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여행가이드 15]우에노(上野),알 수 없는 동네

by 하임

우에노역은 도쿄역, 신주쿠역, 시나가와역과 함께 도쿄에서 가장 번잡한 역 중 하나이다. 도호쿠 신칸센, 조에쓰 신칸센, 호쿠리쿠 신칸센 등 동일본 각지로 뻗어나가는 신칸센 노선들이 이곳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역 자체가 거대한 터미널처럼 늘 인파로 가득하다.

Gemini_Generated_Image_jszn1ojszn1ojszn.png <우에노 팝아트> Gemini 제공

처음 우에노에 발을 디디게 된 것은 국립서양미술관에 가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입구를 잘못 찾아 시장 쪽 출구로 나오고 말았다. 어쩔 수 없이 아메요코초 시장 골목을 걸어서 빠져나온 뒤, 길을 한 번 더 건너 차도 쪽에서 들어가는 공원 입구를 통해 겨우 미술관 쪽으로 돌아갔다. 그러니까 나의 우에노 첫 경험은 의도치 않은 시장 관통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그 우연한 미로 속에서 나는 이 동네의 정체를 처음 만났다. 박물관과 노숙자 텐트, 로댕과 건어물 냄새, 르코르뷔지에와 오리배가 한 덩어리로 엉켜 있는 이 동네를 어떤 언어로 담아야 할지, 그날 이후 지금까지도 모르겠다.

사실 국립서양미술관에 가려면 우에노역에서 공원 출구로 나오는 것이 정석이다. 공원 출구를 나서는 순간, 역 바로 앞에 큰 은행나무 두 그루가 떡하니 버티고 있고, 오른쪽으로 눈을 돌리면 국립서양미술관 앞마당에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 당당하게, 여전히 굳건하게 생각만 하고 있다. 그 긴 세월 동안 여전히 결정을 못 내리고 있는 것이다. 좀 더 걸어가면 아주 넓은 우에노 공원 광장이 나오는데, 여기를 중심으로 박물관, 미술관, 동물원, 그리고 신사인 우에노 도쇼구(東照宮)가 자리를 잡고 있고, 광장 한가운데에는 이제는 브런치의 성지가 되어버린 스타벅스가 영험하게 자리 잡고 있다.


시장의 북새통과 아메카지의 향수


우에노역 남쪽 출구(혹은 시노바즈 입구)로 나오게 되면 길 건너편에 언뜻 보아도 번잡한 두 개의 출입구가 보이는데, 그중 맨 오른쪽 입구에 '아메요코초'라고 크게 적혀 있고 이곳이 시장의 입구다. 길 건너 정면에는 캐릭터 덕후라면 한 번씩은 들른다는 6층짜리 캐릭터숍 '야마시로야'가 있다. 나도 처음에는 짱구 캐릭터 상품을 사러 갔었지만, 최근에는 괴수 8호 캐릭터 신상을 사기 위해 들른 적이 있다.

-우에노 아메요코 상점가 https://maps.app.goo.gl/fmeUN5WgEzdLtD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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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건물 오른쪽 번잡한 입구로 들어가 보면 생선, 야채, 건어물 가게에다 각종 식당들이 즐비한데, 처음 가는 입장에서는 여기를 들어가면 나중에 입구를 찾지 못할 것처럼 분주하고 어수선해 보인다. 캐릭터숍 건물의 왼쪽 골목 안쪽으로 들어가 보면, 가게 앞쪽에 의자와 테이블을 놓고 주말이면 젊은 친구들이 해 지기 전부터 한 잔 걸치고 있는 저렴이 술집들이 즐비하다.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직장인들이 회식하기 좋은 대형 이자카야들이 보이고, 거기를 지나면 데님의 성지인 '히노야(HINOYA)'나 아메카지의 성지인 '오티앤이(OT&E)' 같은 가게들이 눈에 띈다. 일본의 대부분의 재래시장들은 이미 천장을 두고 반듯하게 정렬한 신식 시장들로 탈바꿈했는데, 여기 우에노 아메요코초는 여전히 혼잡한 재래시장의 모습을 그대로 띠고 있다.

