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여행가이드 7]
긴자(銀座), 우아한 건축 박물관

by 하임

도쿄를 찾는 여행자들에게 '긴자(銀座)'는 과연 어떤 매력으로 다가올까? 미츠코시(三越)와 마츠야(松屋) 같은 유서 깊은 대형 백화점부터 긴자 최대 규모의 긴자 식스(GINZA SIX) 같은 복합 쇼핑몰들이 묵직하게 중심을 잡고 있고, 에르메스, 샤넬, 루이뷔통 같은 세계적인 하이엔드 브랜드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다. 여기에 까르띠에, 티파니, 불가리, 롤렉스 등 '좀 있는 사람들'의 기본 소양이라는 보석과 시계 브랜드들이 거대한 건물 하나씩을 통째로 차지하고 위용을 뽐낸다.

Gemini_Generated_Image_ek3ugzek3ugzek3u.png <긴자 팝아트> Gemini 제공

심지어 우리에게 만만한 ZARA나 유니클로조차 이곳에서는 거대한 플래그십 스토어로 존재감을 과시한다. 소니(SONY)는 자사 제품과 철학을 전시하는 건물을 가지고 있고, 100년 전통의 문구점 이토야(伊東屋)도 이 화려함 속에서 당당히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이 거대한 쇼룸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돈' 이야기부터 하고 넘어가야 한다. 긴자는 자본주의가 보여줄 수 있는 가장 화려하고 무엇보다 '가장 비싼' 쇼룸이기 때문이다. 일본 국세청이 매년 발표하는 '노선가(路線価, 도로변 땅값)'에서 40년 가까이 부동의 1위를 지키고 있는 곳이 바로 여기다. 긴자 4초 메(4丁目) 교차로 바로 옆, 전통 향·문구점인 '큐쿄도(鳩居堂, Kyukyodo)' 앞이다. 이곳의 땅값은 1제곱미터(㎡)당 약 4,400만 엔. 알기 쉽게 평당(3.3㎡) 가격으로 환산하면 약 1억 4,600만 엔, 한국 돈으로 무려 13억 3천만 원에 달한다.

IMG_5673.heic <다사키 빌딩과 큐쿄도 빌딩>

감이 잘 안 오신다면 한국을 떠올려 보자. 한국에서 가장 비싸다는 명동 네이처리퍼블릭 부지의 땅값이 평당 약 5억 8천만 원 수준이다. 긴자는 명동보다 2배 넘게 비싼, 그야말로 자본주의의 정점이 찍힌 땅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건, 이 천문학적인 땅 위에서 파는 물건이다. 명품 가방도, 다이아몬드도 아니다. 고작 엽서, 붓, 향 같은 문구류를 파는 가게가 일본 땅값 1위를 40년째 지키고 있다. 엽서 한 장 크기의 땅값이 수천만 원이라는 이 기막힌 모순. 거대 자본과 전통의 이 기묘한 동거를 구경하는 것, 그것이 긴자 여행의 시작이다.


자본이 쌓아 올린 건축 갤러리


긴자의 메인 스트리트인 '주오도리(中央通り)'와 그 교차로들을 걷다 보면, 건물들이 약속이나 한 듯 스카이라인을 맞추고 2열로 열병식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6~7층 높이로 키를 맞춘 이 건물들은 제각기 브랜드의 고유색과 독특한 외장재(파사드)를 입고 있다. 이 길을 걷다 보면 굳이 매장 안으로 들어가 지갑을 열지 않아도, 건물 자체를 감상하는 것만으로 훌륭한 '건축 투어'가 된다. 긴자의 거리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건물 여섯 곳만 꼽아 보자.

첫째는 긴자 4초메 교차로의 터줏대감, '세이코 하우스 긴자(구 와코 백화점 / SEIKO HOUSE GINZA)'다. 1932년에 지어진 르네상스 양식의 이 고풍스러운 건물은 옥상에 세워진 시계탑으로 유명하다. 매 정각마다 긴자 거리에 울려 퍼지는 웨스트민스터 종소리는 이 화려한 거리에 기품을 더해 준다. 하지만 나는 아직 저 건물 안으로 들어가 본 적은 없다. 지나가면서 곁눈질로 1층 시계 매장만 슬쩍 구경할 뿐이다.

