 향으로 모두가 혼미한 가운데 안주인이 낮은 비명 같은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노파는 그걸 틀어막듯 더 단호한 어조로 내리찍었다.


“증거도 있지.”


노파는 크게 한숨 들이쉬더니 갑자기 얼굴이 풀어지며 묘한 웃음을 띠고 이번엔 소녀를 향해 가볍게 호통치듯 던졌다.


“겁대가리 없음. 재수 없음.”


노파는 농담이라도 한 양 껄껄 웃고는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났다. 소파 한 쪽에 대충 뭉쳐놓은 듯한 작고 지저분한 보따리를 도로 손에 챙기더니, 이번엔 다시 안주인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경고하듯 새겨넣었다.


“재수가 없다는 건, 혼자 살 운명이라는 얘기야. 가까이가면 다 타 죽어.”


경악한 채 서지도 앉지도 못하는 안주인을 두고 노파는 성큼성큼 가려다 무표정하게 입을 다물고 있는 여자를 보고 발걸음을 멈췄다. 여자는 노파를 노려보며 아직도 등받이를 꼭 쥔 소녀의 손 위로 자기 손을 얹었다. 소녀는 노파가 당장이라도 자신의 목덜미를 잡아채 끌고 갈 것처럼 얼어붙어, 자신과 여자의 맞닿은 손만 내려다보았다.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하지만 안간힘을 쓰며 참고 있다. 하지만 노파는 더 이상 소녀가 보이지도 않는 존재인 양 깡그리 무시했다. 도리어 여자에게만 측은한 눈길을 보내더니 조용히 인사를 건네듯 말했다.


“자네는 얼마 안 남았구먼. 미련 버리고 준비해. 가족들 놀래키지 말고.”


소녀는 여자의 손가락이 손을 파고들듯 눌러오는 걸 느꼈다. 고개를 들고 얼굴을 확인하자 여자는 애써 무표정한 그대로를 유지하려 했지만 이미 핏기가 가신 뒤였다. 노파는 그대로 현관 문까지 나가 휑하니 가버렸다. 쿵하고 무거운 것이 내리치는 소리가 났다. 주인양반이 일어나 책을 내던지고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디서 저런 거지 발싸개 같은 점쟁이 할망구를 데려와서 이 짓거리야! 남의 딸한테 할 소리가 없어서 뭐? 지랑 똑같이 된다고? 당신은 대체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주인양반은 누구에게랄 것 없이 삿대질을 휘두르며 폭발했다. 하지만 안주인은 벼락을 맞은 것처럼 입을 틀어막은 채 간신히 숨만 쉬고 있을 뿐이었다. 보다못한 여자가 일어나 주인양반에게 다가가는데 안주인이 눈앞을 지나는 그녀를 덜컥 붙잡았다. 덜덜 떠는 손으로도 여자의 팔이 저리도록 잡아챈 안주인은 그녀의 눈을 간절히 들여다보며 떨어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열었다.


“...사실이에요?”


“뭔 개같은 소리야! 지금 할망구랑 작당하려고 아주 저주를 퍼붓는 거야?”


“조용히 좀 해봐! 사실이냐고 묻잖아요!”


씩씩거리는 주인양반에게 절규하듯 소리지른 안주인은 다시 애타게 여자에게 매달렸다. 여자는 그 힘에 끌려 넘어질듯 비틀거리다 떨리는 숨을 뱉으며 고개를 돌리고 소녀를 향했다.


“일단 애부터 내보내고 얘기해요. 미에야, 방으로 먼저…”


“내보내긴 뭘 내보내? 니가 이 집 주인이야? 그리고 저거, 저 재수 없는 인형 좀 그만 사다 나르라고 했지! 하여간 애 주변에 제대로 된 어른이 없으니까 이 사달이 나는 거 아니야!”


주인양반은 마침내 어느 틈에 소녀가 떨어뜨린 인형을 분풀이 대상으로 삼았다. 여자는 그보다 더 인형처럼 고정되어 버린 소녀에게 다시 몸을 돌리고 이번엔 모든 목소리를 가로질러 단호히, 그러나 온기를 잃지 않은 채, 소녀를 일깨웠다.


