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먹긴 먹어야지
시부야(渋谷)를 '무얼 먹어야겠다'는 생각으로 간 적은 없다. 하라주쿠(原宿)가 산책하며 뭘 살까 구상도 하는 쇼핑 전 단계의 '산보'를 즐기는 곳이라면, 시부야는 대략 무엇을 사기 위해 전투적으로 가는 곳이다. 동선도 주로 파르코(PARCO) 주변에 머무는 편이다. 따라서 먹는 것 역시 파르코 주변에서 대략 해결하곤 한다.
가장 많이 찾는 곳은 파르코 근처의 '셰이크쉑(Shake Shack)'이다. 그냥 아는 맛이다. 가끔 시즌 한정 음료 같은 신상에 도전해 보기도 하지만, 결국 항상 주문하는 것은 시그니처인 '쉑 버거(ShackBurger)'다. 실패 없는 맛과 속도, 그것만으로도 빡빡한 시부야 일정에서는 충분하니까.
- 셰이크 쉑 시부야 https://maps.app.goo.gl/9YGbxZHZGb2bPiXU7
물론 셰이크쉑 맞은편 골목에는 신주쿠(新宿)에 본점을 둔 '쇼군 버거(SHOGUN BURGER)'가 있기는 하다. 일본 전국 버거 대회(Japan Burger Championship)에서 우승했다고 자랑이 대단하고, 실제 타베로그(食べ ログ) 평점도 3.6점 대를 기록할 만큼 현지인들에게 "와규의 육향이 뇌를 때린다"는 호평을 받는 곳이다. 시부야점은 아직 가보지 못했지만, 신주쿠 본점에서 한 시간을 기다려 들어가 본 적이 있다. 하지만 한 시간을 기다린 것치고 나에게는 기대보다 아쉬운 경험이었다. 아직 내가 햄버거의 깊은 맛을 모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햄버거 빵(번)에 찍어 놓은 일본도 모양의 낙인은 꽤 멋있었지만, 이런저런 시도 끝에 결국 시부야의 빡빡한 일정 속에서는 '웨이팅 없이 바로 먹을 수 있는 아는 맛'인 셰이크쉑으로 발길이 향하게 된다.
-쇼군 버거 시부야 https://maps.app.goo.gl/g3Y3C5auMXghDgc86
식사를 대충 해결하고 파르코에 가면 가끔 3층 외부 테라스 쪽에 있는 '토라헤비 커피(トラヘビコーヒー, Torahebi Coffee)'에 들른다. '사이언스 커피'를 모토로 하는 이 가게는 마치 과학 실험실 같은 브랜딩을 통해 원두에서 과일 향이나 사케 향 등을 만들어 내는 재미있는 곳이다. 커피 맛 또한 짙고 강해서 아침이나 나른한 오후에 아이스로 한 잔 마시면 각성 효과가 거의 100%에 달하곤 한다.
이 가게의 숨은 묘미는 여성 스태프의 안내 멘트다. '솔'과 '라'를 오가는 특유의 하이톤으로 정말 길고 정성스럽게 커피를 설명해 주는데, 듣다 보면 그 지극한 친절함에 슬슬 기분 좋은 웃음이 새어 나온다. 주문 후 커피를 직접 받을 때까지 제법 시간이 걸려 인내심이 필요하지만, 기다리는 동안 지루하지 않게 새로 나온 커피를 시음하게 해 주거나 자체 블렌딩한 원두 향을 맡게 해주는 등 나름의 퍼포먼스가 있어 즐겁다. 이치고(딸기) 향이 나는 커피가 추천 메뉴(오스스메)이고, 멜론, 바나나, 사케 등 다양한 향을 자랑하지만 가격은 한 잔에 1,300엔 정도로 꽤 사악한 편이다.
- 토라헤비 커피 https://maps.app.goo.gl/9GgT7Afwb48GV2iq5
커피 외에 가끔 달달한 티가 땡기는 날도 있다. 파르코 옆, 시부야 이케아(IKEA) 쪽으로 내려가는 좁은 골목길은 내가 애정하는 거리인데 이름도 낭만적인 '스페인 자카(スペイン坂)'다. 그런데 이 이국적인 골목 한가운데 묘하게 안 어울리는 '공차(Gong cha)'가 있다. 한국 사람들도 다 아는 그 밀크티 가게다. 최근 도쿄 시내에서 이 가게가 점점 늘어나는 게 눈으로 보일 정도로 인기가 높다. 긴자(銀座), 도쿄역(東京駅), 시부야, 하라주쿠 등 가는 곳마다 공차와 눈이 마주친다. 사실 나에게는 한국에서 익숙하게 먹던 맛이기에 타지에서 만나면 더 반갑기도 하다.
