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의 화려함 속, 10%의 내 취향을 파헤치다
긴자(銀座)는 참 묘한 동네다. 집에서 가까우니 심심하면 슬쩍 나가기도 하고, 서울에서 손님이 오면 가이드 자격으로 빼먹을 수 없어 가야 하고, 업계 관계자들이나 도쿄(東京) 지인들과의 저녁 모임으로도 자주 나선다. 일주일에 서너 번은 꼭 발도장을 찍는 일상과 비일상이 교차하는 곳이다.
그런데 반(半) 여행객이자 반(半) 거주자인 나는, 이 화려한 긴자에서 대체 무엇을 사고 있을까?
긴자는 유럽과 미국의 내로라하는 하이엔드 의류와 시계 브랜드들의 거대한 경연장이다. 미츠코시(三越)나 마츠야(松屋) 같은 유서 깊은 백화점 안에 입점해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자신들만의 단독 빌딩(플래그십 스토어)을 올리고 외관에서부터 화려한 빛과 색으로 위용을 뽐낸다. 오모테산도(表参道), 아자부다이힐즈(麻布台ヒルズ)와 함께 도쿄를 대표하는 명품 빌딩으로 둘러쳐 있는 거대한 성(城)이다.
하루는 지나가다가 진입장벽이 꽤 만만해 보였던 모 브랜드에 들어갔다. 20~30대들이 곧잘 들고 다니는 가방 하나가 눈에 들어와 슬쩍 가격을 물어보니 36만 엔 정도라고 한다.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산기를 두드려 보았다. '일주일에 2번씩 1년을 들면 100번. 10년을 쓴다고 치면 한 번 들 때 360엔이네?'
명품은 오래 들어야 제 모양과 빛을 낸다니, 10년 이상을 쓴다고 가정하면 꽤 훌륭한 가성비라는 기적의 논리가 성립된다. 어차피 소비는 취향의 문제다. 마음에 드는 거 하나 장만해서 평생 쓰는 것도 나쁘지 않다. 통상의 소비자들은 여기에 한 가지 변명을 더 덧붙인다. "브랜드는 사서 자식이나 며느리한테 물려주면 되지." 글쎄, 시계는 그렇다. 손치더라도 옷이나 가방 같은 제품을 다음 세대가 아주 흔쾌히 받을까? 이건 내 경험 밖의 일이니 패스하기로 하자.
일본에 와서 패션 관련 유튜브를 보며 가장 신선하게 다가왔던 단어가 있다. 바로 '경년변화(経年変化)'다. 데님이나 가죽, 황동 같은 소재가 시간이 지나며 주름이 지고 색이 바래는 것 자체를 '나이 들어가는 멋'으로 여기는 태도다.
서울에서 생활할 때의 나는, 옷이 낡아 보이면 남들 보기에 내 삶이 힘들어 보일까 봐 늘 옷을 새것처럼 깨끗하게 관리했다. 조금이라도 낡은 티가 나면 가차 없이 옷장에서 제거하는 것을 당연한 외형 관리 중 하나로 여겼다. 일본에 본격적으로 살기 시작한 2024년 이전에는 사실 데님이나 가죽의 에이징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 '경년변화'는 불완전함과 덧없음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일본의 전통 미학인 '와비사비(侘寂)' 정신과 깊이 연결되어 있었다. 완벽함을 추구하기보다 부서지면 부서지는 대로, 해지면 해지는 대로 그 흔적을 껴안는 것. 인생을 조금 더 가볍게, 나이 들어감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그 여유로운 태도가 옷으로 발현될 때 비로소 멋스러운 낡음이 된다. 이 철학을 이해하고 나니 브랜드의 로고보다 소재가 품은 시간에 더 눈이 가기 시작했다.
긴자의 거리를 걷다 보면 지나가는 사람들의 국적을 대략 유추할 수 있다. 여성분들 중 롱스커트를 입었거나, 특히 겨울에 허리가 잘록하게 들어간 '몽클레어(Moncler)'나 팔뚝에 십자가별 3개 마크가 있는 '타트라스(TATRAS)' 블랙 패딩을 입고 있다면 거의 100% 일본인이다. 투톤 선글라스에 브랜드 로고가 사정없이 지나가는 옷을 입고, 빨간색 명품 가방을 든 분들은 십중팔구 중국인이다. 그럼 한국인은? 묘하게 그냥 한국인 같다. 한때 미츠코시 백화점이나 셀린느 매장 앞에 서 있는 분들은 다 한국 분들 같았는데, 한동안 럭셔리의 큰손인 중국인 관광객들이 몰려오면서 드물게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요즘은 중국 분들이 빠져나간 자리를 한국 분들이 많이 메우고 있어 보인다.