“미에야. 먼저 방으로 가 있어. 고모가 금방 올라갈게.”


소녀는 정말 주박에서 풀리기라도 한 듯 서둘러 인형을 집어 끌어안고는 후다닥 거실 밖으로 도망쳤다. 소녀는 계단참까지 허겁지겁 올랐다가, 여자가 돌아와 거실 문을 닫는 것을 확인하고는 도로 작은 고양이처럼 발소리를 죽이고 내려왔다.


문틈 사이로 작은 귀를 대보았다. 내려오는 동안은 왕왕 울리는 고함과 웅얼거림이 섞여 있더니, 이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소녀는 자신의 귀나 문의 문제인가 싶어 흘끔흘끔 살피다 다시 귀를 대본다. 갑자기 여자의 목소리가 또렷이 문틈으로 새어나왔다.


“... 의사 말론 반 년이랬는데. 그 정도면 길지 않나.”


여자 특유의 한숨 같은 낮은 웃음소리가 비어져 나왔다. 이어서 기어이 비명 같은 안주인의 통곡이 거세게 문을 때렸다. 소녀는 그대로 밀려나듯 문에서 떨어져나와, 정신없이 계단 위로 뛰어갔다. 방에 도착하고서야 참고 있던 숨이 터져나오듯 흐느꼈다. 소녀는 오들오들 떨며 인형을 끌어안은 채 주저앉았다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난듯 번뜩 고개를 들고 일어나 걸어갔다.


소녀가 향한 곳에는 나지막한 서랍장 위에 소녀가 손에 든 것 같은 인형이 세 개 더 있었다. 인형들 앞에는 작은 공물 더미가 꾸려져 있다. 구슬이나 씨앗, 종이별, 단추 따위가 모두 보물처럼 반짝거린다. 그것은 소박하지만 어엿한 신전이었다.


아름답고 정교한 레이스 장식에, 아이보리 빛이 감도는 봄의 신부 옷을 입은 아이는 부드럽고 상냥해 보였다. 푸른 가을 하늘과 호수의 빛을 머금은, 비단 옷과 보넷 모자를 걸친 아이는 조금 엄숙하면서도 쓸쓸한 표정이다. 마지막으로 보들보들 새하얀 털모자를 뒤집어쓰고, 두꺼운 체크무늬 치마를 두르고, 가죽 부츠까지 챙겨 신은 아이는 겨울을 담담히 견뎌낼 것 같은 미소를 띠고 있다.


소녀는 손에 든 진초록빛 원피스의 인형을 두 번째 자리에 틈을 만들고 올려놓았다. 강렬한 여름의 아이의 자리다. 소녀는 손을 놓으며 작게 중얼거린다.


“루시…”

소녀는 나란히 선 네 인형들 앞에 무릎을 꿇더니 손을 맞잡고 빌기 시작했다. 두 눈을 꼭 감은 채 입속으로 중얼거리기를 몇 번, 그러다 조금 더 소리를 높여 고개를 들고 인형들을 마주한 순간이었다.


“...죽지 않게 해주세요… 고모가 죽지…”


인형들이 묘하게 떠는가 싶더니, 그저 바닷속 해파리가 유영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모두 둥실 떠올라, 하늘하늘 천과 머리를 날리며 소녀의 어깨 높이로 내려와 천천히 소녀를 중심으로 돌기 시작했다. 누가 본다면 손이라도 잡고 축하하듯 소녀를 빙글빙글 맴돌며 춤추고 있다고 할 모습이었다. 소녀의 두 손이 스르르 풀렸다. 저도 모르게 입이 살짝 벌어졌다. 믿을 수 없다는 소녀의 눈을 네 개의 인형들은 끝없이 돌며 마주치고 또 마주쳤다.


소녀는 두렵지 않았다.

불같이 화가 끓어올랐다.


