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주쿠역은 도쿄, 아니 세계에서 가장 번잡한 역이다. 기네스북에도 등재되어 있을 만큼 하루 유동 인구가 약 350만 명에 달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거미줄 같은 환승 노선만 봐도 아찔하다. 도쿄의 혈관인 JR 야마노테선(山手線)을 비롯해 주오선(中央線), 사이쿄선(埼京線), 쇼난신주쿠라인(湘南新宿ライン) 등 JR 노선만 수두룩하고, 도쿄 메트로 마루노우치선(丸ノ内線), 도에이 신주쿠선(新宿線)과 오에도선(大江戸線) 같은 지하철은 물론이다. 여기에 도쿄 외곽으로 뻗어 나가는 사철인 오다큐선(小田急線), 게이오선(京王線), 그리고 살짝 비껴 있는 세이부 신주쿠선(西武新宿線)까지, 무려 10개가 훌쩍 넘는 노선이 얽히고설켜 거대한 지하 던전을 형성하고 있다.
고백하건대, 나는 신주쿠 역에서 내가 목표한 곳까지 한 번에 수월하게 도달해 본 적이 없다. 나의 도쿄 생활을 구원해 준 동반자, 구글 맵마저도 이 거대한 지하 미궁에만 들어가면 방향 감각을 상실해 버리기 때문이다. 간신히 지상으로 올라온다고 해도 복잡하게 얽힌 고가도로와 거대한 상업 건물들 탓에 구글 맵의 파란 점은 여전히 갈피를 못 잡고 빙글빙글 돌기 일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 I(내향형) 성향인 내가 가끔 신주쿠의 인파 속으로 뛰어드는 이유는 단 하나, '외식' 때문이다. 시부야가 젊은 친구들의 트렌디한 술집이 모인 곳이고, 하라주쿠가 패션을 구경하며 길거리 간식을 섭렵하는 곳이라면, 신주쿠는 상대적으로 저렴하고 맛있는 식당들의 층위가 어마어마하게 두터운 곳이다.
일본 사람들에게 신주쿠는 흔히 '욕망과 혼돈의 용광로' 같은 장소로 인식된다. 신주쿠는 크게 역을 기준으로 서쪽 출구(니시구치)와 동쪽 출구(히가시구치) 방면으로 나뉘는데, 이 둘의 분위기는 극단적으로 다르다.
도쿄 도청을 중심으로 하는 서쪽 방면(西口 일대)은 거대한 마천루가 솟아 있는 오피스 타운이다. 그래서 밤이 되면 썰물 빠지듯 직장인들이 사라지고 제법 고요해진다. 이곳의 랜드마크인 도쿄 도청은 밤마다 거대한 외벽을 스크린 삼아 화려한 프로젝션 매핑(LED 조명 쇼)을 선보인다. 무료로 개방되는 도청 전망대도 유명하지만, 밤에 우연히 도청 앞을 지나다가 거의 혼자서 그 거대하고 화려한 빛의 쇼를 독점하듯 감상할 때면 묘한 기분이 든다. 그만큼 밤의 서쪽은 적막하다.
반면, 가부키초(歌舞伎町)를 품고 있는 동쪽 방면(東口 일대)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다. 과거 내가 이 거리를 처음 마주했을 때의 충격은 꽤 컸다. 한국의 정서로는 대놓고 영업하는 것이 다소 이해하기 힘든 호스트바와 캬바쿠라, 거대한 파친코 업소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엄청난 혼돈을 뿜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건물 외벽마다 호스트들의 얼굴이 대문짝만 하게 걸려 있었고, 미소년의 얼굴을 도배한 대형 홍보 트럭이 정신 사나운 음악을 울리며 거리를 배회하곤 했다. 밤이 되면 술에 취해 길거리에서 난장을 벌이는 젊은이들, 그리고 관광객을 노리는 호객꾼들까지 뒤엉켜 그야말로 혼비백산이었다.
