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음의 파르코와 편안한 세이부
흔히들 시부야를 '일본 젊음의 거리' 혹은 '서브컬처의 성지'라고 부른다. 2024년 도쿄 거주를 시작했을 때 나 역시 그런 기대를 품었다. 일본의 젠지(Gen Z)들이 이끄는 패션과 음악, 그 펄떡거리는 에너지를 현장에서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가본 실상은 다르다. 냉정하게 말해 거기는 그냥 사람이 너무 많은 동네일 뿐이다. 도대체 일본 현지인은 어디 있나 싶을 정도로 중국인, 한국인, 서양인 관광객이 뒤섞여 있다. 특히 연말연시처럼 들뜨는 시즌에는 정작 일본 젊은이들은 고향으로 돌아가고, 거리에는 관광객과 나를 포함한 외국인 거주자들, 그리고 확성기를 들고 "멈추지 마세요! 앞만 보고 걸으세요! (止まらないでください!前へ進んでください!)"라고 소리치는 경찰들뿐이다.
시부야 상권은 역을 중심으로 몇 개의 축으로 나뉜다. 스크램블 스퀘어를 필두로 한 신축 빌딩군, 109를 중심으로 한 센터가이(Center Gai) 일대, 그리고 파르코(PARCO)를 중심으로 하는 북쪽 상권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 세 곳 다 저마다의 색깔이 있지만 나에게 가장 익숙한 곳은 파르코 인근이다.
-시부야 파르코 https://maps.app.goo.gl/zgGFu4dNxZLTu3CB8
혼자만의 에너지를 아껴야 하는 I(아이) 성향의 나에게는 낭비 없는 동선 안에 취향이 밀집해 있는 이 구조가 더할 나위 없는 안식을 선사한다. 명품부터 하이엔드 스트릿, 키덜트 문화까지 한 건물에서 해결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장소이기 때문이다.
파르코에 가면 가장 먼저 1층의 '포터 익스체인지(PX)'를 훑는다. 국방색 인테리어는 여전히 남자의 수집욕을 자극하지만, 가격표를 보면 묘한 배신감이 든다. 이제 포터에서 가성비라는 수식어는 사라진 지 오래다. 게다가 서울에 가면 포터를 든 사람과 안 든 사람으로 나뉠 정도로 흔해진 탓에 개성이 사라진 선택을 하는 것은 아닌가 싶어 구매욕이 식기도 한다.
요즘 한국인들에게 인기 있는 브랜드들이 대개 그렇다. 어제는 하라주쿠 단톤(Danton) 매장에 들렀는데, 그곳에서 마주친 풍경은 흡사 서울의 어느 편집숍 같았다. 곁에서 들려오는 한국 가족들의 대화는 헛웃음을 자아낼 만큼 흥미로웠다. "엄마, 단톤 이거 한국 상표야? 왜 다 한국 사람뿐이지??"라며 의아해하는 청년과, "요즘 우리 회사 부장님이 단톤 카디건을 입고 계신데 나도 이걸 입어야 하나"라며 진지하게 고민하는 직장인의 모습은 도쿄 한복판에서 한국의 유행 속도를 체감하게 한다. 사고 안 사고는 본인이 결정할 문제겠지만 말이다.
다시 파르코의 1층으로 돌아와서, 포터 매장 옆 '휴먼 메이드(HUMAN MADE)'는 작년 11월 리뉴얼을 거치며 매장이 'PART 1'과 'PART 2'로 분리되었다. 예전에도 테이크아웃 커피숍 마냥 좁아터진 공간이었는데, 리뉴얼 후에도 여전히 자투리 터에 가게를 낸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특히 의류 매장 한가운데 떡하니 버티고 있는 기둥은 쇼핑 내내 여간 거슬리는 게 아니다. 그런데도 토요일 오픈 시간인 11시가 되기도 전, 아침 9시부터 번호표를 받고 대기하는 인파를 보면 이 브랜드만의 특별한 마력이 있기는 한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이제 이 브랜드만큼은 '졸업'을 선언했다.
