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콤비니(コンビニ)'가 갑(甲)
쇼핑백을 양손에 무겁게 들고 하라주쿠(原宿)를 걷다 보면 필연적으로 식사 때를 놓치게 된다. 도쿄에 온 관광객이라면 으레 "현지인들은 도대체 뭘 먹을까? 나도 그들이 가는 로컬 찐 맛집에 가고 싶다"라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냉정하게 주위를 둘러보자. 이 화려한 번화가 한복판에 과연 '거주하는 현지인'이 얼마나 있을까? 우리도 명동이나 홍대에서 쇼핑할 때, 굳이 그 동네 숨은 맛집을 찾아 골목을 헤매기보다 눈에 띄는 깔끔한 곳에서 해결하거나 익숙한 브랜드 카페에서 다리를 쉬어 가곤 한다.
여기도 마찬가지다. 하라주쿠는 디즈니랜드나 유니버설 스튜디오가 아니다. 하루 이틀 만에 이곳을 섭렵하겠다는 전투적인 자세는 잠시 내려놓는 게 좋다. 특히 쇼핑이 주목적이라면, 라멘 한 그릇 먹겠다고 1시간 넘게 길바닥에 시간을 버리는 것만큼 비효율적인 일도 없다. 관광객 입장에서 하라주쿠의 먹거리는 쇼핑 동선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효율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물론 라멘 가게들은 유혹적이다. 메이지진구마에역(明治神宮前駅) 근처의 '이치란(Ichiran / 一蘭)'과 하라주쿠역(原宿駅) 근처의 '아후리(AFURI / 阿夫利)'가 대표적이다. 이치란은 후쿠오카가 고향인 만큼 한국인 입맛에 실패 없는 돈코츠 라멘을 내놓고, 1인 독서실 좌석 덕에 혼자서도 마음 편히 면치기를 할 수 있다. 아후리는 돈코츠의 걸쭉함이 부담스러운 이들에게 딱 좋은 유자 소금 라멘(유즈 시오 라멘)이 유명하다. 닭육수 베이스에 유자의 상큼함이 더해져 쇼핑으로 지친 입맛을 돋우기에 제격이다.
-하라주쿠 이치란 라멘 https://maps.app.goo.gl/FPbCvvye8nN3gekk9
- 아후리 하라주쿠 점 https://maps.app.goo.gl/1hsJdPfZfwn4aeJ39
하지만 문제는 대기 시간이다. 점심시간이면 1시간 웨이팅은 기본이다. 특히 메이지진구마에 이치란은 번호표(정리권)를 배부할 때가 있는데, 여기서 당황스러운 점은 대기 시간을 알려주는 QR코드가 일본 국민 메신저인 '라인(LINE)'과만 연동된다는 것이다. 라인이 깔려 있지 않으면 대기 등록조차 못 하고 하염없이 서 있어야 할 수도 있다. 번호표를 뽑아두고 쇼핑을 하다가 알림에 맞춰 올 수 있다면 다행이지만, 그게 아니라면 과감히 패스하시라.
초밥도 사정은 비슷하다. 오모테산도(表参道) 쪽에 '카이텐스시 긴자 오노데라(Kaitensushi Ginza Onodera / 廻転鮨 銀座おのでら)'라는 훌륭한 회전초밥집이 있다. 미슐랭 별을 받은 본점의 DNA를 이어받아 퀄리티가 훌륭하다. 하지만 문제는 위치와 가격이다. 하라주쿠 메인 거리에서 놀다가 내려오려면 다리품을 꽤나 팔아야 하고, 배불리 먹으면 인당 5,000엔은 우습게 나온다. 굳이 하라주쿠 메이지 도리에서 동선을 깨트리면서까지 갈 필요가 있을까? 초밥을 제대로 즐기고 싶다면 차라리 긴자(銀座)의 '스시노 미도리(Sushi no Midori / 梅丘寿司の美登利)' 같은 곳을 미리 예약하는 편이 시간으로나 가성비로나 최상의 선택이다.