외국인 관광객의 파워를 이야기하자면, 내가 긴자에서 가장 많이 들락거린 '이세이 미야케(ISSEY MIYAKE)'와의 인연을 빼놓을 수 없다.
2013년 오사카(大阪) 여행 때의 일이다. 아침 9시에 우메다(梅田) 한큐 백화점(阪急百貨店) 앞에 갔더니 줄이 짧길래 소문의 바오바오(BAOBAO) 백을 사 볼까 하고 섰다. 그런데 9시 반이 되자 종업원이 나와 번호표를 뽑으라고 했고, 내가 뽑은 건 35번. 그날은 딱 37번까지만 입장이 가능하고 1인당 2개 제한이 있었다. 흥미로웠던 건, 내 앞뒤로 핸드백을 살 것 같지 않은 나이 드신 분들이 번호표를 받자마자 근처의 중국어를 쓰는 가이드에게 표를 전달하고 돌아가는 모습이었다. 파리 유학생들이 명품 줄을 대신 서주고 100달러씩 번다는 소문이 일본에서도 벌어지고 있었다.
당시 다 쓰러져 가던 이세이 미야케 그룹을 기사회생시킨 것도 중국인들의 바오바오 싹쓸이 덕분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재미있는 건 일본 위스키인 '히비키(響)'나 '야마자키(山崎)'의 가격 폭등도 이 시기와 겹친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안 팔려서 오크통을 깨 하이볼로 팔아버리던 위스키가, 중국인들의 수요 폭발로 지금의 금값이 되었다. (물론 잭슨 황이 한국 총수들에게 선물할 정도로 일본 위스키가 세계적인 수준에 오른 것도 사실이다.)
여하튼 처음엔 저 플라스틱 큐빅 가방을 누가 드나 싶었는데, 몇 년 만에 길거리 여성들의 국민 가방이 되어 버렸다. 그 후 도쿄 출장을 올 때마다 마츠야 백화점 측면의 바오바오 매장을 기웃거리며 1만 엔 남짓하던 스카프를 꽤 센스 있는 출장 선물로 사 가곤 했다.
스카프와 가방에서 시작된 관심은 자연스레 옷으로 향했다. 도대체 저 현란하고 기하학적인 옷에 사람들이 왜 열광할까?
이세이 미야케의 철학은 '한 장의 천(A Piece of Cloth)'으로 요약된다. 서양복이 몸의 곡선에 맞춰 원단을 재단한다면, 그는 평면의 천 한 장으로 몸과 옷 사이의 넉넉한 여백을 만들어냈다. 특히 일본 전통 종이 접기에서 착안한 정교한 '플리츠(주름)' 가공은 착용자의 움직임에 따라 형태가 자유롭게 변하며 해방감을 준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롯폰기(六本木)의 미술관 '21_21 DESIGN SIGHT'의 설계에 안도 다다오가 직접적인 영감을 받은 대상도 바로 이세이 미야케의 '한 장의 천' 철학이었다.
- 21-21 디자인 사이트 https://maps.app.goo.gl/M278cWrypY7maCej9
최근 아오야마(青山)에 새로 오픈한 매장이 가장 크고 물건도 많다. 이곳은 1일과 15일에 신상품이 드롭되는데, 첫날은 사전 인터넷 신청자 우선이다. 한때는 드롭 며칠 뒤에 가면 휑한 매장에 종업원만 오가는 경우가 많을 정도로 인기가 어마어마했다. 요즘은 예전 같지 않은데, 아마도 중국인 관광객의 부재 탓이 아닌가 싶다.
시부야(渋谷) 파르코(PARCO), 유라쿠초(有楽町) 한큐 맨즈(阪急メンズ) 등을 돌며 나도 결국 남성 라인인 '옴므 플리세(HOMME PLISSÉ)'의 후드, 점퍼, 셔츠를 득템 했다. 나에게 어울리는지는 모르겠지만, 옷장에 구깃구깃 처박아 두었다가 스팀 다림질 없이 툭 걸쳐도 폼이 나고, 그냥 물빨래해 버리면 되는 세상에서 가장 손쉬운 옷이었다.
긴자 메인 스트리트에서 벗어나 소금빵 성지인 '팡 메종(Pain Maison)', 로스터리 '봉겐 커피(Bongen)' 등이 있는 외진 골목에 다다르면 내가 사랑하는 '캐피탈(KAPITAL)' 긴자점이 나온다.
