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현재 긴자(銀座)에서 도보 20분 거리, 몬자야키(もんじゃ焼き)로 유명한 '츠키시마(月島)' 지역에 살고 있다. 집에서 역까지 11분, 유라쿠초선(有楽町線) 전철을 타면 5분. 합치면 20분 내에 도쿄의 가장 비싼 심장부로 진입한다.
그렇다면 여전히 여행자의 설렘을 간직하고 있지만, 작년 도쿄도(東京都)로부터 '생활지원금'까지 받았던 거주민으로서의 긴자는 과연 어떤 곳일까? 냉정하게 말하면 나는 '반은 거주민, 반은 여행객'인 어정쩡한 포지션이다. 아마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이 정체성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가끔 억울할 때가 있다. 바로 쇼핑할 때다. 거주민은 여행객이 누리는 면세(Tax Free) 혜택이 없다. 시내에 나가도 물욕은 있어도 뭘 하나 사는데 한참을 망설이게 된다. 소비세 10%를 고스란히 내야 하니 왠지 손해 보는 기분이 들어서다. 그래서 나름의 자구책도 있다. 이세탄 백화점(伊勢丹百貨店)에서는 현금 결제 시 5% 할인을 해주는 카드를 썼고(아쉽게도 곧 없어진다), 유니클로 도쿄(UNIQLO TOKYO) 지하의 '오케이 마트(オーケー)'에서는 '현금 결제 전용' 멤버십 카드로 식료품 3% 할인을 악착같이 챙겼다.
아, 참고로 도쿄도로부터 생활지원금을 받게 된 이유는 세금 때문이다. 일본에서 일하게 되면 소득세 등 각종 세금을 내게 되는데, 지방세인 주민세는 전년도 소득 기준으로 부과되다 보니 일본 거주 첫해에는 주민세를 내지 않는다. 그렇다 보니 2024년 내가 주민세를 납부한 실적이 없었고, 그런 연유로 구청에서 자동으로 생활지원금 대상자로 분류된 것 같다.
각설하고, 과연 이 거대한 빌딩 숲, 긴자라는 공간은 나에게 어떤 의미일까? 화려한 명품관 뒤에 숨겨진 거주민으로서 다녔던 긴자의 여러 지점을 소개하려고 한다.
일주일에 3~4번은 들렀던 곳이 있다. 마로니에 게이트 긴자 2(マロニエゲート銀座2) 빌딩이다. 지하 1, 2층에는 오케이 마트 긴자점(オーケー 銀座店)이 있고, 1층에서 4층까지는 유니클로 도쿄, 5층에는 지유(GU), 6층에는 다이소(ダイソー) 등이 있어서 식료품이나 생필품 등을 살 때 그냥 갈 수밖에 없는 곳이다.
긴자 한복판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가격이 저렴해서, 츠키시마 동네 슈퍼보다 자주 찾았다. 식료품부터 상비약까지 없는 게 없으니, 이곳은 늘 관광객과 거주민이 뒤엉켜 카트끼리 부딪치는 전쟁터였다. 그래도 물건을 담다 잠시 고개를 들면 기분이 묘해진다. 원래 백화점(구 프랑탕 긴자)이었던 건물을 리모델링해서인지, 중앙이 뻥 뚫려 있어 지하에서 4층 천장의 거울이 올려다보인다. 마트 계산대 줄에 서서 그 화려한 개방감을 멍하니 바라보는 것. 그게 내 긴자 생활의 가장 흔한 풍경이었다.
- OK Ginza https://maps.app.goo.gl/o2Xy56mjzq2MYxy39
일본에서 거주를 시작할 때 난제 중 하나는 미용실을 어디로 갈까였다. 한국에서도 내 마음에 드는 헤어디자이너를 만나기가 쉽지 않거늘, 말도 잘 안 통하는 도쿄에서 어디를 가야 할까 고민이 되었다. 주위 분들에게 물어보니 신주쿠(新宿) 근방에 가면 한국 분들이 운영하는 미용실이 있다고 추천해 주었다. 하지만 막상 머리 깎을 때가 되니, 왕복 2시간 걸리는 곳까지 가려니 내키지 않았다. 그래서 집 근처나 긴자의 헤어 살롱을 예약했는데, 이 역시 주위 분들의 추천으로 예약 앱인 '핫페퍼 뷰티(Hot Pepper Beauty)'를 뒤져서 적당한 곳을 골랐다. 평점도 보았지만 아무래도 가격을 중심으로 결정하게 되었다. 2024년도 기준으로 긴자의 커트 비용은 6,000엔 정도가 그래도 좀 괜찮은 가격이었고, 커트에 파마나 염색을 더하면 12,000엔, 게다가 디자이너를 지명하면 1,000엔 이상이 추가되었다.