-카이텐스시 긴자 오노데라 본점 https://maps.app.goo.gl/BPqmsssjnYqAeyM3A
메이지 도리(明治通り)의 '헨리 버거(Henry's Burger / ヘンリーズバーガー)'나 캣스트리트(キャットストリート) 안쪽의 '더 그레이트 버거(THE GREAT BURGER / ザグレートバーガー)'도 평점이 높다. 하지만 햄버거 세트 하나에 음료를 곁들이면 2,500엔이 훌쩍 넘는다. 햄버거 가게는 아니지만 랍스터 샌드위치 가게인 '루크스 랍스터(LUKE'S LOBSTER / ルークスロブスター)'도 마찬가지다. 한 번씩 먹으면 정말 맛은 있는데 간식인지 세끼니 중 하나인지 결정하기 애매하다. 한 끼니를 해결하려고 랍스터 양을 늘리면 세트에 3,000엔도 훌쩍 넘는다. 아무리 뉴욕의 맛이라지만, 손님이 몰리면 차갑게 식은 랍스터 빵을 받아 들게 될 수도 있고, 포장마차 같은 공간에서 하는 식사로는 가격이 과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루크스 랍스타 오모테산도 점 https://maps.app.goo.gl/VfpJhqh5LSqNc3MM8
-루크스 랍스타 시부야 점 https://maps.app.goo.gl/sFX3MMyXRAPH4w9r7
"그래도 일본까지 왔는데 제대로 된 밥 한 끼는 먹어야지"라는 분들을 위해, 현지인들도 줄을 서는 대표적인 '고기 맛집' 두 곳을 소개한다. 단, 이곳들도 명확한 장단점이 있으니 선택은 당신의 몫이다.
일본 하면 돈카츠다. 수많은 명점이 있지만, 전국구로 통하는 곳을 꼽자면 단연 오모테산도의 '마이센'이다. 정확한 명칭은 돈카츠 마이센 아오야마 본점(Tonkatsu Maisen Aoyama Honten / とんかつ まい泉 青山本店)이다. 이곳의 특징은 맛도 맛이지만 공간이 주는 압도감이다. 옛 목욕탕 건물을 개조해 만든 식당이라 천장이 높고 고풍스럽다. 대표 메뉴인 '흑돼지(쿠로부타) 히레카츠'는 젓가락으로 잘릴 정도로 부드럽고 입에서 살살 녹는다. 하지만 문제는 가격이다. 정식 하나에 3,000엔이 훌쩍 넘는다(약 3,400엔~). 한국처럼 여러 반찬이 깔리는 게 아니라, 양배추와 돈카츠, 밥, 미소시루(된장국) 딱 이렇게만 나오다 보니 반쯤 먹었을 때 조금 물리기도 한다.
-마이센 아오야마 본점 https://maps.app.goo.gl/QHDPrf3Dzhh7gFZ57
다음 소개할 곳은 로스트 비프 오노(Roast Beef Ohno / ローストビーフ大野)이다. 이곳은 맛보다 '압도적인 비주얼'로 승부하는 곳이다. 그릇 위로 산처럼 쌓아 올린 붉은 고기 탑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순간 '좋아요' 폭탄은 확정이다. 오픈 시간은 11:00인데, 첫 턴에 들어가려면 최소 30분 전부터 줄을 서야 한다. 흑우(와규) 로스트 비프 덮밥(약 1,900엔~)이 메인인데, 비주얼만큼 맛이 훌륭한지는 호불호가 갈린다. 고기 자체는 부드럽지만, 와규 특유의 기름진 맛에 마요네즈 소스, 계란 노른자까지 더해져 먹다 보면 상당히 느끼했다. "사진이 남는 거다"라는 분들에겐 추천하지만, 나로서는 좀 빠싹 익히고 위에다가 김치나 파저리 얹어야 속으로 넘어갈 것 같았다.
-로스트 비프 오노 하라주쿠 점 https://maps.app.goo.gl/znVpBeaUgrfGcu4JA
메이지진구마에역(明治神宮前駅) 쪽에서 가장 핫한 곳을 꼽으라면 단연 '아임 도넛(I'm donut ? / アイムドーナツ ?)'이다. 나카메그로(中目黒)에서 시작해 시부야를 평정한 이 가게는 하라주쿠에서도 기본 이중으로 줄을 서야 하는 곳이다. 다행인 건 대기열에서 미리 주문서를 작성하고 카운터에서는 수령만 하는 시스템이라, 악명 높은 줄길이에 비해 회전이 꽤 빠르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피스타치오 크림이나 초코가 듬뿍 들어간 화려한 도넛에 열광하지만, 나는 굳이 '플레인(Plain)'을 고집한다. 이 집 도넛이 다른 곳과 차별화되는 지점은 화려한 토핑이 아니라 바로 '식감'에 있기 때문이다. 반죽에 구운 단호박을 껍질째 섞어 수분 함량을 극한으로 끌어올렸다고 하는데, 덕분에 빵이라기보다는 떡과 케이크의 중간쯤 되는 입안에서 스르르 녹아내리는 묘한 식감이 특징이다. 크림 맛으로 먹기보다 이 독특한 반죽 맛을 즐기는 게 진짜다. 그런데 긴 줄을 선 시간이 억울해서 보상 심리로 10개들이 박스를 사는 분들이 많은데, 참으시라. 반드시 2개 이하로만, 당장 먹을 만큼만 사시라. 수분 함량이 높다는 건, 시간이 지나면 금방 눅눅해지고 기름에 절어버린다는 뜻이다. 집에 가져가서 먹으면 그 쫀득한 감동은 사라지고 기름 덩어리만 남는다. 길거리에서 한 입 베어 물 때가 가장 완벽한 타이밍이다.