-KAPITAL 긴자 https://maps.app.goo.gl/LtWkuSYqfgfi25sh6
캐피탈은 일본 데님의 성지인 오카야마현(岡山県) 고지마(児島)에서 출발한 하이엔드 아메카지(아메리칸 캐주얼) 브랜드다. 특히 가난한 시절 낡고 해진 천을 덧대어 꿰매 입던 일본의 전통 수선 기법인 '보로(Boro, 襤褸)'를 하이엔드 패션으로 승화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한국에서는 뼈다귀 모양이 프린트된 '스켈레톤' 시리즈와 특유의 노란 스마일 마크로 널리 알려졌고, 걸그룹 '뉴진스'가 입으며 화제가 되기도 했다.
도쿄에 6개 매장(에비스(恵比寿) 3, 롯폰기 2, 긴자 1)이 있는데, 긴자점은 1층의 3~4평 남짓한 아주 좁은 공간이다. 그 좁은 벽면에 옷과 액세서리를 빈틈없이 빽빽하게 걸어두어, 진열 방식으로만 보면 거의 '패션계의 돈키호테(ドン・キホーテ)'다. 원하는 걸 찾기가 쉽지 않아 보물 찾기를 하는 마음으로 골라야 한다. 캐피탈의 옷은 사고 싶은 걸 사는 게 아니라 눈에 보이는 걸 사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롯폰기 매장만 면세가 되지만, 물건이 다양하지 않아 나는 굳이 긴자점을 찾는다. 긴자는 아이템도 다양하고, 눈썰미 좋은 젊은 여사장님이 내 사이즈를 한눈에 알아보고 척척 내어주기 때문이다. 할인 쿠폰까지 알뜰하게 모으고 있는 나는 이곳의 꽤 쏠쏠한 단골이다. 아직 서울의 지인들에게 이런 내 모습을 제대로 보여준 적은 없지만, 조만간 귀국해서 본격적으로 친구들을 만난다면 이 조금씩 낡아가고 독특한 패턴이 들어간 내 옷차림을 보며 십중팔구 "너 도쿄 가더니 점점 히피가 되어간다"라고 놀려댈 것이 뻔하다. 옷이 사람의 정신세계를 다 대변하는 건 아니겠지만, 적어도 '무엇만 입어야 한다'는 강박적인 틀에서만큼은 벗어나고 싶기에 캐피탈이 주는 그 자유로움이 참 좋다.
이외에도 긴자에는 '보는 재미'를 위해 꼭 들르는 거점들이 있다. '긴자 식스(GINZA SIX)'는 화려한 중정 아트리움의 대형 설치 미술과 6층 츠타야(蔦屋) 서점의 예술 서적들, 그리고 감각적인 럭셔리 부티크들이 어우러져 걷는 것만으로도 눈이 즐겁다. 꼼데가르송의 창립자 가와쿠보 레이가 전개하는 편집숍 '도버 스트리트 마켓 긴자(DSMG)' 역시 컬래버레이션의 성지다. 하이엔드 브랜드들이 기존의 틀을 깨고 아방가르드하게 재해석한 아이템들을 층별로 갤러리처럼 전시해 놓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도버 스트리트켓 긴자 https://maps.app.goo.gl/T4WT9zRmtZsdPH7T8
최근 긴자에 새로 생긴 '젠틀몬스터' 매장도 해외 유명 브랜드의 선글라스들보다 훨씬 파격적인 디자인을 뽐내고 있어 묘한 자부심을 준다. 하지만 내가 진짜 애정하는 안경 방앗간은 '가네코 안경(金子眼鏡, 금자안경)' 긴자점이다.
-젠틀몬스터 긴자 플래그 스토어 https://maps.app.goo.gl/Cc5zdCSiAxa3Xn4z9
가네코 안경은 일본 안경 생산의 90%를 차지하는 후쿠이현(福井県) 사바에시(鯖江市)의 장인들이 아세테이트와 셀룰로이드를 일일이 손으로 깎고 연마해 만드는 최고급 수제 하우스 브랜드다. 공장제 플라스틱 테에서는 느낄 수 없는 묵직하고 깊은 광택이 특징이며, 착용자의 얼굴형에 맞게 길들여지는 맛이 일품이다. 쓸수록 윤기가 돌며 주인의 세월을 타는 안경, 이 역시 궁극의 '경년변화' 아이템이다. 최근 이곳에서 마음에 쏙 드는 선글라스를 하나 구입했다.
