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를 찾아온 분을 니혼바시에 데려갔다간 시큰둥한 반응을 일으키기 십상이다. “여길 왜?”....
하지만 거주하는 사람에게는 문화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상업적으로나 의미가 있는 곳이 있다. 바로 니혼바시를 중심으로 한 주오도오리(中央通り)다.
신주쿠나 하라주쿠, 시부야, 긴자, 아사쿠사 등 지나다니는 분들 반은 관광객인 곳들처럼 이름을 화려하게 알리지 않아서일까, 니혼바시는 관광객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다. 하지만 이 길이야말로 일본 경제의 심장이 뛰는 곳이고, 그 박동이 긴자의 소비로 이어지는 혈관 같은 거리다. 서울의 강남대로처럼 쭉 뻗은 이 길 양쪽으로는 일본은행 본점, 미츠이 그룹 본사, 노무라 증권 본사…. 일본 경제 권력이 집결한 거리가 긴자로 이어진다. 돈이 흘러내려가 소비가 되는 구조랄까.
그런데 나는 왜 이곳을 갈까? 관광객에게는 평범한 거리일지 몰라도 이곳에서는 도쿄 사람들이 실제로 무엇을 사고 무엇을 먹는지를 슬쩍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도쿄에서 백화점을 찾는 현지인들이 어떤 것을 사고 어떤 것을 먹을지를 살펴볼 수 있는 곳이 이 거리의 두 백화점이다. 둘 다 외관은 압도적인데 비해 내부는 일견 시간이 멈춰 있는 듯하지만, 요소요소에 힙한 것들이 없는 듯 배치해 두었다. 해외나 일본의 하이앤드 브랜드들도 있지만, 내 눈에 더 들어오는 건 따로 있다. 메이드 인 재팬의 지팡이, 고급 기모노, 상복이 버젓이 한 층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 백화점이 단순히 물건을 파는 곳이 아니라, 일본인의 생활 의례를 받쳐주는 공간이라는 것을 이 거리에서 새삼 확인하게 된다.
니혼바시(日本橋)는 단순한 다리가 아니다.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 막부를 열면서 이 다리를 고카이도(五街道)의 기점으로 정했다. 에도에서 뻗어나가는 도카이도(東海道), 나카센도(中山道), 닛코카이도(日光街道), 오슈카이도(奥州街道), 고슈카이도(甲州街道) — 다섯 가도 모두의 출발점이 이 다리 위였다.
지금도 다리 한복판 도로 중앙에는 50센티 사방의 청동 플레이트가 박혀 있다. ‘일본국도로원표(日本国道路元標)’. 일본 주요 국도의 기점이 바로 이곳이다. 일본의 어디서든 “도쿄까지 ○○km”라고 쓰여 있다면, 그 거리는 이 플레이트에서 잰 것이다.
-니혼바시 https://maps.app.goo.gl/aZjxEoKMWhzDfme3A
현재의 다리는 1911년 완성된 석조 아치교로, 관동대지진과 도쿄 대공습을 버텨내고 1999년 국가 중요문화재로 지정됐다. 다리 난간에 새겨진 ‘日本橋’라는 글씨는 에도 막부 마지막 15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徳川慶喜)가 직접 쓴 것이다. 그 글씨 아래로 지금은 수도고속도로가 덮고 있어, 다리는 항상 그늘 속에 있다. 참고로 이 고속도로는 2035년 완공을 목표로 지하 이전이 추진되고 있다. 10년 뒤, 처음으로 하늘이 열린 니혼바시를 꼭 한 번 보러 오고 싶다.
다리 중앙에는 청동 기린상이 서 있다. 높이 약 1.5m, 네 마리가 좌우에 나뉘어 한쪽은 입을 벌리고 한쪽은 다물고 있다 — 마치 금강역사상처럼. 원래 전설 속 기린에는 날개가 없다. 그런데 이 기린에는 날개가 달려 있다. “모든 길의 출발점으로서, 여기서 일본 전국으로 날아오를 수 있도록”이라는 염원을 담아서다.
이 기린상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 『기린의 날개(麒麟の翼)』의 무대로 유명하다. 한국에서는 아베 히로시 주연의 영화 《기린의 날개 ~극장판 신참자~》(2012년)로도 알려진 곳이다. 소설과 영화 속에서는 “수도고속도로가 머리 위를 막고 있어 기린이 날아오르지 못한다”는 설정이 극의 중요한 장치로 등장한다. 지금은 그렇다. 하지만 2035년, 고속도로가 걷히면 기린은 비로소 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가끔 이 다리 아래로 유람선이 지나간다. 니혼바시 강(日本橋川)을 따라 이어지는 수상 투어로, 도심 한가운데서 강으로 연결되는 도쿄의 또 다른 얼굴을 볼 수 있다. 빌딩 숲 사이를 조용히 흘러가는 배에서 올려다보는 수도고속도로와 석조 아치의 조합은 어딘가 도쿄의 모순과 매력을 동시에 담고 있다.
