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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이디 Oct 27. 2019

이방인

그냥 좀 남들과 같으면 안 되니?


비구니보다 못한 내 딸 팔자



 이미 일찍이 딸을 출가시키고 일 년에 많아야 두어 번 정도 얼굴을 맞대는 겸연쩍은 사이라 할지라도, 모녀라 불리는 관계가 그리 쉬이 끊어지지 않는다는 걸 요즘 나는 부쩍 느끼고 있다. 유복하고 다정한 부모 밑에서 자란 또래 친구들을 남몰래 질투하고 부러워했던 10대 시절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얼마나 많이 성숙하고 독립적이며 부모에게 큰 민폐 끼치지 않은 어른으로 자랄 수 있었는지, 그리고 그런 나를 포기하지 않고 밥 먹여가며 옷 입혀가며 길러준 우리 엄마 아빠를 나는 한 인간으로서 존경한다.



 비록 끊어지려야 끊어질 수 없는 생물학적인 이유와 아주 우연하게 그들이 만들어낸 사랑이라는 결실로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본능적으로, 혹은 자식 된 도리로 한국 사회에서는 마땅히 해야만 한다는 그 평범한 효도를 나는 결코 할 수가 없었다. 평범하게 시골 학교에서 졸업하고 전문대 나와 작은 중소기업에서 경리로 일하다가 같은 회사에서 비슷한 수준에 수더분한 남자와 결혼하여 엄마 가까운 곳에서 살아가는 것. 아들 하나 딸 하나 부족하지 않게 둘 정도 자식새끼 낳아서 산후조리원에 미역국 끓여 입에 넣어주다 너도 이제 니 자식 낳았으니 내 맘 알겠지 하고 한 소리 하는 그런 소소한 낙을, 나는 해드릴 수가 없었다. 두세 달에 한번 핸드폰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한탄과 잔소리의 끝맺음은 항상 “그냥 좀 남들과 같으면 안 되니”

응, 엄마 미안해. 나도 남들과 같고 싶은데 그게 잘 안되네.





집이 답답했던 어린 소녀가 이방인이 되다




 그랬다. 나는 항상 집이 답답하고 작게만 느껴졌다. 더 큰 세계로 나가보고 싶었다. 뭔가 가슴 두근거리고 멋진 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실제로 나의 20대의 대부분은 여행과 경험, 그리고 연애가 대부분을 차지했다. 후회한 일도 있었고 후회하지 않은 일도 있었지만 확실한 것은, 30대가 된 나의 앞에는 내가 겪었던 그 무수한 에피소드들이 밑거름이 되어 크나큰 자산이 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 자산들이 모여 지금의 내가 되었고, 전혀 연관이 없을 것만 같았던 곳에서, 대학 시절 배운 것과는 딱히 상관이 없는 일을 하며 밥벌이를 하고 있다. 이건 생각보다 꽤 짜릿하고 스스로 굉장히 자랑스러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낯선 여행지나 새로운 회사에서 만난 지인들은 나를 처음 만나고 지레 '뭔가 대단하고 탄탄한' 백그라운드에  돈 걱정 없이, 큰 희생 없이 자유롭고 평탄하게 인생을 걸어온 '자유로운 히피'로 오해를 하곤 했지만 내가 사실은 돈 3천만 원이 통장에 없어 유학을 포기할 뻔한 가정에서 자랐고 차비가 없어 왕복 1시간 거리를 걸어 다니며 경제적으로 궁핍하게 생활을 했던 캐나다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많이들 놀라워했다. 나는 항상 이렇게 한국에서도 이방인, 한국을 떠나와서도 이방인이었는데 오히려 이러한 이방인이었기 때문에 인생에서 잃은 것보다 얻은 게 더 많다고 생각한다.


 

 가족과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고, 사랑했던 사람을 떠나보냈다고 자책하고 후회하기보다는 스스로 선택하고 생각하고 결정한 지금의 내가 되기까지 겪었던 그 무수한 과정들을, 나는 정말로 소중히 생각하고 감사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조금 달라도 괜찮지 않을까? 똑같지 않아도 남들과 같은 길을 걷지 않아도 유명해지지 않아도 돈을 많이 벌지 않아도 괜찮다. 왜냐면 지금 불어오는 바람이 따뜻하다고 느낄 수 있고 내일 회사에 가는 것이 괴롭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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