분위기를 바꿔 1층의 '케이스티파이(CASETiFY) 스튜디오‘로 향한다. 단순히 폰 케이스를 파는 곳이 아니라, 내 취향대로 커스텀할 수 있는 공간이다. 수만 가지 디자인 조합 속에서 나만의 케이스를 고르고 이니셜을 박다 보면, 폰 케이스 하나에 꽤나 진지해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늘 사람들로 북적이는 이곳을 보면, 획일화된 유행 속에서도 '남들과는 다른 나'를 표현하고 싶은 욕망은 거의 본능에 가깝다는 걸 새삼 느낀다. 그런데 여기는 가격이 만만하지 않다. 마음에 드는 걸 하나 고르면 만 엔이 훌쩍 넘어가고, 요새는 스웨트셔츠 한 벌도 3만 엔을 우습게 넘기는 시대라지만 폰 케이스 가격을 보면 놀랍다. 게다가 실지로 사용해 보면 좀 무겁다. 이쁘긴 한데, 무거운 귀여움을 원하시는 분만 추천한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본격적인 '남녀의 옷장'이 펼쳐진다. 옷 좀 입는다는 이들의 교복 같은 '이세이 미야케 옴므 플리세'와 해체주의 미학의 '준야 와타나베'가 시선을 잡는다. 여기에 다크 한 고딕 감성의 '언더커버(UNDERCOVER)', 하이엔드 힙합 무드의 ’ 앰부시(AMBUSH)'까지 더해지면 이곳은 디자이너의 철학을 입는 공간이 된다.
여기에 더해 여성 라인으로는 '꼼데가르송 걸(Comme des Garçons Girl)'이 아방가르드한 미학을 보여주고, 미니멀리즘의 정수인 '마가렛 호웰(Margaret Howell)'이 소재에 대한 일본 특유의 집착을 경험하게 한다. 특히 마가렛 호웰은 한국보다 훨씬 다양한 라인업과 현지 가격의 메리트가 있어 여성들에게 인기가 높다. 선뜻 지갑이 열리지는 않더라도 그들만의 멋을 응시하는 것만으로도 스스로의 스타일을 점검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파르코의 진짜 반전은 6층 캐릭터 존에 있다. 점잖게 옷을 구경하다가도 '닌텐도 도쿄'나 '포켓몬 센터'에 오면 어른의 체면은 잠시 내려놓고 아이처럼 즐거워진다.
이 외에도 파르코를 찾는 매력은 근처에 내가 가끔 들르는 베이프, 슈프림, 스투시 등이 짧은 동선 안에 다 모여 있다는 것이다.
-베이프 시부야 https://maps.app.goo.gl/2XFxHMKgBJeSaDtw7
특히 베이프(BAPE)는 매장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재미있다. 시부야의 베이프 입구 유리 바닥으로는 컨베이어 벨트에 신발이 계속 지나가고 있다. 인상적이다. 베이프의 유인원 디자인과 군대를 연상하는 카모 디자인, 그리고 그것을 표현하는 여러 현란한 색깔들을 입을 수는 없어도 보고 웃을 수는 있다. 그 외의 다른 매장들도 스트리트의 분위기를 느끼기에는 더없이 좋다. 다만 신제품이 드롭되는 토요일에 온다면 아침에 줄을 서지 않고서는 매장에 들어갈 수가 없다.