다리 바로 옆, 진행 방향 오른쪽에 웅장하게 자리한 건물이 미츠코시(三越) 백화점 본점이다.
- 니혼바시 미츠코시 본점 https://maps.app.goo.gl/zZe5okjfHmeo1ZTBA
1914년 일본 최초의 근대 백화점 가운데 하나로 문을 열었고, 현재 건물은 1935년 증축·개수가 완료된 모습이다. 당시 국회의사당, 마루빌딩에 이어 일본 최대급 건축물 가운데 하나였다. 서양 고전 양식의 외관을 유지하면서도 내부 중앙 대홀과 특별 식당은 아르데코 양식으로 마감되어 있다. 2016년 국가 중요문화재로 지정됐다.
정면 현관에는 런던 트라팔가 광장의 사자상을 연상케 하는 라이온 상 한 쌍이 손님을 맞이한다. ‘미츠코시의 수호신’이라 불리며 니혼바시에서 가장 유명한 만남의 장소다. 그리고 이 사자상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이 정면에 드리워진 커다란 노렌(暖簾)이다. 쭉 뻗은 길 위에서 저 멀리서도 보이는 이 노렌 하나가 “여기는 일본의 백화점입니다”라는 것을 선명하게 선언한다. 글로벌 럭셔리 브랜드의 로고 간판 대신 천에 새긴 문양 하나로 존재감을 드러내는 방식. 그것만으로도 이 집의 내공이 느껴진다.
그 노렌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본관 한가운데서 시선이 멈출 수밖에 없다. 1층 중앙홀에서 5층 높이까지 솟아오른 천녀상(天女像), 일명 ‘마고코로상(まごころ像)’이다. 높이 10.9m, 무게 6.75톤. 조각가 사토 겐겐(佐藤玄々)이 오랜 시간에 걸쳐 완성한 작품으로, 수령 수백 년 된 히노키 목재를 사용해 제작되었다. 표면에는 다이아몬드, 마노 등 보석 약 1만 2천 개가 장식되어 있다. 1960년에 세워진 이 상은 이후 백화점의 상징적인 존재가 되었다.
양 옆으로 눈을 돌리면 유명 브랜드의 선글라스, 가방 등이 눈에 들어오지만, 중앙 라운지의 정면만 보고 있자면 3층 난간 어딘가에 영화 〈암살〉의 여주인공이 총을 겨누고 있을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잘 만들어진 영화 세트 안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 쇼핑을 하러 왔는데 자꾸 멈춰서 올려다보게 되는 곳이다.
중앙홀 계단을 오르면 파이프 오르간이 설치되어 있고, 대리석 계단을 꼼꼼히 들여다보면 암모나이트 화석도 확인할 수 있다. 6층에는 진짜 무대를 갖춘 미츠코시 극장(三越劇場)이 있다.
긴자 미츠코시와 무엇이 다른가. 한마디로, 여기는 외국인 관광객보다 일본 현지 분들이 주로 찾는 곳이다. 긴자 미츠코시가 글로벌 럭셔리 브랜드와 해외 관광객 면세 코너 중심으로 꾸려져 있다면, 니혼바시 본점은 일본 전통 공예, 노포 과자, 화과자, 도자기 등 ‘일본다움’을 파는 구성이 훨씬 두드러진다. 앞서 말한 지팡이, 오복, 의례복이 버젓이 층을 차지하고 있는 것도 그 이유다. 긴자는 세계를 파는 백화점, 니혼바시는 일본을 파는 백화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츠코시를 나와 큰길을 따라 걷다 보면 니혼바시 미츠이 타워(日本橋三井タワー)가 나온다. 이 건물 1~2층에 자리한 센비키야 총본점(千疋屋総本店)은 1834년 창업의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과일 전문점 가운데 하나다. 190년 넘는 역사를 이 자리에서 이어오고 있다.
- 센비키야 총본점 니혼바시 https://maps.app.goo.gl/JWYB8yxyuUdioYA17
1층 매장에 들어서는 순간, 진열대를 보고 잠깐 멈추게 된다. 색깔도, 모양도, 크기도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과일들이 보석처럼 진열되어 있다. 품평회 상위 입상 생산자의 '마스크 멜론'을 비롯해, 센비키야의 이름을 걸고 엄선한 것들만 가져다 놓는다.
그래서 가격도 진지하다. 고급 마스크 멜론 한 개가 수만 엔. 곶감 하나에 한국 돈으로 4만 원, 바나나 한 개가 4천 원쯤 한다.
“이 과일은 도대체 어떤 맛일까?”
마지막 베팅을 해야 패를 볼 수 있는 도박판처럼, 여기도 가격을 지불해야 맛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꼭 내가 확인해야겠다는 생각까지는 들지 않는다.
2층 프루츠 파를러에 올라가면 이 가게의 메인 아이템인 멜론 파르페를 볼 수 있다. 기념 한정 멜론 파르페가 4,620엔. 긴자 '시세이도 팔러'나 '와코'보다도 비싸다. 이건 굳이 도전해 봤다. 멜론의 당도도 풍부하고 생크림도 절제된 단맛을 가지고 있고 아주 부드럽다. 훌륭한 맛이다. 그런데 “이것 두 개면 애지간한 브랜드 반팔 티셔츠 하나다”라는 생각이 들자, 그 계산이 맛을 밀어내어 버렸다.