소녀는 날던 인형들을 손으로 죄다 거칠게 잡아채 한아름에 안아들고는 방을 뛰쳐나가 미끄러지듯 계단을 내려갔다. 쏜살같이 부엌에 난 뒷문쪽으로 박차고 나간 소녀는 뒤뜰에서 가위질을 하는 정원사와 마주쳤다. 소녀는 어리둥절해하는 정원사를 향해 곧장 달려가 불쑥 인형들을 내밀었다.


“아저씨! 이거! 지금 당장 태워주세요! 전부 다요! 빨리!”


“에? 작은 아가씨, 이건..”


“상관없어요! 아무튼 빨리!”


“그치만 큰 아가씨가…”


“지금!!!”


소녀의 박력에 못 이겨 정원사는 하는 수 없이 창고 한쪽에 박아둔 원래는 낙엽을 태우던 소각통을 낑낑거리며 꺼낸 뒤 불 피울 준비를 했다. 그 내내 소녀는 한 마디도 않은 채 인형들만 도망가지 못하게 하려는 듯이 질끈 안고는 서늘한 얼굴로 보기만 했다. 정원사는 영 찝찝한 듯 다시 물었다.


“이거, 나중에 혼나셔도 모릅니다. 저도 혼날 테지만. 그보다 큰 아가씨가 슬퍼하실텐데…”


“고모를 위한 일이야.”


소녀는 완강히 답한 후 거침없이 인형들을 소각통 안으로 던져넣었다. 정원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꿈지럭거리며 불을 붙였다. 잘 붙지 않는지 투덜거리다가 간신히 조금씩 타는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이거.. 시간 좀 걸릴 건데요.”


정원사의 말이 더 이상 들리지 않는 듯 소녀는 그저 떨리는 숨을 내쉬며 불속에 잠긴 인형들만 쳐다보았다. 하염없이 시간이 흐르는 듯 했다. 정원사도 다시 다른 구역을 다듬으러 사라진 뒤였다. 이상했다. 아무리 노려보아도 달라지지 않는다.


인형은 타지 않는다.

사라지지 않는다.


소녀는 차츰 뭔가가 목을 옥죄는 것처럼 가쁘게 숨을 쉬기 시작했다. 몸이 마비된 채 펴지지도 않지만 그럼에도 억지로 손을 뻗어야 하는 것처럼 부르르 떨며 소각통 안쪽으로 두 팔을 천천히 늘어뜨렸다. 불은 그녀의 손길에 얌전히 고개를 숙이듯 사그러들었다. 애초에 피워진 적도 없는 것처럼 잠잠해졌다. 북받치는 울음으로 이미 온몸이 들썩거리면서도 소녀는 인형을 건져냈다. 시커먼 그을음이 군데군데 묻었을 뿐이다. 문드러지거나 녹아내린 곳조차 없다. 불을 피우기 위해 태운 다른 잡다한 재만 허옇게 흩날린다.


거스를 수 없다.

돌이킬 수 없다.


소녀는 가늘게 입술을 떨며 쉼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인형을 차례 차례 옆의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마지막엔 자신도 그 사이에 가만히 누웠다. 뿌연 재투성이 바닥 위에, 그을음이 번진 멍한 얼굴로 소녀는 중얼거린다.


“나는… 나는 이제 미에가 아니야.”


봄의 아이가 가만히 두 눈을 가렸다.


“내 이름은 에아야.”


여름의 아이가 조용한 숨을 내쉬었다.


“나는 무녀 따위 되지 않아.”


가을의 아이가 살포시 두 귀를 막았다.


“나는… 마녀가 될 거야.”


겨울의 아이가 입가에 손가락 하나를 대고 속삭였다.


‘쉿.’