물론 최근에는 일본 당국의 대대적인 단속과 정화 작업 덕분에 호스트바의 과도한 영업이나 악질적인 호객 행위가 철퇴를 맞으면서, 예전 같은 날것의 무법지대 느낌은 꽤 많이 사라졌다. 거리도 예전보다 한결 쾌적해진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아무리 정리가 되었다 한들, 여전히 나 같은 내향인에게 이곳은 목적 없이 산보를 나왔다가는 기가 쫙 빨려버리는, 체질적으로 맞지 않는 동네임은 틀림없다. 설상가상으로 만물상 '돈키호테' 본점까지 떡하니 버티고 있어, 퇴근 이후나 주말에는 인파에 그냥 이리저리 밀려다닐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혼돈의 거리도 최근 재개발의 물결을 타고 조금씩 변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변화는 구 코마 극장 터 일대에 들어선 '신주쿠 토호 빌딩(新宿東宝ビル)'이다. 8층 야외 테라스에서 거대한 고질라 대가리가 거리를 내려다보며 포효하는 이 건물(호텔 그레이서리 신주쿠)이 들어서면서, 주변에 멀티플렉스 영화관과 세련된 상업 시설들이 생겨났고 예전의 혼란스러운 모습들은 계속해서 정돈되어 가는 중이다.
사실 밤의 신주쿠, 특히 적막한 서쪽과 혼돈의 동쪽 사이를 잇는 고가도로 밑을 걸을 때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멜로디가 하나 있다. 바로 드라마 <심야식당(深夜食堂)>의 오프닝 주제곡인 스즈키 츠네키치의 '추억(思ひで)'이다.
君が吐いた 白い息が (네가 내뱉은 하얀 입김이)
今 ゆっくり 風に乗って (지금 천천히 바람을 타고)
이어폰을 꽂고 이 잔잔하고 쓸쓸한 기타 선율과 읊조리는 듯한 목소리를 배경음(BGM) 삼아 걷다 보면, 이 복잡한 동네의 이면이 비로소 피부에 와 닿는다. 화려한 네온사인과 쉴 새 없이 밀려드는 인파 속에서 이리저리 치이다 보면, 인간은 본능적으로 그 거대한 혼란을 피해 조용히 숨어들고 작고 따뜻한 안식처를 찾게 마련이다.
<심야식당>이라는 작품이 국경을 넘어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린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을 것이다. 삐까뻔쩍한 마천루의 위압감과 가부키초의 광기 속에서 지친 영혼들이 잠시나마 어깨의 짐을 내려놓을 수 있는 허름한 공간. 극심한 혼란 속에서 기어이 평온을 찾아내고야 마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방어기제이자 욕구랄까. 그 쓸쓸하면서도 묘하게 위로가 되는 감정을 안고 걷다 보면, 어느새 발길은 자연스럽게 화려한 대로변을 벗어나 매캐한 연기가 피어오르는 좁은 뒷골목으로 향하게 된다.
그렇게 발길이 닿는 곳, 굴다리 근처에는 '오모이데 요코초(思い出横丁, 추억의 골목)'라는 좁고 낡은 선술집 골목이 나타난다. 일명 '오줌싸개 골목(숀벤 요코초)'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던 이곳은, 사람 한 명이 겨우 지나갈 법한 좁은 골목 양옆으로 야키토리(닭꼬치)를 굽는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그야말로 현실판 <심야식당> 같은 낭만적인 곳이다.
- 오모이데 요코쵸 https://maps.app.goo.gl/xsEohMzdy2BE361A8
작은 바 테이블에 앉아 안주 한두 가지에 생맥주 한 잔을 비우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 옆 가게로 자리를 옮겨가며 마시는 재미가 쏠쏠하다. 원래는 퇴근길 현지 직장인들이 피로를 달래던 아지트였지만, 요즘은 특유의 레트로한 분위기가 SNS를 타고 퍼지면서 가게 안을 들여다보면 손님의 8할 이상이 외국인 여행객이다. 만약 현지인들의 날것 그대로의 퇴근 후 한 잔의 감성을 느끼고 싶다면, 오히려 우에노의 아메요코초나 신바시 고가도로 아래가 더 나은 선택일지도 모르겠다.