하지만 시부야 투어에서 가장 많이 가는 쉼터는 결국 세이부(西武) 백화점 바로 옆 '올리브(Olive)' 건물의 스타벅스와 파르코 5층의 스타벅스다. 아무래도 세계 어디를 가도 낯설지 않은 맛이니까. 최근 일본 스타벅스의 인기가 예전만 못하다거나 커피 맛이 좋지 않다는 악평이 들리기도 하지만, 일본의 오래된 킷사텐(喫茶店, 다방)에서 예기치 않게 '보리차 태운 것 같은' 밍밍한 커피 맛에 당황한 경험이 있는 분들이라면 안전빵으로 스타벅스를 찾는 것이 진리다.
-스타벅스(올리브 라운지 시부야) https://maps.app.goo.gl/mNnkzWdq69egpxvW9
문제는 주말의 시부야다. 돌아다니다 보면 잠시 쉴 공간을 찾기가 하늘의 별 따기다. 주말 스타벅스는 커피를 주문하고 픽업하는 데 최소 20분이 걸리는 데다가, 자리를 잡는 건 10명이 의자 하나를 두고 벌이는 '의자 뺏기 게임' 수준이다.
이럴 때 숨겨둔 비장의 카드가 있다. 세이부 옆 스타벅스 1층에는 내 통장이 있는 미쓰이스미토모은행(三井住友銀行, SMBC)이 함께 있는데, 은행 직원에게 SMBC의 올리브 카드를 보여주면 프라이빗 뱅크 에리어를 휴식 공간으로 내어준다. 한국에 있을 때 프리미엄이니 VIP니 하며 여러 카드를 써보았지만, 주말 시부야 한복판의 이 공간만큼 카드의 혜택을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절실하게 느낀 적은 없었다. 만약 이마저도 여의치 않을 때는 같은 건물 2층에 있는 '셰어 라운지(SHARE LOUNGE)'로 올라갈까 심각하게 망설이게 된다. 주말의 시부야 인파에 치여 체력이 바닥날 때면, 차라리 돈을 내고서라도 쉴 곳을 찾고 싶어지는 탓이다.
이곳은 츠타야(TSUTAYA)가 전개하는 코워킹 스페이스인데, 시간당 요금(60분 기준 약 1,870엔)을 내면 내부의 각종 스낵과 음료가 무제한이다. 심지어 알코올 플랜도 있다. 딱 한 번 핸드폰 배터리가 나가버려서 하는 수 없이 올라가 충전 겸 휴식을 취한 적이 있는데, 쾌적함은 최고였지만 가격은 정말 헬(Hell)이었다.
가끔은 시부야에 나올 때 너무 먹는 것에 신경을 안 쓴다는 자각이 들어 몇 곳을 예약해 본 적도 있다. 나는 주로 일본 식당 예약 사이트인 타베로그를 이용하는데, 대략 평점 3.5 정도 수준에서 1인당 3,000엔을 넘지 않는 런치 타임을 찾으려 노력한다.
일본식 아침 겸 점심을 먹을 요량으로 예약했던 곳은 시부야 스트림(渋谷ストリーム) 3층의 '마루 벤가라(圓 弁柄)'였다. 미소 된장, 튀김, 생선구이 등 정갈한 반찬을 솥밥과 함께 제공하는 곳이다. 밥맛도 좋았고 가격도 런치 정식 기준 2,000엔에서 3,000엔 사이로 크게 부담스럽지 않았다. 관광객이 굳이 황금 같은 시간을 쪼개어 예약까지 하고 갈 집은 아닌지만 시부야에서 정성스러운 맛밥을 느낄 수 있는 괜찮은 가게였다.