둘째는 그 대각선 맞은편에 자리한 '긴자 플레이스(銀座プレイス)'다. 1층에 닛산 크로싱(NISSAN CROSSING)이 자리한 이 건물은 일본의 전통 공예인 '스카시보리(투각)'를 모티브로 한 새하얀 격자무늬 외관이 압도적이다. 고전적인 시계탑과 미래지향적인 긴자 플레이스가 사거리를 마주 보고 서 있는 모습은 전통과 첨단이 공존하는 도쿄의 오늘을 그대로 보여준다. 재미있는 건, 건물 맨 위에 'SAPPORO'라고 적혀 있어서 나는 오랫동안 이 외관이 삿포로 맥주의 하얀 거품 형상인 줄 알았다. "역시 일본은 나마비루(生ビール/생맥주)의 나라!"라며 혼자 극찬을 했었는데, 행여나 남들 앞에서 아는 척했으면 큰일 날 뻔했다. 가끔 한쪽으로 치우쳐 생각하다 보면, 혼자 짐작한 것도 어딘가에서 들은 정확한 정보처럼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이래서 늘 자기 검증이 필요하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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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코 하우스 긴자와 긴자 플레이스

셋째는 건축가 렌조 피아노가 설계한 '메종 에르메스(メゾンエルメス)'다. 가로세로 45cm의 특별 제작된 유리블록 1만 3천 개로 건물을 통째로 감쌌다. 낮에는 햇빛을 반사해 은은하게 빛나고, 오후 5시 반 이후 해가 지면 건물 전체가 거대한 '랜턴(Lantern)'처럼 황금빛으로 타오른다. 그런데 사실 두 동으로 이루어진 이 건물은 소니(SONY) 공원 부지를 앞장세우고 길 안쪽으로 살짝 숨어 있다. 이 건물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곳은 맞은편 도큐 플라자 긴자(최근 중국 자본에 팔렸다) 건물인데, 특히 10층 츠루동탄 식당 창가석에 앉으면 온전히 감상할 수 있다. 메인 거리에서 한 발짝 안쪽으로 물러난 이 배치에서는 묘하게 "우리는 우리를 숨길 테니, 살 사람만 찾아오시오"라는, 뜨내기를 사절하는 특유의 시크함이 느껴진다.

넷째는 세계적인 건축가 이토 도요(伊東豊雄)가 설계한 '미키모토(MIKIMOTO)' 빌딩이다. 가장 파격적이고 독특한 외관을 자랑하는 이 건물은 이음새 없이 매끈하고 화사한 핑크빛 외벽에 마치 흩뿌려진 진주알이나 바닷속 기포를 연상케 하는 불규칙한 창문들이 뚫려 있다. 세계 최초로 진주 양식에 성공한 일본 대표 주얼리 브랜드의 정체성을 그야말로 우아하면서도 예술적으로 시각화한 훌륭한 작품으로, 걷다 보면 절로 시선을 빼앗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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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종 에르메스와 미키모토


다섯째는 마츠야(松屋) 백화점 측면에 찰싹 붙어 있는 거대한 '루이뷔통(Louis Vuitton)' 매장이다. 사실 시각적인 압도감만 놓고 보면 이곳이 단연 최고다. 건물의 외벽 전체가 브랜드의 시그니처 패턴으로 거대하게 뒤덮여 있어서, 200m 밖에서 걷다가 각도만 살짝 맞아떨어져도 저곳이 어느 브랜드 가게인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다. 자본주의 쇼룸의 끝판왕다운 자기주장이 확실하게 빛을 발하는 곳이다.

마지막 여섯째는 긴자의 콧대 높은 럭셔리들 사이에서 최근 아시아 최대 규모로 새롭게 문을 연 플래그십 스토어, '티파니 긴자(Tiffany Ginza)'다. 일본의 건축가 아오키 준(青木淳)이 외관 설계를 맡은 이 건물은 길거리에서 단연 압도적인 존재감을 뿜어낸다. 건물 전체가 3차원으로 굽어진 반투명 유리 패널로 부드럽게 감싸져 있으며, 외벽은 브랜드의 상징인 영롱한 '티파니 블루'에서 하얀색으로 자연스럽게 그라데이션되어 있다. 건축가는 티파니 아카이브에서 발견한 '부드러운 바람에 흔들리는 등나무 꽃'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하는데, 딱딱하고 각진 긴자의 빌딩 숲 사이에서 유독 혼자만 우아하고 유려한 곡선을 뽐내고 있다. 거대한 티파니 블루 보석함 하나가 긴자 한복판에 툭 떨어져 있는 것 같은 이 건물을 보고 있으면, 굳이 매장 안에 들어가 지갑을 열지 않아도 이미 자본주의가 선사하는 가장 달콤하고 비싼 선물을 눈으로 풀어본 듯한 묘한 포만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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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자 루이뷔통과 티파니 빌딩


세상에서 가장 비싼 아스팔트 위의 휴식


긴자 1초 메부터 8초 메까지 이어지는 이 주오도리는 주말 낮이 되면 '보행자 천국(歩行者天国)', 줄여서 '호코텐(ホコ天)'으로 변신한다. (매주 토·일요일, 공휴일) 왕복 4차선의 도로에서 차가 사라지면, 그 자리는 사람들의 무대로 채워진다.

여름이나 가을, 도로 한가운데에는 파라솔과 비치 의자가 놓인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13억짜리 땅덩어리 위에서 한가롭게 멍을 때리는 경험은 꽤나 짜릿하다. 거리는 반려견을 자랑하러 나온 현지인들의 런웨이가 되기도 하고, 간단한 퍼포먼스를 하는 예인들이 흥을 돋우기도 한다. 하지만 최고의 볼거리는 역시 아스팔트 바닥에 주저앉거나 대자로 드러누워 '인생샷'을 건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전 세계 관광객들이다.