가격이 조금 세었지만 긴자에서 머리를 한다는 건 그래도 낭만적이다 싶어 여행객 모드를 켜고 몇 번 다녀왔었다. 그런데 문제는 스타일이었다. 일본 미용사들은 숱을 많이 치고 층을 내는 샤기컷 스타일을 선호했다. 한국에서처럼 단정하게 깎아 달라고 요청을 해도 잘 전달이 안 되는 것 같았다. 나는 거울로 앞면만 보니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갔었는데, 집에 가면 아내가 "뒷머리가 왜 그래? 누가 쥐어뜯어 놓은 것 같아."라고 타박을 한다.
일본에 왔으니 일본 스타일로 지내는 것도 괜찮겠다 생각했지만, 지속적인 타박을 받고 나니 결국 미용실을 포기하고 '바버샵(Barber Shop)'으로 눈을 돌렸다. 원래는 하라주쿠 쪽의 힙한 곳을 가고 싶었는데, 도무지 그 힙함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직장인들이 많이 찾는 긴자로 노선을 틀었다.
긴자에서 처음 갔던 곳은 '브로 도쿄(Bro Tokyo)'라는 프랜차이즈였다. 사실 이곳은 그저 '기본기 탄탄하고 머리 참 잘하는 이발소'에 가깝다. 기계로 옆과 뒤를 시원하게 밀어주니(페이드 컷) 한결 정돈된 느낌이라 아주 만족스러웠다. 게다가 미용실처럼 파마도 되고, 면도나 남성 피부 케어도 전문으로 하는 곳이었지만 헤어 외의 서비스는 내 체험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최근에는 첫 만남부터 마음에 쏙 들었던 헤어 디자이너가 히로오(広尾) 쪽으로 옮겨가 버렸다. 의리를 지켜 따라갈까 잠시 고민했지만, 그쪽 동네의 기본 컷 가격이 9,000엔이라는 소식을 듣고 깔끔하게 포기했다. 결국 나 역시 신도미초(新富町) 인근의 묵묵한 바버샵으로 미련 없이 이적을 완료했다.
주말 오후, 해가 살짝 기울어 건물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질 때쯤이면 나는 가벼운 차림으로 긴자 주오도리(中央通り)의 '보행자 천국(歩行者天国)', 줄여서 '호코텐(ホコ天)'을 어슬렁거렸다.
차가 사라진 도로는 거대한 런웨이다. 아크로바틱 공연을 하는 예인부터 시바견 동호회 정모까지 온갖 구경거리가 넘쳐난다. 긴자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선글라스(안경)를 낀 멋쟁이 견공이었다. 주인 옆에서 점잖게 포즈를 취하는데, 웬만한 모델보다 카메라를 즐기는 듯한 그 표정이 압권이었다.
하지만 '개 산책'의 끝판왕은 긴자가 아닌 오모테산도(表参道)에서 만났다. 그건 유모차도 아니었다. 한 남자가 무려 20마리나 되는 개들에게 일일이 목줄을 채우고, 마치 부채꼴 모양으로 쫙 펼쳐서 위풍당당하게 걷고 있었다. 그 비현실적인 비주얼에 사람들이 눈이 휘둥그레져서 쳐다보면, 그는 아주 자랑스럽게 외친다. "Twenty Dogs! (스무 마리야!)" 긴자의 세련된 안경을 쓴 개와 오모테산도의 압도적인 20마리 개. 도쿄의 거리는 사람뿐만 아니라 개들도 범상치 않다. 도로 한가운데 주저앉아 인생샷을 남기려는 관광객들 사이를 유유히 지나가며, 이런 소소한 풍경을 구경하는 맛이 꽤 좋다.
쇼핑은 안 해도 '긴자 식스(GINZA SIX)'도 가끔씩 들른다. 명품관이나 룰루레몬 매장엔 중국인 관광객이 넘쳐나지만, 나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4층이나 5층으로 올라간다. 이곳은 건물 가운데가 뻥 뚫려 있고 천장에서부터 거대한 모빌을 걸어 두는 거대한 설치미술의 현장이다.
특히 작년 1년 넘게 매달려 있던 얀 줄리앙(Jean Jullien)의 '우주 고양이(The Departure)'는 정말 압권이었다. 공중에 둥둥 떠 있는 그 위트 있는 고양이를 보고 있으면, 복잡한 머릿속이 깨끗해지는 기분이었다. 최근에는 LED 사각형 모빌이나 영상 작품으로 바뀌었는데, 일본 전통 창살 무늬를 형상화한 인테리어 속에 앉아 멍하니 그 움직임을 쫓는 것. 입장권을 사지 않아도 즐길 수 있는 도쿄 최고의 설치 미술 공간이다.