- 아임도넛 하라주쿠 https://maps.app.goo.gl/YvRBWnA3gvKiXp8i8
아임 도넛에 필적한 스트리트 푸드들은 '다케시타 거리(Takeshita Street / 竹下通り)'로 가면 정신없이 만날 수 있다. 가시는 분들에게 미리 경고하지만, 이곳은 한 번 지나갈 때마다 수명이 줄어드는 느낌이 드는 기(氣) 빨리는 동네다. 10년 전만 해도 이곳은 도쿄 여중생들의 성지이자 '카와이(Kawaii)' 문화의 발신지였다. 하지만 요즘 일본 여중생들은 죄다 시부야 109(SHIBUYA109)나 신오쿠보(新大久保)로 넘어간 듯하다. 대신 이 좁은 골목은 전 세계에서 온 관광객들로 메어터진다. 좁은 길을 반으로 나눠 올라가는 인파와 내려가는 인파가 서로 밀고 밀리는, 그야말로 컨베이어 벨트 위에 선 기분이다.
정신없는 건 인파뿐만이 아니다. 거리 중간쯤에는 '마이피그 카페(Mipig Cafe / マイピッグカフェ)' 같은 마이크로돼지 카페가 있다. 강아지나 고양이 카페까지는 '그래, 귀여우니까' 하고 받아들이겠는데, 돼지 카페나 수달 카페(カワウソカフェ), 심지어 부엉이 카페(フクロウカフェ)라니. 카페 안에서 즐거워 하시는 많은 분들이 쇼윈도 너머로 보이긴 한데, 나의 취향은 아니다. 패스 !!!
그런데 이 거리의 터줏대감은 '크레페(Crêpe / クレープ)'다. 다케시타 거리 입구부터 달달한 냄새가 진동을 하는데, 얇게 펴 구운 밀가루 반죽(전) 위에 생크림을 산처럼 쌓고 딸기, 바나나, 초코 시럽을 얹어 돌돌 말아낸 그 비주얼은 다케시타 도리의 클래식 같은 존재이다. 350m밖에 안 되는 그 짧은 거리에 언뜻 봐도 6개 이상의 크레페 가게가 있다. 게다가 최근엔 한류 붐으로 다케시다 도리 안에도 명동에서나 보던 신라면 가게, 회오리 감자, 10엔 빵 등이 인기를 끌고 있다.
하라주쿠의 상징인 다케시타 거리(竹下通り)는 국적 불명의 관광객과 동물 카페들이 뒤섞여 혼잡하지만, 그 속에도 보석 같은 곳은 숨어 있다. PAP.COFFEE(펍 커피 / パップコーヒー)라는 곳이다. 이름은 카페지만 빙수가 메인인 가게이다. 이곳의 백미는 '딸기 크림 브륄레(Crème Brûlée) 빙수'다. 겉은 프랑스 디저트 크림 브륄레처럼 딱딱한 설탕 막이 덮여 있는데, 숟가락으로 톡 깨고 들어가면 그 밑에 부드러운 우유 빙수가 감춰져 있다.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크리에이티브한 구성이 재미있다. 다케시다 토리에서 나간 정신줄을 다시 붙들어 매고 다시 하라주쿠 속으로 들어가기 위한 재충전 장소로는 아주 좋은 곳이다.
- PAP.COFFEE https://maps.app.goo.gl/ZkfF35bUNo2mp8WK7
또한 캣스트리트에도 소란스러운 메인 거리에서 살짝 벗어난 골목길로 가면 아주 괜찮은 팬케이크 가게가 있다. 한때 '시아와세노 팬케이크'가 대기 2시간으로 오모테산도 일대를 평정한 적이 있었지만 요즘은 비슷한 가게가 즐비해서 팬케이크에 대한 애정이 살짝 식었었는데, 최근 발견한 '우즈나 옴 옴(uzna omom / ウズナオムオム)'은 특별했다. 1층엔 팬케이크, 2층엔 에그 스크램블, 3층엔 얇은 모찌(떡), 그리고 4층에 딸기를 올린 메뉴였는데, 크림과 시럽에 버무려 먹는 식감이 아주 찰지고 밸런스가 좋았다.