- 세이부 시부야 점 https://maps.app.goo.gl/XPYKV9cmNJf7w5sk7
번잡한 파르코를 뒤로하고 내가 가끔 서울에서 온 좀 나이가 있는 어른들을 안내하는 곳은 파르코와 시부야역 사이에 있는 '세이부(Seibu) 백화점'이다. 시부야라는 이름과는 참 안 어울리는, 낡고 어두운 건물이다. 주변엔 온통 신축 빌딩과 힙한 브랜드들이 가득한데, 그 사이를 가득 메운 젊은 인파 속에서 홀로 겉도는 세이부의 모습은 묘하게 나의 처지와 닮아 있어 동질감이 느껴진다. 무엇보다 가장 큰 매력은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시부야의 밀려드는 인파 속에서 유일하게 '어깨가 부딪히지 않는 공간'이다. 건물은 낡았어도 있을 건 다 있다. 한국 관광객이 즐겨 찾는 명품 브랜드부터 '꼼데가르송', '요지 야마모토', '비비안 웨스트우드'까지. 밀집한 관광객들 사이를 비집고 물건을 탐색하며 입어보기 위해 한참을 기다려야 하는 시부야의 다른 매장에 비하면 이곳은 천국이나 다름없다. 참고로 일본에서 옷을 사면 직원이 습관처럼 덧붙이는 경고가 있다.
返品・返金は承っておりません。(헨핀・헨킨와 후케타마왓테 오리마 센)
また、海外へ持ち出された後の修理対応はいたしかねます。
(마타, 카이가이에 모치다사레타 아토노 슈리 타이오와 이타시카네마스)
이걸 해석하면 "반품이나 환불은 불가능합니다. 또한 해외로 반출된 이후에는 수선 대응은 불가합니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관광객의 입장에서는 계산 전 물건에 흠이 없나 꼼꼼히 살피고 사이즈가 맞나 한 번은 꼭 입어봐야 하는데, 세이부는 그 한적함으로 이러한 과정을 아주 여유롭게 허락한다.
또한 세이부 백화점 A관과 B관은 뒤쪽의 '로프트(Loft)', '무인양품(Muji)' 건물과 구름다리로 연결된다.
무인양품의 경우야 한국에도 제법 큰 매장이 있고 긴자도 더 큰 매장이 있어서 시부야에서 굳이 시간 소비할 이유는 없는데, 시부야 로프트(Loft)는 규모가 제법 커서 체감상 도쿄 최대급 매장으로 느껴진다. 문구류에 강점이 있고 여러 생활 아이디어 상품이 많기 때문에 일본의 과자 외에 여행 선물이 필요하거나, 다양한 아이디어 문구류 등을 사려고 하면 시부야 로프트가 꽤 괜찮다.
- 시부야 로프트 https://maps.app.goo.gl/LpuJTYdkgh6ALJUJ9
- 핸즈 시부야 점 https://maps.app.goo.gl/BvBJVcDCjc5yuW2r7
그런데 여기가 번잡해서 정신이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오르간 자카(オルガン坂) 거리를 따라 좀 더 올라가면 '도큐핸즈'(현재는 ‘HANDS’로 이름이 바뀌었다)’라는 곳이 있다. 메이드 인 차이나를 많이 만나기도 하지만 우리랑 좀 다른 디자인의 생활용품들을 만나는 재미가 있는 곳이다. 그래도 거주민의 입장에서는 잘 안 가는 곳이기는 하다.
- KITH 도쿄 https://maps.app.goo.gl/hkEfDpEFdvgAeP988
날이 좋은 날에는 옥상에 공중 공원이 있는'미야시타 파크(Miyashita Park)'로 향한다. 이곳 1층에는 신발 마니아들의 성지인 '키스(KITH)'가 있다. 원래 신발 편집 숍으로 시작한 브랜드답게, "네가 뭘 좋아할지 몰라서 다 준비했어" 수준으로 요즘 유행하는 스니커즈는 죄다 모여 있다. 의류 라인업 역시 디자인이 강렬해서 구경하는 맛이 일품이다.