쇼핑을 위해 신주쿠 3초메(동쪽 출구 방면) 쪽에서 가끔 들르는 곳이 있다면 단연 '빔즈 재팬(BEAMS JAPAN)'이다. 빔즈(BEAMS)는 본래 남성 캐주얼을 중심으로 한 유명 편집숍이지만, 신주쿠의 이곳은 '일본의 매력'을 테마로 한 라이프스타일 숍에 가깝다.
-빔즈 재팬 https://maps.app.goo.gl/AqaGKZGu4WrrEfmDA
1층부터 각 층마다 테마가 다른데, 옷뿐만 아니라 일본 각 지역의 전통 공예품, 후지산 모티프의 소품들, 심지어 겨울에는 디자인이 기가 막히게 예쁜 아날로그 난로까지 판다. 이색적인 콜라보레이션 굿즈도 많아서, 이곳에서는 의류를 고르기보다 남들과 다른 독특한 기념품이나 센스 있는 인테리어 소품을 발굴하는 재미로 가는 경우가 훨씬 많다.
신주쿠에 오면 무조건, 기필코 들러야 하는 곳이 바로 이세탄 백화점이다. 도쿄 백화점 매출 1위를 다투는 압도적인 규모의 이곳은 여행객들의 성지다. 여행자 카드를 발급받으면 5% 할인을 받을 수 있고, 여기에 면세 10% 혜택까지 더하면 꽤 짭짤한 금액을 세이브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이세탄 신주쿠 https://maps.app.goo.gl/WWJcuDQkn9ZvUzBY9
이곳의 지하 식품관(데파치카)은 늘 전쟁터다. 유명 빵집이나 디저트 가게 앞에는 끝을 가늠하기 힘든 대기 줄이 늘어서 있는데, 재미있는 건 줄의 맨 마지막에 선 스태프가 '최후미(最後尾)'라고 적힌 팻말을 무심하게 높이 쳐들고 있다는 점이다. 사람들의 왕래가 엄청난 백화점 지하 한복판에서 묵묵히 줄의 끝을 알리는 그 팻말은 도쿄 쇼핑의 시그니처 풍경 중 하나다.
하지만 이세탄 신주쿠점의 진짜 하이라이트는 남성들을 위한 전용 별관, '이세탄 맨즈(Isetan Men's)'다. 긴자 유라쿠초의 한큐 멘즈도 훌륭하지만(그곳엔 웨어하우스나 덴햄 같은 매력적인 데님 브랜드들이 있다), 전체적인 브랜드의 스펙트럼과 물량을 놓고 보면 이세탄 맨즈가 한 수 위다. 지하 1층부터 지상 8층까지 건물 전체가 남성 전용관으로, 층별로 초고가 명품부터 일본 디자이너 브랜드까지 빼곡하게 입점해 있어 젊은 남성 의류의 트렌드를 읽기에 완벽한 공간이다.
특히 지하 1층의 남성 구두 편집관은 1만 엔대 가성비 구두부터 수십만 엔을 호가하는 하이엔드 수제화까지 한자리에 모여 있어, 이곳만 한 바퀴 돌아도 이번 시즌 구두의 유행을 단번에 파악할 수 있다. 단, 주의할 점이 있다. 좁은 공간에 너무 많은 브랜드가 산재해 있다 보니, 나중에는 '이게 저것 같고 저게 이것 같은' 게슈탈트 붕괴가 온다. 반드시 "오늘은 어떤 스타일의 무엇을 보겠다"라는 명확한 타깃을 정하고 가야만 쇼핑 미아 신세를 면할 수 있다.