- uzna omom https://maps.app.goo.gl/1pu9Cg1Hmi6emMDq7
커피가 간절하다면 '랄프스 커피(Ralph's Coffee)'로 가서 초록색 타일 배경으로 브런치 인증샷을 남기는 것도 방법이다(맛은 평범하다). 하지만 커피 맛 자체에 집중하고 싶다면, 최근 내가 꽂힌 곳은 따로 있다. 오모테산도 애플 스토어 맞은편 골목으로 들어가면 만날 수 있는 '필로코피(PHILOCOFFEA / フィロコフィア)'다.
가격은 좀 '깡패' 같다. 하우스 블렌드가 800엔, 스페셜티나 게이샤 같은 원두는 1,500엔을 호가하는데 그나마도 오후 늦게 가면 늘 'Sold Out' 딱지가 붙어 있다. 하지만 마스터가 원두의 향을 먼저 맡게 해 주고 드립 방식까지 영어로 세세하게 설명해 주니, 일본어를 몰라도 커피를 즐기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다.
그런데 이 집의 백미는 커피를 마시는 공간이다. 마주 보고 재잘대는 여느 카페의 분위기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큰 기둥 5개를 각각 두른 벤치만 덩그러니 놓여 있고, 아무런 치장이 없다. 그리고 그 가운데 대형 화분이 하나 놓여 있는데, 내가 간 날은 활짝 핀 목련이었다.
나는 감탄했다. '음… 고귀한 목련의 꽃말을 음미하며, 타인의 시선 대신 자신의 내면으로 침잠하여 커피의 짙은 향을 즐기라는 철학적 배치인가?' 역시 오모테산도는 다르구나 싶었다. 궁금증을 참지 못해 스태프에게 물었다. "공간 배치가 굉장히 독특한데, 특별한 의도가 있나요?"
돌아온 대답은 내 예상을 완벽하게 빗나갔다. "아, 거긴 이 건물의 '공용 공간'이라 여러 가지 이벤트를 해야 해서 그냥 비워둔 거예요."
ㅋㅋ 나 혼자 이 텅 빈 공간에 대해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던 거다. 꿈보다 해몽이라더니. 민망함을 달래 준 건 오늘 마신 에티오피아 아이스 드립이었다. 산미가 기가 막히게 좋았다. 그래, 커피만 맛있으면 됐지, 의미는 무슨.
- PHILPCOFFEA 오모테산도 점 https://maps.app.goo.gl/RJdkGkQ5DYa6SRDA6
- 랄프스 커프 오모테산도 점 https://maps.app.goo.gl/TuxWRhGU19mjAuHT8
이 외에도 출출한 오후 3시쯤이라면 '하라주쿠 교자로(Harajuku Gyozaro / 原宿餃子楼)'에서 군만두를 가볍게 먹거나, 캣스트리트의 '넘버 슈가(NUMBER SUGAR / ナンバーシュガー)'에서 150엔짜리 수제 캐러멜 하나를 입에 물고 당을 충전하기도 한다. 소금맛(No.2 Salt)의 단짠 조화는 쇼핑의 피로를 잊게 해 준다.
- 넘버 슈가 오모테산도 점 https://maps.app.goo.gl/xLXtvFhaXuRFgSgd7
그런데 결론적으로 말하면 , 도쿄 여행 중 밥 먹을 시간이 애매해지면 나는 그냥 마음 편하게 편의점(콤비니 / コンビニ)으로 향한다. 세븐일레븐(セブン-イレブン)이나 로손(ローソン)의 퀄리티 좋은 오니기리나 폭신한 타마고 산도(계란 샌드위치)에 음료수 하나를 곁들여도 1,000엔을 넘지 않는다. 하라주쿠에 온 목적은 '미식 탐방'이 아니라 '쇼핑' 아니던가. 차라리 식대를 아껴서 마음에 드는 로고가 박힌 반팔 티셔츠 하나를 더 건지는 것이 정신 건강에 이롭다. 말 그대로 가성비와 시간 절약에 있어서는 편의점이 '갑(甲)'이다.
도쿄는 5월부터 덥기 시작해 11월 중순은 되어야 선선해진다. 쇼핑도 결국은 체력전이다. 틈틈이 편의점에서 물을 사서 수분을 보충하고 당을 채워야 버틸 수 있다.
하라주쿠에서 식사부터 디저트까지 완벽하게 챙기려 애쓰지 말고, 딱 한 곳만 정해서 방문해 보기를 권한다. 내가 소개한 곳이 아니더라도 좋다. 이미 하라주쿠는 수많은 한국 여행자가 스쳐 지나간 곳이라, 누군가에게는 '인생 맛집'으로 기록된 가게가 무수히 많을 테니까. 그중 한 곳을 골라 도전해 보라. 어쩌면 당신에게도 인생 맛집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다음은 시부야로 넘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