모든 것이 고요했다. 에아는 옆으로 웅크리고 누워 뻣뻣해진 몸을 손으로 받치고 일어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닥불은 꺼져있었다. 사방이 새하얗다. 그녀의 외투조차 하얀 털이 덧씌워진 것 같다. 그녀가 몸을 틀자 가루 같은 눈 결정들이 우수수 흘러내렸다. 모닥불로 돌아왔다 깜빡 잠든 사이에 잠시 눈이 왔던 모양이다. 모래사장은 얇은 눈의 덮개를 뒤집어쓰고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눈 때문인지 동이 터오려는 건지 사위가 어렴풋이 밝다. 밤이 끝나가고 있었다.


에아는 몸 이곳저곳을 문지르고, 장갑을 벗어 손도 마주 비볐다. 일어난 자리에 간밤에 주웠던 작은 기념품들이 흩어져 있다. 그녀는 다시 쪼그리고 앉아 그것들을 들여다 보다가, 모닥불이 꺼진 구덩이에 하나 하나 굴려넣고, 조심스럽고 꼼꼼하게 모래를 덮었다.


“구경 잘 했어. 돌려줄게.”


에아는 평평해진 모래바닥을 토닥토닥 두드리며 속삭이곤 다시 일어섰다. 모래사장과 달리 눈이 와도 바다는 여전히 바다였지만, 고요한 적막함을 지키고 싶은 듯 파도조차 잦아들어 있었다. 에아는 바닷가로 좀 더 걸어가며 살며시 두건을 뒤로 내려보았다. 그 옛날의 누군가처럼 가볍게 틀어올린 머리가 드러났다.


에아는 먼 바다까지 내다보았다. 바다는 해산을 앞둔 듯 두텁게 부풀어올라 있다. 모두가 그 불의 아이를 기다리며 숨죽이고 있다. 하지만 쉬이 나오지 못한다. 탄생은 누구에게나 벅차고 힘겹다. 도움을 청하듯 물결이 힘없이 에아의 발치를 더듬는다. 에아는 뻗어오는 손을 외면하지 못한다. 그녀는 다시 물가에 쪼그리고 앉아, 외투 끝이 젖은 모래로 버석해지는 것도 아랑곳 않고, 손가락으로 모래밭 위에 글자를 새긴다.


‘마리. 루시. 사라. 줄리.’


바다는 얼른 미끌미끌한 손을 내밀어 글자들을 쓸어간다. 허겁지겁 삼켰는지도 모른다. 에아는 잠시 기다렸다가, 덤인 양 하나를 덧붙인다.


‘에아.’


바다는 고맙다는 말도 없이 그마저 게눈 감추듯 가져갔다. 그럼에도 효과는 확실했던 모양이다. 마침내 바다와 하늘 사이에 가느다란 경계선이 그어졌다. 문이 열리고 있었다. 에아는 두 손에 입김을 호호 불어넣으며 실눈을 뜨고 지켜보았다. 나머지는 아이와 어미의 몫이다. 그녀는 그저 기다리는 것 외엔 도리가 없다.


문득, 에아는 미간을 찌푸린다. 피로와 추위로 인한 것인가 싶어 뒤늦게 마른 세수도 해보지만 변함이 없다. 바다 위를 무언가가 걸어오고 있다. 터덜터덜, 그리 빠르지 않아보이는데도, 이상하리만치 휙휙 거리가 줄어든다. 처음엔 선 위의 검은 점이던 것이, 다음은 덩어리로, 다음은 작은 탑을 머리에 인 기묘한 생물로. 어느 순간 그것은 말에 탄 누군가로 또렷해졌다. 비록 희미한 역광으로 잘 분간할 순 없었지만 분명 그 인물은 자연스럽게 바다 위를 걸어오는 말을 탄 채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그것이 꽤 큼지막하고 튼실한 말이고, 그 위에 앉은 건 묘하게 길고 뾰족한 모자를 쓴 여자 아이라는 걸 알아볼 즈음엔 그 인물은 에아를 향해 엄청나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에아는 조금 얼떨떨한 얼굴로 손을 쥐었다 폈다 하다가 아주 살짝만 올려 답해보았다. 말의 주인은 아예 두 손을 다 올리고 구조신호라도 보내듯 휘젓다가 말에서 굴러떨어질 뻔하고는 다시 자리를 잡았다. 그걸 축하하는 건지 괜찮다는 말을 하고싶었던 건지 이번엔 또 한 손으로 주먹을 쥐고 불끈 하늘로 올려보였지만 에아는 이번엔 반응하지 않았다. 누군지는 몰라도 폭삭 젖은 꼴로 오게 만들 순 없었다.