IMG_0496.HEIC 차 없는 긴자 거리

하지만 긴자를 갈 때마다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풍경이 있다. 루이뷔통, 에르메스, 샤넬, 미우미우 매장 앞에 길게 늘어선 줄이다. 재미있는 건 그 줄에 서 있는 사람 중 '현지인'은 거의 없다는 점이다. 대부분이 중국인이고 한국인 관광객이다. 흔히들 말한다. "엔저에 면세(Tax Free)까지 받으면 비행기값이나 호텔비가 빠진다"라고. 틀린 말은 아니다. 수학적으로는 이득일 수 있다. 소비는 개인의 취향이고, 본인이 사겠다고 결심했다면 사는 게 맞다. 그들의 소비 덕분에 일본 경제도 돌아가고, 본인들의 여행 만족도도 올라갈 테니까. 다만, 여행지에서의 그 귀한 시간과 체력을 몇 시간씩 길바닥에 버려가며 '쇼핑'에 올인하는 모습이, 거주민의 눈에는 그저 치열한 '전투'처럼 보여 조금 안타까울 때가 있다.


현지인들이 긴자를 소비하는 방식: 격식과 밤의 사교장


그렇다면 과연 일본인들에게 긴자는 어떤 의미일까?

첫째는 '어른의 거리'이자 '격식(格式)'이다. 역사적으로 긴자는 서구 문물을 가장 먼저 받아들이는 '하이칼라'의 상징이었다. 시부야나 하라주쿠가 '젊음, 유행'이라면, 긴자는 '전통, 신뢰'를 상징한다. 일본인들은 부모님께 드릴 귀한 선물을 사거나 인생의 중요한 날에 격식 있는 식사를 대접해야 할 때 긴자를 찾는다. 백화점 포장지에 찍힌 '긴자(GINZA)'라는 두 글자는 내용물을 보기도 전에 상대방에게 "당신을 이만큼 존중합니다"라는 메시지를 은연중에 전달한다.

둘째는 '밤의 비즈니스', 즉 접대(接待, Settai)의 거리다. 해가 지고 나미키도리(並木通り)나 긴자 8초 메 골목으로 들어서면 낮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검은색 세단들이 줄지어 서고, 그 사이로 우아한 기모노를 차려입은 '마마'나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여성들이 바쁘게 움직인다. 골목 곳곳에는 이 '출근 룩'을 위한 화려한 의상실들이 불을 밝히고 있다. 건물들을 자세히 보면 층마다 깨알 같은 글씨로 가게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는데, 십중팔구 '클럽(Club)'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음악에 맞춰 춤추는 클럽이 아니라, 기업의 임원들이 고가의 술을 마시며 은밀한 비즈니스를 논하는 사교장이다. 하룻밤 술값으로 평범한 회사원 월급이 우습게 날아가는 일본 경제의 이면이 돌아가는 현장이다.

당연히 관광객인 우리가 저 세계에 발을 들일 일은 없다. 대부분 '회원제(이치겐산 오코토와 리 / 일견객 거절)'로 운영되는데 一見さんお断り(이치겐산 오코토와리)라는 말이 있다. 고객의 소개가 없는 뜨내기 손님은 거절한다는 뜻이다. 게다가 여기는 내 돈 내고 가기엔 너무나 비현실적인 가격대다. 그저 기모노를 입고 총총걸음으로 사라지는 여성들이나, 검은 차에서 내리는 양복 입은 아저씨들을 보며 "아, 일본 드라마에서 보던 접대 장면이 저기서 벌어지는구나" 하고 구경이나 하면 그만이다. 철저하게 '그들이 사는 세상'이니까.

사실 냉정하게 말해서, 쇼핑을 뺀다면 긴자는 일반 관광객에게 참할 게 없는 동네다. 눈에 보이는 건 죄다 명품관 아니면 백화점이고, 건물 위층은 엄두도 못 낼 비싼 클럽들이 차지하고 있다. 기껏 화려한 불빛에 이끌려 왔지만, 막상 걷다 보면 "여기서 내가 마음 편히 들어갈 수 있는 가게가 몇 군데나 될까?" 묘한 소외감이 들기도 한다. 대부분의 문턱은 내 지갑 사정으로는 넘기기 힘들거나 심리적으로 부담스러운 곳들뿐이니까.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 하나. 도쿄 여행만 무려 28번을 찍고, 최근 1년 넘게 이 비싼 동네 긴자에서 '거주민'으로 버티고 있는 나는 도대체 어디를 갈까? 매일 밤 13억짜리 땅 위에서 명품만 휘두르고, 비싼 클럽에서 술을 마실 리는 없지 않은가.

내가 실제로 이 거대한 자본주의의 정글 속에서 생존하고 즐겨 찾는 긴자 속의 나의 루트를 공개한다.

(다음은 긴자, 거주자의 동선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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