이곳 2층의 아이스크림 매장인 'KITH TREATS'가 너무 맛있어서 서울에서 오는 친구들에게 입이 마르도록 추천하곤 했다. 그런데 최근 30대 초반의 젊은 후배가 바로 한국 사이트를 보여주며 성수동에도 매장이 있다고 한다. 그래, 맛있긴 하니 성수동에 가든가, 아님 도쿄에 와서 시간 되면 들르시든가. 선택은 자유다.
여행자 시절엔 밤늦게까지 쇼핑하고 싶은 욕망에 센터가이 한복판의 '메가 돈키호테(MEGA Don Quijote)'를 자주 찾았다. 신오쿠보나 신주쿠점은 미로 같은 진열과 인파 때문에 들어가는 순간 폐쇄 공포증이 올 지경인데, 시부야점은 규모도 크고 정돈이 잘 되어 있어 한두 시간쯤은 쾌적하게 버틸 수 있기 때문이다.
- 메가 돈키호테 시부야 본점 https://maps.app.goo.gl/UyNdRuHQAQxNHnDH6
하지만 요즘은 굳이 갈 이유를 못 느낀다. **'올리브영'**으로 대표되는 K-뷰티가 워낙 강세인 데다, 돈키호테의 소소한 잡화나 과자들도 이제는 한국 편의점이나 온라인에서 쉽게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굳이 무거운 짐을 늘려가며 땀을 뻘뻘 흘릴 필요가 없어졌다. 일본에 살다 보니 한국의 유통 시스템이 얼마나 대단한지 역으로 체감하게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돈키호테가 여행자들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일본의 '조기 폐점 문화' 때문이다. 한국과 달리 일본은 저녁 8시~9시가 되면 백화점이고 쇼핑몰이고 얄짤없이 셔터를 내린다. 한창 에너지가 넘치는 여행객들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다. 이 야속한 밤 시간에 갈 곳 잃은 영혼들을 구제해 주는 유일한 곳이 바로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 돈키호테다. 물건을 사지 않더라도 밤늦게까지 깨어있는 '심야 놀이터'로서의 가치는 여전히 유효하다.
대신 '이케아(IKEA) 시부야'는 가끔 들른다. 물론 인터넷으로 주문해도 되지만, 500엔 이상 하는 배송료가 묘하게 얄미워서 시부야나 하라주쿠에 갈 일이 있으면 겸사겸사 들르게 된다. 이곳은 전형적인 '도심형 매장'이라 대형 가구보다는 생활 소품 위주로 콤팩트하게 진열되어 있어 가볍게 훑어보기 좋다. 여기 또한 한국에서 온 관광객이 굳이 가구를 사러 들를 이유는 없어 보인다. 다만 쇼핑에 지쳐 당이 떨어졌을 때, 1층에서 50엔짜리 소프트아이스크림 하나 사 먹는다면 그거야말로 '가성비 최고의 선택'이 될 것이다.
- 이케아 시부야 점 https://maps.app.goo.gl/E3Y7McpptdAXa7b2A
오늘 늘어놓은 루트는 거대 괴물 같은 시부야 상권의 100분의 1도 되지 않을 것이다. 이곳은 매 시즌 문을 닫고 새로 여는 가게가 즐비해 다닐수록 늘 헷갈리는 곳이다. 그렇기에 전략이 필요하다. "그냥 구경 한번 가볼까?" 하고 덤벼서는 하루 2만 5천 보를 족히 넘기며 멘탈이 바스러지기 십상이다.
스크램블 교차로에서 한 번 치이고, 끝이 안 보이는 동선에 두 번 치인다. 확실한 타깃 브랜드를 정해두고 '치고 빠지는(Hit and Run)' 작전으로 접근해야 그나마 멘탈을 지킬 수 있다. 아무 생각 없이 왔다가는 결국 본 거라고는 수만 명의 앞사람 '뒷모습' 밖에 없을 수도 있다는 것, 그것이 화려한 시부야 투어의 가장 큰 맹점임을 잊지 마시길 바란다.
(다음은 시부야의 맛 편으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