그저 비에 젖은 진흙길이라도 밟는 것처럼 처벅처벅 걸어온 말은 생각보다도 컸다. 그리고 새파랬다. 이마에 이슬처럼 맺힌 새하얀 얼룩만이 유난히 또렷했다. 그야말로 바닷물이 핏줄에 흐를 것 같이 짙푸른 말에는 붉고 노랗고 가느다란 매듭 장식들이 걸려있었다. 축제 때 화환을 건 말처럼 화려해보이는 말의 목에는 꽃 대신 주렁주렁 기묘한 쇳조각들이 걸려있다. 손바닥만한 크기들로 정성스레 세공된 그 장식품들은 아무리 들여다봐도 뭘 조각해놓은 건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것들이 부딪칠 때 울리는 소리가 좋았다. 작은 종 같기도 하고, 철썩이는 파도소리를 닮은 것도 같다.


말의 주인은 더 희한했다. 말에서 훌쩍 뛰어내리자 자그마한 키가 도리어 눈에 띄었다. 모자가 오히려 키의 3분의 1쯤을 차지하는 것 같다. 그리고 이번엔 온통 보라색이다. 마침 드디어 시작된 일출의 여파로 바다와 하늘 모두 울그락불그락해지는 참이었다. 진한 보랏빛의 원피스와 맞춘 듯한 연보랏빛 곱슬머리를 보면 오는 길 내내 사방으로 물감을 흩뿌리고 온 장본인 같았다. 양갈래로 땋은 머리를 묶은 리본도 보라색이고, 신발조차 그랬다. 심지어 손에 든 보따리를 묶은 끈마저도. 꽤 소중한 것인지 절대 놓지 않았는데, 안에서는 풋풋하고 뭔가 알싸한 풀향 같은 것이 흘러나왔다. 아이는 생글거리는 얼굴을 하곤 자못 기대에 부풀어 에아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드디어! 안녕! 난 데보라의 데비에요! 그러니까 줄여서 말이죠! 지금 에아를 봐서 진짜, 진짜 기쁘거든요! 나 엄청 오래 걸어서 왔는데, 아, 내가 걸은 건 아니지만요!”


증명하듯 옆에 서 있던 말의 다리를 툭툭 두드려보였다. 말은 당연하다는 듯이 짧게 투레질을 했다.


“얘는 그냥 퍼렁이! 아직 이름을 못 지었어요. 사실 이번에 오면서 처음 만났거든요. 아무래도 나 혼자 오긴 좀 그러니까, 여신님들이 내주신 건데… 아!”


끝없이 이어지는 아이의 재잘거림에 에아는 그대로 석화된 듯 빤히 보고만 있었다. 하지만 몇 년은 안 사이처럼 아이는 스스럼없이 다가들어 에아의 한 손을 잡더니 말에게 턱 갖다댔다.


“에아가 이름을 지어주면 되겠다! 그럼 퍼렁이도 엄청 좋아하겠죠?”


에아는 흠칫했다. 말의 피부는 유리처럼 차갑고 매끈했지만, 그 안으로 느껴지는 강인한 심장의 열기가 그녀의 손에 번졌다. 끓어넘치는 생명의 감촉이었다. 순간적으로 에아는 흡하고 숨을 들이키더니 곧 서서히 흐느끼며 무너져갔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엉엉 울며 주저앉는 에아를 보곤 아이는 기겁했다.


“미안해요!!! 데비가 잘못했어요! 처음 본 사람 손을 그렇게 막 잡아당기면 안 되는건데! 여신님들이 매번 주의를 주는데도 나 머리가 좀 나쁜가봐요! 사과할게요, 부탁이니까 울지 마요, 네?”