-긴자 식스 https://maps.app.goo.gl/FN6K5edJCwdmWkiV7
봄가을에는 백화점 옥상 정원을 자주 찾는다. 먼저 마츠야 긴자(松屋銀座)의 옥상은 소박하지만 편안하다. 자판기가 있어 음료를 뽑아 마실 수 있고, 사람도 적당해 벤치에 앉아 멍 때리기 좋다. 반면, 긴자 미츠코시(銀座三越) 9층에 있는 '긴자 테라스(銀座テラス)'는 조금 더 잘 꾸며진 정원이다. 푸른 잔디밭이 넓게 펼쳐져 있고 테이블도 넉넉하다. 한쪽에는 '긴자 출세 지장존(銀座出世地蔵尊)'이라는, 출세를 비는 작은 불상도 있어 이색적이다. 하지만 내가 이곳을 찾는 진짜 이유는 지하 식품관(デパ地下)에서 사 온 전리품들을 가장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 미츠코시 백화점 긴자점 https://maps.app.goo.gl/81L4YVMbssKDMeHP6
미츠코시 지하 식품관은 그야말로 '디저트의 격전지'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언제나 긴 줄을 자랑하는 '노와 드 뵈르(Noix de Beurre)'다. 이곳의 갓 구운 피낭시에는 버터 향이 폭력적일 정도로 강렬하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그 맛을 보면 왜 사람들이 줄을 서는지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 옆에는 도쿄 최고의 밀푀유로 꼽히는 '프레데릭 카셀(Frédéric Cassel)'이 유혹한다. 마츠야 지하 역시 '선물용 과자'의 천국이다. 왕의 간식이라 불리는 '가토 페스타 하라다(Gateau Festa Harada)'의 러스크(겨울 한정 화이트 초콜릿 코팅은 필수다), 부드러운 버터 풍미의 '요쿠모쿠(Yoku Moku)' 시가레, 나뭇잎 모양의 '긴자 웨스트(Ginza West)' 리프 파이까지. 실패 없는 선택지들이 즐비하다.
단 것만 있는 게 아니다. 두 백화점의 도시락(お弁当) 코너도 가끔 이용한다. 딱히 해 먹기 싫을 때는 편의점 도시락보다 좀 더 가격이 있지만 고급진 백화점 도시락을 즐길 때도 있다. 두툼한 돈카츠가 들어간 '마이센 카츠 샌드(まい泉カツサンド)'부터 제철 생선이 가득 담긴 '카이센동(海鮮丼)', 그리고 정갈한 일본 요정(料亭)의 맛을 담은 '나다만(なだ万)'이나 '가메이도 마스모토(亀戸升本)'의 조개밥 도시락까지. 마감 시간이 임박하면 할인 스티커가 붙기를 기다리는 묘한 긴장감도 이곳의 재미다.
지하에서 도시락이나 간식거리 조금 사서 백화점 옥상 정원으로 올라가 자판기에서 뽑은 오차 하나랑 같이 즐기고 있으면 거주민의 긴자는 이런 즐거움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관광객들에게 소금빵으로 널리 알려진 '팡 메종 긴자점(Pain Maison)'은 호기심에서 가 보았는데 정말 맛있었다. 위치는 긴자 1초메(銀座一丁目)를 지나 신도미초역 근처, 사실상 외진 곳인데도 아침 9시 오픈 전부터 줄이 어마어마하다. 신기한 건 그 줄의 90%가 관광객이라는 점이다. "여행객들의 정보력은 정말 대단하다"며 혀를 내두르면서도, 나 역시 그 대열에 합류해 번호표를 받았다. 이곳의 '소금빵(塩パン)'과 '멜론 소금빵(メロン塩パン)'은 그만한 기다림의 가치가 있다. 내 맘대로 선정한 도쿄 멜론빵의 양대 산맥은 츠키시마 몬자 스트리트의 '도쿄 멜론빵(東京メロンパン)'과 바로 이곳 팡 메종의 멜론 소금빵이다.
-팡 메종 긴자점 https://maps.app.goo.gl/4mFLB9vBy1FGAdzG8
긴자는 살아보니 생각보다 훨씬 생활 밀착형 동네였다. 오케이 마트에서 장 보고, 바버샵에서 머리 깎고, 백화점 지하에서 도시락 하나 사서 옥상에서 오차 한 잔과 함께 먹는 것. 그게 내 긴자였다. 화려한 명품 쇼핑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세계에서 가장 세련된 거리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그 소소한 일상이 은근히 나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번엔 잠시 거주민의 앞치마를 벗고, 여행자의 눈으로 긴자를 다시 걸어보자. 면세 혜택도 없이 소비세 10%를 꼬박꼬박 내면서도 결국 지갑을 열게 만들었던, 거주민이 직접 경험한 긴자 쇼핑 이야기다.
(다음 편은 여행자의 시선에서 보는 긴자 쇼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