덥다. 더워도 너무너무 덥다. 에어컨의 숨결을 벗어나 문밖을 나서면 뜨끈한 온수에 꼬로록 입수하는 느낌이다. 어느 이공계의 인재가 이동식 에어컨 하나 개발 안 해주려나 하는 생각이 간절해진다. 아무래도 지구가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다.
이렇게 날이 뜨거워질수록 살얼음이 아삭이는 시원한 음식이 떠오르기 마련이다. 오늘의 메뉴는 여름하면 생각하는 바로 그 녀석, 시원 쫄깃한 냉면이다.
물냉과 비냉사이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 비빔냉면을 선택했다. 금방 차려지는 냉면에는 하얀 배 한 조각과 귀여운 달걀 반쪽이 담겨있다. 진한 빛깔의 면 위에는 빨간 양념이, 그 위에는 총총 채 썬 오이와 하얀 설탕이 눈처럼 소복이 얹어있다. 새콤한 물냉보다 달큰한 비냉이 끌렸던 오늘인데, 이렇게 눈에 보이는 달콤함이라니! 더위를 잊게 하는 설렘이 느껴진다.
흔히 냉면과 함께 등장하는 도구가 있다. 면을 자르는 용도로 서빙되는 가위가 그 녀석이다. 흠 하지만 내 식탁에서 가위가 쓰일 일은 없다. 냉면의 면이 잘린다는 것은 선비들의 상투가 잘리는 것과 같다. 자고로 냉면은 길쭉한 면을 호록호록 끝까지 끌어올려 한입 가득 우물거려야 제맛이다.
단 한 번의 가위질도 없이 경건히 비벼준 냉면 위로 동글동글 달걀이 보인다. 매콤한 비빔냉면이니 속이 놀라지 않게 요 녀석을 먼저 먹어주기로 한다. 퍽퍽하고 포슬포슬한 노른자가 말랑 탱글한 흰자와 섞이면서 보드랍게 익숙한 맛을 전해준다. 여기에 살짝 묻은 매콤양념이 아직 쉬고 있던 침샘을 퐁 하고 터트려준다.
자, 이제 면을 맛볼 시간이다. 시원하게 호로로록 입에 담은 냉면은 매콤달달 새콤쫄깃한 맛이 가득하다. 거기에 씹을수록 자극적인 맛은 옅어지고 꼬소름한 참기름 향이 진하게 올라온다. 거기에 끝맛으로는 면 자체의 구수한 맛이 슬쩍 여운을 남긴다. 가장 걱정했던 맵기도 무난한 수준이다. 대략 0.7 푸라면 정도? 그래도 이런 매움은 원기옥처럼 쌓이고 쌓여 점점 커지기도 하기 때문에 언제나 방심은 금물이다.
냉면을 호록이고 있자니 부족한 단백질을 보충을 위한 군만두까지 등장해준다. 얇게 튀겨진 만두피 안으로 옹기종기 조화로운 만두소가 그득히 담겨있다. 만두피는 겉은 바삭 속은 쫄깃한 식감으로 기대감을 높여주고 온갖 재료들이 가득한 만두소는 묵직한 고기의 풍미와 촉촉한 채소의 식감으로 입안을 가득 채워준다. 무엇보다 냉면이 남긴 매콤한 기운을 한소끔 가라앉혀준다. 매콤한 냉면을 주문한 맵찔이에겐 꼭 필요한 사이드킥이다.
자, 그렇다면 이 둘을 함께 먹으면 어떨까? 살짝 베어 문 만두 위에 매콤한 면을 돌돌 말아 올려준다. 쫄깃쫄깃한 면발 사이로 바삭바삭한 만두피가 씹히면서 매콤달달한 양념이 촉촉꼬스름한 만두소와 어우러져 한껏 부드러워진다. 사이드메뉴에 군만두가 있는 이유가 확실히 느껴지는 맛이다. 만두를 더 시킬 걸 그랬나. 이거 참 매력 있네.
하지만 만두를 더 시키기엔 배가 너무 부를 것 같고, 얕봤던 매운맛도 차곡차곡 쌓여서 조금씩 힘들어지고 있다. 슬슬 최종 단계로 진입할 때로군. 꾸덕꾸덕 물기가 없던 비빔냉면에 살얼음이 동동 뜬 냉면 육수를 부어준다. 촤르르르 사각사각. 촉촉함과 시원함이 더해지는 소리에 심박수가 상승한다.
육수를 만난 비빔냉면은 매콤새콤 달달한 맛이 육수의 슴슴함과 시원함에 한풀 꺾여 한층 순해진다. 그러면서 육수에 담긴 감칠맛이 슬며시 나타나며 끊임없이 다음 젓가락을 들게 만든다.
‘사가각’
무엇보다 살얼음이 씹히는 이 느낌이 참 좋다. 바깥의 불타는 날씨 따위도 이 순간만큼은 두렵지 않다. 정수리 끝에 한 움큼 고여있던 뜨거운 열기마저 날려버리는 시원함이다.
자 이제 이 식사를 배 한 쪽으로 마무리한다. 시원하고 아삭한 달콤함이 마지막 남아있던 매운 기운을 사악 가시.. 는 듯 하다가 몰래 숨겨놓은 빨간 맛을 슬쩍 묻히고 간다. 이 자식. 배신을 때리다니. 결국 맵찔이의 마지막 마무리는 살얼음이 살짝 남은 냉면 육수로 대체되었다.
냉면으로 한 김 식힌 체온은 식당을 나선지 딱 세 걸음 만에 다시 뜨겁게 달아올랐다. 하 이건 좀 너무하지 않나 싶다가도 그동안 인류가 한 짓들을 생각하면 마음 한켠이 씁쓸해지기도 한다. 지구야, 인간이 미안해 그러니까 이제 그만 화를 식혀주지 않겠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