아이는 동동거리다 같이 에아 앞에 쪼그리고 앉아 걱정스레 들여다봤다. 어떻게든 그녀의 손 틈 사이로 눈을 맞추려는 노력에 에아는 그만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그녀가 눈물과 콧물 범벅의 얼굴로 훌쩍이며 씁쓸하게 웃자 아이도 다시 활짝 웃었다. 에아는 그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아이의 눈이 동그래졌다. 품 안의 보퉁이를 좀 더 단단히 끌어안더니, 고개를 쭉 빼고 에아에게 묻는다.


“잘못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됐는데요?”


에아는 놀라 다시 정신이 돌아온 것처럼 짧게 숨을 들이키고 반문했다.


“...뭐?”


“잘못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됐을 거 같냐구요. 말해줘요. 보여줘요.”


에아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아이는 진심이었다. 똘망똘망한 눈매로 온전히 그녀에게 집중하고 있다. 아이와 말의 너머로 둥그렇고 새빨간 불의 머리가 살짝 보였다. 에아는 눈이 부신 듯 가늘게 뜨고 꿈꾸듯 속삭이기 시작했다.


“나한테.. 선물을 건네면서 고모는 말하지.


‘이 아이는 여름의 아이야. 너처럼. 약속할게. 이번 여름부턴 고모도 너랑 함께 있을거야. 이 집구석은 심술쟁이로 가득하지만, 이 고모가 심술쟁이 전문이거든. 너랑 나랑 네 인형들이면, 여길 해적들처럼 점령해버릴 수 있을 걸!’


그리고 그렇게 돼.


고모 앞에선 엄마도, 아버지도… 한 수 접어주지. 그 그늘 안에서 나는 안전해. 그래서 빌지 않아. 무엇도 바라지 않아. 인형들은 잠잠히 있을 수 있어. 그을음도 재도 없이 그저 창가의 햇빛에 바래가며.


고모가 있으면 엄마의 잔소리는 날 사랑하고 걱정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돼. 고모가 있으면 아버지의 호통도 이 빠진 호랑이처럼 조금 우스꽝스러워져.


나는, 나는 그제서야 집에 온 것 같아.”


반짝이는 눈물이 흘러내리는 에아의 얼굴 위로 발갛게 홍조가 오르듯 햇살이 닿았다. 에아의 목소리가 웃는지 우는지 알 수 없게 흐트러진다. 그래도 그녀는 꿋꿋이 이어간다.


“그리고… 나는 숲에서 그 사람을 만나지. 이번엔 소리지르지 않아. 엉망도 아니야. 도망이 아니라 그저 산책 나온 것뿐이니까.


그는 그냥 자연스럽게 숲의 식물들과 동물들, 숨겨진 오솔길들을 구경시켜줘. 나는 순수하게 감탄하지. 나도 내가 모아 놓은 작은 보물들을 보여주고, 그림책에서 읽은 이야기들을 들려줘. 가끔은 지어내기도 해. 그는 그걸 알면서도 장난기 어린 눈을 반짝이며 그냥 들어줘.


어느 날 숲까지 따라나왔던 고모랑 그가 마주쳐. 그는 반듯하고 싹싹하지. 고모는 대번에 그를 집까지 데리고 가. 엄마랑 아버지가 눈을 좀 흘기고 혀를 살짝 차지만, 고모는 능청스레 그를 들이밀어.


그걸 바라보는 내 맘은 이미 간질간질하고 달큰한 솜뭉치로 가득 찬 것 같아서 어쩔 줄 몰라. 날 돌아보는 그는 조금 난처하지만 그래도 안심하라는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어.


그리고 또 다른 어느 따뜻한 봄날… 나는 그의 아내가, 그는 나의 남편이 돼.”


어느새 목소리가 차분해진 에아는 얼굴을 쓱쓱 닦아내고 이제 온 하늘로 퍼져나가는 수많은 빛줄기들을 우러러보며 일어났다. 그녀의 몸 전체를 따사로운 아침의 기운이 감싼다.