- 히노야 https://maps.app.goo.gl/QCdSdqBWjZT7nAbr7


그러던 중 최근에 다시 시장을 찾았다가 무척 놀랐다. 시장 입구의 식당들 중 거의 10집 중 6집이 중국 로컬 음식을 파는 가게들로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예전에 내가 느꼈던 우에노 특유의 서민적인 활기는 조금씩 희석되고 있다는 아쉬움은 어쩔 수 없다. 그래도 이 혼란을 거쳐 일본 과자를 굉장히 싸게 파는 가게에 얼른 들렀다가, 유리창 너머로 롤렉스 구제 매장을 언뜻 보고는, 시노바즈노이케 쪽으로 내려간다.


시노바즈노이케, 자라 등 위의 쥐


아메요코초의 한 블록 아래로 내려가 보면 게이세이 우에노역이 있고, 그 근처에 커다란 저수지인 시노바즈노이케(不忍池)가 있다. 관광객들은 잘 안 가는 곳인데, 그 한가운데 작은 섬처럼 자리한 '벤텐도(弁天堂)'라는 절이 있다. 이곳의 수호신이 자라다.

-시노바즈노이케 벤텐도 https://maps.app.goo.gl/PkGcAPLJRNMn1PAQ9

IMG_2789.HEIC 시노바즈노이케의 연꽃


이 절은 17세기 에도 시대 초기에 고승 천해(天海) 대승정이 창건했다. 교토의 비와호를 본떠 만든 이 연못 한가운데 섬을 만들고, 비와호의 섬 치쿠부시마에 모셔진 벤자이텐(변재천)을 이곳에 함께 모셔왔다. 원래는 배로만 건너갈 수 있었으나 나중에 참배객을 위해 다리가 놓였다. 이곳이 자라와 인연이 깊은 이유는 살생을 금하고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방생(放生)'의 전통 때문이다. 연못에 방생된 자라들이 오랜 세월 쌓이고 쌓여 자연스럽게 이 절의 상징이 되었고, 심지어 절 마당에는 자라 공양탑까지 서 있다.

그런데 내가 이곳을 찾았을 때 연못을 들여다보다가 그만 멈춰 서고 말았다. 커다란 자라 한 마리가 물 위로 등을 내밀고 있는데, 그 등 위에 쥐 한 마리가 버젓이 올라타 있는 게 아닌가. 태연하게, 마치 원래 그 자리가 제 자리인 것처럼. 절의 수호신인 자라 위에 아무도 초대하지 않은 쥐가 타고 있는 그 장면. 나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웃었다. 우에노의 정체성을 이보다 더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또 있을까? 이 동네는 처음부터 그런 곳이었다.

저수지에는 오리배도 있는데 주로 현지 분들이 많이 이용하고 있었다. 이 절의 참배객들도 관광객보다 현지 분들이 많다. 우에노는 공원을 중심으로 하는 문화의 광장, 아메요코초를 중심으로 하는 시장 문화, 그리고 시노바즈 저수지를 중심으로 하는 현지 분들의 마실터, 이렇게 크게 세 구역으로 나뉜다.


우에노 도쇼구와 동물원, 그 사이


어쩌다 들른 우에노 도쇼구(東照宮)는 닛코의 도쇼구에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공원에서도 숲이 울창한 곳에 숨어 있어 처음에는 잘 보이지 않는데 들어가 보면 여느 신사보다 큰 규모에 놀라고 만다. 특히 가을에는 은행나무의 계절감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개인 신사라 본전을 보려면 별도 입장료가 필요하지만 굳이 안쪽까지 들어갈 필요는 없어 보인다.

그 옆에는 우에노 동물원이 있는데 한 번 관람할 만하다. 서울대공원보다 규모가 작지만 좀 더 가까이에서 동물들을 볼 수 있게 유리로 된 사육장이 많아서 아무 생각 없이 돌아다니기 딱 좋은 장소이다. 우에노 공원 광장은 매주 이벤트들로 가득하다. 간혹 지역 소개 행사를 하면서 그 지역의 먹거리 가게들이 노점처럼 입점하고 지역 공연도 하는 마츠리 같은 이벤트가 열릴 때는, 한 바퀴 돌면서 이것저것 사 먹고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우에노 동물원 https://maps.app.goo.gl/VCLkqhUPBPnVuc3y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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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은행나무의 마성과 검객의 상상


우에노의 역사를 보면 공원을 중심으로 사무라이가 살았다고 하는 곳과 시장과 저수지 등 시타마치(下町, 아랫동네)가 같이 한 덩어리가 되어 성장한 것 같다. 내가 십수 년 전에 처음 왔을 때는 우에노 공원 전체를 홈리스들이 점령하고 있었다. 미술관과 박물관 사이의 나무숲에는 파란 텐트들이 즐비했으며 무료 급식소도 운영되고 있었다. 지금은 그 텐트들이 말끔히 사라졌다. 도쿄도의 정비 사업 덕분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분들이 모두 집을 구했을 리는 만무하다. 눈앞에서 치운다고 없어지는 걸까. 어디로 갔을까. 나는 지금도 그 질문이 마음에 걸린다.