-마루 벤가라 https://maps.app.goo.gl/Uus5wrdpvcah1F3d8
그런데 타베로그 예약 없이 구글 맵으로 쉽게 당일 예약도 노려볼 만한 든든한 곳이 있다. 바로 '모모 파라다이스(モーモーパラダイス)'라는 샤부샤부 가게다. 도쿄 여러 곳에 지점이 있고, 시부야에도 센터가이(センター街)와 공원거리(公園通り) 두 곳에 지점이 있다. 시부야를 걷다가 구글로 당일 예약에 두 번이나 성공한 곳이기도 하다. 특히 공원거리 지점은 운이 좋으면 8층 창가에 앉아 시부야의 번잡한 거리를 내려다보며 샤부샤부를 먹는 호사를 누릴 수 있다.
- 모모 파라다이스 공원거리 점 https://maps.app.goo.gl/jxNi1RnhdLHzsuLn9
이 집의 최고 장점은 다베호다이(食べ放題, 무한리필)라는 것이다. 채소나 면 등은 뷔페식으로 직접 가져오고, 고기는 요청하는 대로 계속 가져다준다. 단, 착석 후 100분이라는 시간제한이 있다. 1인분 가격은 고기 등급에 따라 대략 3,000엔대 후반에서 7,000엔대까지 형성되어 있는데, 구글 평점 4점대 후반대를 굳건히 유지할 만큼 가성비로 보나 맛으로 보나 현지인과 관광객 모두에게 인정받는 곳이다.
한국 분들에게는 '무한리필'이라는 말이 익숙하지만, 일본에서는 누구나 아는 상식적인 단어가 바로 '다베호다이'다. 아마 종업원은 필시 친절한 미소로 "다베호다이입니다"라고 거듭 설명했을 테지만, 그 단어가 낯선 한국인 관광객 입장에서는 종업원이 가져다주는 고기가 무제한이라는 뜻으로 온전히 전해지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간혹 이 언어의 간극 때문에 본의 아니게 무한리필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경우를 보게 되는데, 이 역시 문화 차이지 않겠는가.
처음 직원이 세팅해 주는 고기 4판(아주 얇고 적은 양이다)만 멍하니 바라보며, 고기가 끝인 줄 알고 채소만 주야장천 가져다 먹는 분들이다. 일전에 갔을 때 젊은 한국인 친구들이 옆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여행 와서 이렇게 비싼 집에 데려와서 한 끼에 5000엔이나 내는 게 말이 되냐"며 예약한 친구를 심하게 나무라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계속 풀만 먹고 있길래, 끼면 안 될 거 같기도 했지만 안타까운 마음에 이 집의 시스템을 살짝 설명해 주었다. 그 뒤로 그 친구들은 대화 없이 고기와의 전투를 즐기고 있었다.
모모 파라다이스가 가벼운 마음으로 갈 만한 곳이라면, '히키니쿠 토 코메(挽肉と米)'는 예약 전쟁을 치러야 하는 곳이다. 최근 도쿄 도처에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히키니쿠(挽肉)'란, 쉽게 말해 갓 다진 소고기를 숯불에 구워 쌀밥 위에 얹어 먹는 일본식 숯불 함박스테이크를 뜻한다. 시부야의 또 다른 느낌인 러브호텔들이 모여 있는 도겐자카(道玄坂) 언덕의 허름한 골목길에 위치한 이곳이 바로 그 유행의 진원지다.
이 가게의 예약 시스템은 자주 바뀌는 편인데, 최근 기준으로는 전용 웹사이트(TableCheck)를 통해 매주 금요일에 다음 주 예약을 오픈한다. 아니면 아침 9시에 매장으로 뛰어가 번호표를 받고 지정된 시간에 다시 와야 하는데, 이마저도 일찍 간다고 무조건 된다는 보장이 없다. 예약하기 힘든 것도 문제지만, 이 가게의 상술이 헛웃음을 짓게 만든다. '히키니쿠 토 코메 정식'의 원래 가격은 1,820엔인데, 사전에 인터넷 예약을 하려면 '우선 안내권(Advance Priority Ticket)' 명목으로 1인당 예약 수수료 1,000엔을 더 받는다. 결국 한 끼에 2,820엔이 되는 셈이고, 예약 시 카드로 전액 선결제를 해야 한다. 여기서 밥을 먹을 때마다 옆자리 사람들에게 묻고 싶었다. "혹시 수수료 안 내고 1,820엔에 드시는 분 계신가요?"