“우리는… 정말 꿈결 같은 하루들을 살아.


우리는 우리만의 작은 집을 꾸미고, 매일 같이 쓸고 닦지. 그는 함께 커다란 이불을 접을 때조차 내게 입맞춤을 하고 씨익 웃곤해. 나는 냄비를 저으며 요리를 하다가도 그가 오면 손을 잡고 우아하게 춤을 추고. 어쩌다 들르는 고모는 괜히 더 소리를 지르며 자기 눈을 가리곤 손사래를 쳐.


그러다 어느 날, 나는 밤에 아름답고 신비한 꿈을 꾸지. 얼마 안 돼서 나는 엄마와 아버지에게 담담히 아기가 올거라고 말해. 그 두 사람이 경악하는 표정이란! 세상에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단 얘길 난생 처음 듣는 것처럼. 정말 그 얼굴에 난 처음으로 두 사람 앞에서 크게 웃어버려. 그리고 그 웃음에 흐물흐물 풀어지는 두 사람도 처음으로 목격하지.


점점 불러가는 내 배를 쓰다듬으며 그는 매일 걱정 반 기대 반으로 혼자 이리 뛰었다 저리 뛰었다 해. 그래도 괜찮아. 나는 아기도 나도 아무렇지도 않을 거란 걸 믿어. 그래서 아기는 내 믿음에 부응하듯이 아주 건강하고 씩씩하게 울며 세상에 나와.


땅 위에 떨어진 그 작은 별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서 그와 엄마와 아버지, 심지어 고모까지도 허둥지둥해. 아기는 정말 어마무시한 힘을 가졌던 거지. 아기의 손짓 발짓 하나에 모두가 휘둘리고, 모두가 깔깔 웃어.


나는 그 작은 별의 귀에 대고 속삭여.


‘사랑해. 사랑해, 아룬.’


그런 나를 보고 엄마와 아버지가 말하지.


‘미에야, 고맙다.’


나는 어리둥절해하지 않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일거야. 도저히 그 두 사람이 그 말을 나에게 했다고 믿지 못하는 게… 아닐 거야.”


세상에 올 아침에게 들려주는 가장 찬란하고 가장 소박한 아리아가 끝났다.


마지막 한 마디를 속삭이는 에아는 햇살에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처럼 흔들렸다. 붉게 물든 그녀를 쪼그려앉아 올려다보던 아이가 제자리에서 폴짝 뛰듯이 일어났다.


아이는 다시 에아에게 다가오더니 살며시 여태 안고 있던 소중한 주머니를 에아에게 안겨줬다. 에아가 조심스레 받아들고 묻는 듯한 얼굴로 내려다보자 아이는 직접 보랏빛 끈을 끌러 열어주었다. 에아는 잠시 망설이다 한 손을 넣고 바스락거리는 작은 알갱이들을 한 움큼 집어 꺼냈다.


씨앗들이었다.

동글동글 윤이 나는 작고 귀여운 씨앗들.


에아가 그걸 손 위에 올려놓고 바라보고 있자 아이가 까치발을 하고 기웃대며 금세 종알거렸다.


“이거, 피워주세요! 에아라면 할 수 있어요! 정말 멋진 꽃들이 될 거에요!”


처음엔 갸우뚱하던 에아는 곧 입술을 살짝 다물고는 말없이 씨앗들을 바라보았다. 씨앗들이 손 위에서 구를 것처럼 움찔거리더니 서서히 틈이 열리며 연한 새싹들이 뚫고 나오기 시작했다. 모양도 빛깔도 제각각인 새싹들은 덩쿨이 오르듯 허공으로 쑥쑥 자라더니 모두 세상에 없을 것 같은 아름다움을 지닌 꽃들로 풍성하게 피어났다. 희고, 빨갛고, 파랗고, 노란 색채들이 눈부시게 어우러져 진주 같은 광택이 어른거렸다. 에아와 아이, 말까지 넋을 놓고 꽃들을 바라보았다.