미츠코시에서 긴자 방향으로 한참 걷다 보면, 다시 한 번 걸음을 멈추게 되는 건물이 나온다. 다카시마야(髙島屋) 니혼바시 본점이다. 1933년 완공. 중앙도오리에 면한 외관은 서양 르네상스풍에 일본풍을 접목한 양식 건축이다. 2009년 백화점 건물로는 일본 최초로 국가 중요문화재로 지정됐다.
- 다카시마야 https://maps.app.goo.gl/EiSZUUSaTzGfgr9Y6
미츠코시가 사자상과 노렌이라면, 여기는 정면에 ‘高’라고 적힌 커다란 깃발 두 개를 백화점 정면에 사선으로 깃대를 세워 펄럭이게 하고, 입구에 대형 노렌을 걸어두었다. 유럽의 성 입구에 들어서는 듯한 느낌이다.
본관을 들어서면 1층과 2층에 걸쳐 이탈리아산 황갈색 대리석 기둥이 늘어선 로비가 펼쳐진다. 여기도 영화 한 장면이다. 2층 난간을 보면 1930년대 파리 갤러리 라 파예트의 여인들이 아래를 내려다보며 긴 궐련을 물고 있을 것 같은 장면이 연상될 정도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엘리베이터다. 미국 오티스(OTIS)사 제조로, 창건 당시의 케이지를 손봐 가며 지금도 쓰고 있다. 그리고 이 엘리베이터를 안내원, 즉 엘리베이터 걸이 수동으로 조작한다. 절도 있는 동작으로 문이 열리고 닫히고, 올라가고 내려가는 것을 직접 표현한다. 우리 어린 시절의 로망이 여기에 아직도 남아 있다. 디지털화, 성인화가 권장되는 이 시대에, 이 서비스만큼은 효율보다 품격을 택했다는 선언처럼 느껴진다.
다카시마야를 지나 긴자 쪽으로 계속 걸어 나오면, 교바시(京橋) 교차로 근처에 모던한 유리 건물이 하나 들어온다. 아티존 미술관(Artizon Museum)이다.
- 아티존 미술관 https://maps.app.goo.gl/i8nVwR2BqVaG1Q568
1952년 브리지스톤 미술관으로 문을 열었다가, 건물을 새로 지으면서 2020년 아티존 미술관으로 이름을 바꿔 재개관했다. ‘ARTIZON’은 ART(아트)와 HORIZON(지평)을 합친 조어. “시대를 개척하는 아트의 지평을 느껴달라”는 뜻이다.
브리지스톤 창업자 이시바시 쇼지로(石橋正二郎)가 수십 년에 걸쳐 모은 컬렉션이 토대다. 약 3,000점을 소장하고 있으며, 모네·세잔·고갱·피카소·마티스·로댕 등 인상파와 20세기 서양미술의 주요 작가들부터, 구로다 세이키·후지타 쓰구하루 등 일본 근대 양화까지 폭넓게 아우른다. 칸딘스키·잭슨 폴록 같은 추상화, 고대 그리스·로마·이집트 조각·공예품도 있다. 최근에는 모네 사후 100주년 전시회가 열려 연말 당일 티켓이 완판을 기록하기도 했다. 작품 사이의 간격도 넉넉하고, 조명과 공조도 세심하게 설계되어 있다.
주오도오리에 해가 떨어질 때면 ‘ㄱ’자 LED 가로등들이 양쪽으로 쭉 정렬한다. 강남대로의 LED 광고 입간판들처럼 화려하지 않아도, 백색 베이스의 가로등 배열은 이 거리의 품격을 더해준다. 교토가 일본의 전통을 보여주는 곳이라면, 이 주오토오리는 경제로 일어난 일본의 과거와 현재를 보여주는 거리라고 생각한다. 1850년대 개항과 메이지 유신으로 외국에 문호를 개방하고 부국강병을 이끌어온 일본의 저력이 이 거리의 건물들 사이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여행자와 거주자의 사이 어딘가에 서 있는 나로서는, 도쿄를 단순 쇼핑의 성지로만 보는 관점에서 도망 나오고 싶으면서도, 도처에서 역사적 의미와 시사점을 발견해야 한다는 무거움에 빠져들고 싶지 않은 — 딱 그 중간 지점에 서고 싶을 때 이 거리를 걷게 된다. 이 거리는 역사이면서도 역사의 티를 내지 않는다. 그리고 밤이 되면, 일본 경제를 돌리던 일개미들이 주오도오리 큰 빌딩 숲 뒤쪽에 자리 잡은 이자카야를 찾아, 2시간 노미호다이 코스로 하루의 시름을 잊는다. 그 풍경까지 포함해서, 이 거리다.
(다음은 도쿄 역으로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