- 히키니쿠 토 코메 시부야점 https://maps.app.goo.gl/1L1buH9bsn2vB6T96
그래도 이 식당은 유니크하다. 직원들이 고기를 다지고 굽고 서빙하고 밥을 짓고 안내하는 등 분업화가 기가 막히게 되어 있다. 눈앞에서 숯불에 구워지는 고기를 보는 퍼포먼스도 훌륭하다. 재미있는 건 이 가게의 입구 문에 '1129'라는 호수 같은 번호가 적혀 있고, 직원들의 모자에도 경매사 번호표처럼 '1129'가 크게 쓰여 있다는 점이다. 물어보니 일본어 고로아와세(숫자 말장난)로 '이이니쿠(いい肉, 좋은 고기)'를 뜻한다고 한다. 여러모로 위트가 넘치는 곳이다.
도저히 예약에 실패했는데 죽어도 히키니쿠를 먹어야겠다는 분은 핸즈(HANDS) 부근의 '히키니쿠 노 토리코(挽肉の トリコ)'를 트라이해 보는 것도 좋을 거 같다. 이곳은 장어덮밥인 히츠마부시(ひつまぶし)를 먹는 방식처럼 히키니쿠를 네 번에 걸쳐 다양한 변형을 주며 먹을 수 있게 해 두었다. (아, 히츠마부시 먹는 법은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설명할게요) '히키니쿠 토 코메' 쪽이 워낙 대히트를 쳐서 그렇지, 이곳도 충분히 평타 이상은 하는 훌륭한 가게이다.
-히키니쿠노 도리고 https://maps.app.goo.gl/Y1G8GiNkLoyCFVfD9
또 최근에 애정하게 된 디저트 가게가 있다. 미야시타 공원(宮下公園) 쪽에 있는 힙한 편집숍 KITH가 운영하는 '키스 트리트(KITH TREATS)'다. 아이스크림에 시리얼과 견과류를 듬뿍 넣고 기계로 꾸덕하게 섞어주는데, 그 진한 미국 자본주의의 맛이 정말 압권이다. 너무 맛있어서 최근 서울에서 오신 지인에게 자랑스레 소개했더니, 그분이 아주 친절하게 한국 성수동에 있는 매장 사진을 보여주셨다. 실내 인테리어마저 거의 똑같았다. 도쿄 한복판에서 성수동의 위엄을 또 한 번 느꼈다.
-키스 트리트 도쿄 https://maps.app.goo.gl/CJb2sBvc72h7a7dB9
시부야는 말도 못 할 정도로 역을 중심으로 쇼핑과 먹거리 가게가 360도로 빼곡히 자리 잡고 있다. 내가 들른 이 몇몇 안 되는 식당이나 커피숍들이 시부야의 미식을 대표한다고 할 수는 없다. 단지 거대한 미로 속에서 내가 직접 부딪히며 만난 가게들 중, 최소한 누구를 데려가도 부끄럽지 않은 곳들을 골라 소개했을 뿐이다.
이전 하라주쿠 편에서도 말했지만, 굳이 한 끼 식사에 목숨 걸 사람이 아니라면 나는 여전히 일본의 '편의점'을 이용할 것을 강력히 권하고 싶다. 짧은 여행에서 우리의 시간은 웨이팅 줄에서 허비하기엔 너무 아까우니까.
아, 겨울에 일본을 여행하다 보면 편의점이나 슈퍼 계산대 앞쪽에 영락없이 놓여 있는 기계가 하나 있다. 바로 '야키이모(焼き芋, 군고구마)' 보온 기계다. 겨울의 일본인들은 군고구마에 진심이다. 한국 길거리에서 보던 것보다 몸집이 훨씬 크고 실하다. 전열기 위에 돌을 깔아놓고 굽는 방식인데, 옛날 드럼통 장작불에 그을린 맛까지는 아니더라도 당도 하나만큼은 기가 막힌다. 큰 것 하나에 대략 200~400엔 전후인데 혼자 다 먹기엔 양이 제법 벅차다. 편의점에서 오니기리와 타마고 샌드위치만 찾지 말고, 이 뜨끈한 군고구마도 훌륭한 구황작물 한 끼가 될 수 있음을 꼭 기억해 주시기 바란다.
(다음은 긴자로 넘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