기빨리는 인파와 쇼핑의 피로를 완벽하게 치료해 주는 곳은 남쪽에 자리한 '신주쿠 교엔(新宿御苑)'이다. 나는 도쿄를 방문하는 지인들에게 이 공원만큼은 반드시 들러보라고 권한다. 러닝을 즐기는 분들에게는 공원 외곽을 크게 한 바퀴 도는 훌륭한 코스가 눈에 띄겠지만, 안타깝게도 공원 내 달리기는 특정 시기(여름철 주말 이른 아침 등)에만 매우 엄격하고 제한적으로 허용되므로 사전에 반드시 확인이 필요하다. 그렇더라도 빌딩 숲 한가운데 이렇게 넓고 푸른 잔디밭과 울창한 숲이 있다는 건 도시인에게 엄청난 축복이다.
- 신주쿠 코엔 https://maps.app.goo.gl/Y2YY2e8RSDqBsbtu6
입구가 여러 개 있는데, 공원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가면 탁 트인 잔디밭 앞에 근사한 스타벅스가 자리 잡고 있다. 통유리창 너머로 완벽하게 조경된 정원을 바라보며 마시는 커피 한 잔은 그야말로 꿀맛이다. 특히 도쿄의 번잡한 일상에 치인 거주민이나 도떼기시장 같은 백화점에서 얼이 반쯤 빠져나온 여행객들에게 이보다 완벽한 안식처는 없다. 쇼핑한 영수증들을 꼼꼼히 보면서 면세 한도를 체크하고, 구입하려는 제품의 일본 면세가와 한국에서의 정가를 비교하면서 환율 변수까지 챙겨보는 학습형 쇼핑러(?)에게는 잠시 쿨 다운 하기 정말 좋은 장소다.
봄의 벚꽃, 여름의 녹음, 가을의 단풍 아래 넓은 잔디밭에서 한가롭게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그래, 세상 뭐 있나. 이렇게 마음 맞는 사람들과 여유롭게 마주 보며 사는 게 진짜 행복이지" 하며 어느덧 스르르 달관의 기분으로 넘어가게 된다. 수많은 도쿄의 스폿 중에서도 신주쿠 교엔은 마음의 평화가 깃드는 최고의 장소다.
신주쿠는 무언가 먹으러 가는 뚜렷한 목적이 없다면 나 같은 성격엔 자발적으로 가기가 꽤 부담스러운 동네인 것은 맞다. 하지만 이세탄의 압도적인 쇼핑 스케일이나 신주쿠 교엔이 주는 평화를 경험하고 나면 "그래도 신주쿠는 올 만한 곳이야"라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신주쿠 가부키초 끝쪽 그레이스리 신주쿠 호텔에서 신오쿠보로 넘어가는 길이 있다. 며칠 전 우연히 신주쿠역 근처에서 짬뽕이 먹고 싶어서 구글맵을 켰더니 신오쿠보 홍콩반점으로 도보 10분 거리라고 안내했다. 그레이스리를 지나 한국식으로 보자면 여관 골목이 나오더니, 조금 지나니 밝은 LED 기둥이 열댓 개 1.5m 간격으로 이어지는 길이 나왔다. 각 기둥마다 스무 명이 안 되어 보이는 여성분들이 한 분씩 서 있었다. 간혹 도쿄의 가출 소녀들의 이야기가 나오는 곳이 여기인가 싶었다. 남의 삶을 평가할 자격은 없지만 핫팩에 볼을 대는 모습까지 보니 마음이 짠하다.
신주쿠의 스펙트럼은 정말 대단하다. 도청 외벽의 빛의 쇼에서 어둠 속에 서 있던 그녀들까지. 어딜 가도 도시는 다 아프다. 그리고 아픈 곳은 아무리 감추어도 보일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신주쿠를 보지 않고 도쿄를 이야기하는 것은 도쿄의 한 단면을 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겨울은 갔어도 아직 겨울이 남아 있는 밤이다.
다음 편은 신주쿠에서 내가 방문했던 식당들의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