가을 축제 기간에는 넓은 공원 곳곳이 아크로바틱 퍼포먼스를 하는 예술가들과 어린 학생으로 보이는 밴드들의 버스킹으로 쏠쏠한 볼거리를 제공했다. 홈리스들과 버스킹의 혼재 역시 이 동네의 정체성이었다.

하지만 그 가을의 우에노가 주는 가장 큰 매력은 은행나무들이다. 넓은 공원 전체에 빼곡히 있는 은행나무들이 늦가을이 되면 노란 잎들을 땅 위로 쌓아 내리고, 그게 마침 '은행나무 침대'처럼 보이는 거다. 거의 발목까지 빠지는 은행나무 단풍 길에 머리 위로 또 노란 단풍이 바람에 날릴 때는, 우에노의 정체성 혼란이고 뭐고 간에, 정말 내가 한 자루의 칼을 들고 천 년을 이어 한 여인을 사랑하는 검객이라도 되어야 할 것 같은 상상 속에 빠지기도 했다.

IMG_4284.heic 우에노 역 앞의 은행나무


국립서양미술관: 르코르뷔지에의 천창과 미로의 하늘


이런 기억 속에도 우에노를 여행객 시절에 자주 찾게 된 이유는 오직 하나, 국립서양미술관 때문이었다. 근대 건축의 거장 르코르뷔지에가 설계한 이 미술관은 2016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으며, '무한 성장 미술관'이라는 개념으로 지어졌다. 나를 가장 사로잡는 것은 이 미술관의 1층 중정(19세기 홀)이다. 조각상들의 전시장에서 볼 수 있는 중정과 하늘은 시간을 멈출 수 있는 장소이다.

그리고 상설 전시관 1층에는 스페인 초현실주의 화가 호안 미로(Joan Miró)의 작품 「The Sky(Le Ciel, 하늘)」가 걸려 있다. 미로의 그림이 있는 공간과 르코르뷔지에가 설계한 삼각형 천창 사이에는 공간적인 거리가 있다. 하지만 나는 천창을 통해 쏟아지는 그 자연의 빛을 온몸으로 받으면서, 마음속으로 미로의 하늘과 연결시킨다. 인공조명이 아닌 진짜 하늘의 빛이 건물 안으로 끌어들여지는 그 순간, 그리고 미로가 캔버스에 담아낸 하늘. 그 둘은 같은 건물 안에 있고, 나는 그 사이 어딘가에 서 있다.

내가 끝나고 무(無)로 돌아가더라도 나의 의미가 저처럼 우주 한가운데로 접속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늘 가지게 된다. 색깔도 내가 좋아하는 흰색과 은색의 중간이다. 입장하기 전 마당에서 여전히 생각 중인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을 보고, 안으로 들어와 천창 아래 미로의 하늘 앞에 서 있으면, 우에노의 혼돈이 잠시 고요해지는 기분이 든다.

-국립서양미술관 https://maps.app.goo.gl/YaEuQreHoo3kb7pY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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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각형 천장과 호안 미로의 The sky

포인트와 포인트 사이


우에노는 참 갈 곳이 많지만, 신주쿠, 하라주쿠, 긴자 등 다른 지역과는 달리 하나로 정의하기가 무척 어렵다. 다만 포인트 포인트로 기억될 뿐이다. 자라 등 위의 쥐처럼, 이 동네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것들이 태연하게 공존한다. 그래도 한 포인트 한 포인트가 워낙 강력하기 때문에 그 사이의 심리적 거리감을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 특히 우에노의 가을 은행나무는 심장에 젊은 날의 상상을 불어넣어 주기에 충분한 마성을 가지고 있다.

여행인데 갔다고 다 좋을 수 없어도, 하나라도 제대로 기억된다면 가치가 충분히 있는 거 아니겠는가?

(다음 편은 니혼바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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