순간 불이 붙었다. 에아는 소스라치게 놀라 아이에게 도움을 청하듯 손을 얼른 내밀었지만 아이는 못내 아쉬운 표정만 짓더니 그대로 두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꽃들은 불의 나비처럼 활활 타올라 허공으로 날아갔다. 아이는 나비들이 멀어질 때까지 눈으로 쫓다가 작은 손으로 남은 재와 연기를 흩트리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아아, 자주 있는 일이에요. 모든 씨앗이 다 좋을 순 없죠! 그래도 이거 봐요! 하나가 남았어요! 원래 제일 예쁜 건 제일 튼튼한 아이죠!”


아이가 가리킨 에아의 손에는 푸르스름하게 얼음처럼 단단해보이는 꽃 한 송이가 다소곳이 버티고 있었다. 줄기와 잎맥으로 별빛이 아른거리는 꽃이었다. 아이가 에아의 두 손을 보듬어 꽃송이를 말아 감싸게 했다.


“자, 이제 됐어요. 에아가 나한테 들려준 꿈은 이제 이 안에 들어있는 거에요. 여기 안에 별똥별이 흐르는 거 보이죠? 이게 에아의 꿈이 갈라져나간 세상이에요. 에아가 우리에게 들려준 순간, 이 세계는 존재하게 됐어요. 그러니까, 이 꽃이 남아있는 한, 에아의 꿈은 이어지고 있는 거에요. 바로 이 안에서. 아주 안전하게, 아주 멀쩡하게.”


에아는 아이의 설명을 듣고 다시 그대로 주저앉을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아이는 긴가민가하며 살짝 불안해했지만 에아가 길고 깊은 숨으로 추스리자 안도했다. 에아는 아이를 본 뒤 처음으로 얼굴 가득히 웃음을 띠우고 약간 쉰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


한껏 행복해져서 에아를 안으려다 그녀가 꽃을 들고 돌아서는 바람에 아이는 대신 옆의 말을 꼭 껴안았다. 말은 어색한 듯이 발굽으로 툭툭 모래를 긁어댔다. 에아는 꽃을 들고 천천히 낡고 쓰러져가는 집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계단 위 문 앞에 푸른 한 송이의 꽃을 놓고, 다시 내려와 꽃을 마주한 채로 고개를 숙이고 두 손을 모은 채 소녀처럼 간절히 빌었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모래바닥 위에 손가락으로 글자를 새겼다.


‘미에.’


성큼성큼 되돌아온 에아에게 아이는 먼저 또 폴짝 뛰어올라 말에 타고는 뒤에 타라고 손짓했다. 에아는 그녀의 머리께에 더운 콧김을 흥흥 뿜는 말의 얼굴에 가만히 이마를 대고 속삭였다.


“안녕, 반가워…아룬.”


이름에 답하듯 말은 에아에게 축축한 코를 들이밀었다. 에아는 말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쓸며 지나 아이의 뒤에 가볍게 올라탔다. 에아가 아이를 안듯이 팔을 뻗어 고삐를 잡자, 말은 알아서 터벅터벅 움직이며 방향을 바꿨다.


바다 위로 새하얗게 번진 불의 길이 가로질러 나 있었다. 그 길 위를 따라가듯 말은 드디어 하늘과 바다 사이에 안긴 거대하고 이글이글 타오르는 갓난아기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보라색 모자를 기우뚱거리며 아이가 문득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무슨 소원 빌었어요? 아, 말하면 안되려나? 그치만 궁금한데!”


에아는 얼굴에 스치는 아이의 모자를 웃으며 한 손으로 치우곤 나직히 답했다.


“미에가 살아갈 날들이 따뜻하고 평온하기를.”


아이는 다시 앞을 보고 모자를 흔들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에아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응. 그거 좋네요.”


말과, 아이와, 여자는 수평선을 가득 채운 새하얀 빛 속으로, 아스라이 사라져갔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가 피운

꽃 한 송이의 세계 속에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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