- 카네코 안경 https://maps.app.goo.gl/L2mM7Co7QBwVZ7pC6
앞에서 언급한 곳들은 솔직히 기본이 몇십만 원을 족히 넘기 때문에, 한 번 사기 전까지 엄청나게 망설이게 된다. 자연스레 한 번 살 때 매장을 여러 번 들락거리며 신중을 기하게 된다.
긴자의 화려한 메인 거리에서 조금 떨어져 있지만, 긴자 1초메 끝자락과 맞닿은 곳에 '몽벨(mont-bell)' 매장이 있다. 몽벨은 일본의 유명 산악인 다쓰노 이사무가 창립한 브랜드로, '가볍고 빠른(Light & Fast)', '기능이 곧 아름다움(Function is Beauty)'이라는 철학 아래 뛰어난 기능성과 합리적인 가격을 자랑하는 일본의 국민 아웃도어 브랜드다.
- 몽벨 도쿄 교바시 https://maps.app.goo.gl/Sp8pTHfAndN37y966
이곳은 등산복부터 자전거, 캠핑, 반려견 용품, 일상용 기능성 의류와 소품, 가방까지 거의 모든 야외 활동 물품을 총망라해 팔고 있다. 이곳의 패딩이나 기능성 의류 등은 아크테릭스(Arc'teryx)나 노스페이스(ザ・ノース・フェイス), 스노우피크(スノーピーク), 그리고 길 건너에 있는 파타고니아(Patagonia)보다 가격이 저렴한 편이고, 실용성 면에서 현지인들에게 인기가 높다. 갈 때마다 어마어마한 인파 속에서 치열한 쇼핑 게임을 치르는 기분이다. 결국 나도 경량 패딩과 변색 렌즈 선글라스, 데일리 백, 물통 등을 득템했다. 가성비를 논하면서도 무려 7,000엔을 훌쩍 넘는 여름용 양산과 초경량 우산도 기분 좋게 샀다.
이처럼 긴자라고 해서 늘 지갑을 영혼까지 털어갈 준비가 된 묵직한 곳만 있는 건 아니다. 몽벨처럼 가볍고 만만한 쇼핑으로 마음을 달랠 수 있는 친숙한 공간들도 다수 포진해 있다.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12층짜리 '유니클로(UNIQLO)' 긴자 플래그십 스토어와, 의류부터 생활용품까지 없는 게 없는 '무인양품(MUJI)' 글로벌 플래그십 스토어가 든든하게 중심을 잡아주고 있다. 또한 아기자기하고 트렌디한 디자인 문구류, 화장품, 생활 아이디어 상품을 구경하기 좋은 '로프트(Loft)' 역시 빼놓을 수 없다. 긴자의 살벌한 물가와 콧대 높은 명품 매장의 긴장감이 피곤해질 때면, 이런 친숙하고 실용적인 매장으로 피신해 가벼운 마음으로 장바구니를 채우는 것도 긴자를 완벽하게 즐기는 현명한 방법이다.
- 유니클로 긴자 https://maps.app.goo.gl/LQP5eoEqcNb3nFcq9
- 무인양품 긴자 https://maps.app.goo.gl/8B2TXTBsFEDHcx2b8
- 긴자 로프트 https://maps.app.goo.gl/M3XnzFpJegzFGu2M6
쇼핑에 임하는 자세와 방향은 하라주쿠(原宿), 시부야, 긴자가 다 제각각이다. 하라주쿠가 타인들의 개성 넘치는 의상을 관찰하며 걷는 '산보와 아이쇼핑'의 장소라면, 시부야는 확실한 타깃을 정해 두고 진입하는 '구매 실전 전투'의 장이다.
그렇다면 긴자는 어떨까? 이곳은 자주 마주하지만 여전히 내가 범접할 수 없는 초고가 명품 브랜드라는 90%의 압도적인 층위가 머리 위에서 나를 짓누르고 있는 곳이다. 하지만 나는 그 틈바구니 속에서, 이세이 미야케의 주름과 캐피탈의 낡은 데님, 가네코 안경의 묵직한 광택, 그리고 몽벨의 기막힌 가성비처럼 내가 접근 가능한 10%의 영역을 아주 조심스럽고 집요하게 파고든다.
혹시라도 곡괭이질을 잘못해서 고가 브랜드의 지반이 무너져 그 밑에 깔려 버리면 큰일이니까. 나의 긴자 쇼핑은 화려한 90%의 시선을 비껴가 나만의 철학과 취향이 담긴 10%의 보물을 안전하게 발굴해 내는 아주 정교한 생존 게임이다.
(다음은 긴자의 맛집 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