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폰기(六本木)는 낮과 밤이 다른 곳이다. 낮에는 롯폰기 힐스(六本木ヒルズ)를 중심으로 관광객들이 오가고, 미드타운(東京ミッドタウン)을 중심으로 도쿄에서도 제법 산다는 분들의 쇼핑 공간이 롯폰기 사거리(六本木交差点)의 고가도로를 중심으로 서로 나누어져 있다. 이 고가도로에는 'Roppongi'라는 하얀색 네온이 붙어 있는데, 이 네온이 켜지는 시간부터는 사거리를 중심으로 클럽의 밤이 활성화되면서 낮과 다른 밤이 된다.
롯폰기 사거리 주변에는 클럽들이 즐비하다. 층층이 쌓인 대형 클럽부터 아기자기한 바와 라운지까지, 금요일 밤이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고 내려가는 인파가 끊이지 않는다. 특히 금요일 밤이 되면 보통 성인 몸의 두세 배는 되는 듯한 정장 차림의 외국인 가드들이 거리 곳곳에 보이며, 신기하게도 유창한 일본어를 구사하고 있다. 여행객들 입장에서 현지인의 안내 없이 이런 곳들을 드나드는 것은 쉽지 않다. 어느 나라를 여행하든 이런 클럽가는 으레 피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예전에 여행자로서 도쿄에 왔을 때, 롯폰기 사거리 근처에 교통도 편하고 숙박비가 다른 지역보다 저렴한 호텔이 3~4곳 있어 이용했던 적은 있지만, 밤에 돌아다닌 적은 없다. 외국인 가드 형들의 크기에 눌린 까닭이 크다.
토요일 아침에 브런치를 먹으러 나가게 되면, 금요일에 너무 달렸나 싶은 젊은 남녀들이 여전히 몸을 가누지 못하고 떠들거나, 그중 몇몇은 근처 가로수 옆에서 간밤에 먹은 것들을 확인하고 있는 분들도 있다. 참 도쿄답지 않은 모습이다. 그런데 10시가 넘어가고 일상이 시작되면 언제 그랬냐 싶게, 도쿄 미드타운과 롯폰기 힐스를 중심으로 다시 각자의 역할들로 번잡해지는 곳이 롯폰기이다.
롯폰기 미드타운은 참 재미있는 곳이다. 미드타운은 아카사카(赤坂)와 노기자카(乃木坂)로 이어지는데, 일본의 대표적인 고급 주택가를 끼고 있다. 아카사카와 미나미아자부(南麻布) 일대는 외국 대사관저와 고급 맨션이 혼재하는 지역으로, 조용한 골목마다 상당한 재력이 느껴지는 동네다. 이 일대 부동산 가격은 도쿄에서도 손꼽히는 수준으로, 롯폰기라는 이름이 가진 클럽가의 이미지와 달리 그 이면은 도쿄에서 가장 조용하고 부유한 주거 지역 중 하나이다.
- 히노키초 공원 https://maps.app.goo.gl/Ntaxsse9mieL2grF9
롯폰기 미드타운 뒷편의 히노키초 공원(檜町公園)은 바깥에서 보면 그 정체를 전혀 알 수 없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울창한 나무와 숲 사이에 제법 큰 연못이 감춰져 있는 곳이다. 큰 연못 한켠에는 툇마루처럼 처마가 있는 쉼터가 있어, 한여름에도 롯폰기 비싼 땅 한가운데서 무심히 연못에 떠 있는 오리를 볼 수 있다. 바로 옆 놀이터에는 아이들이 뛰어다니고, 여름에는 바닥 분수가 있어 웃음소리가 그치질 않는다. 그리고 유모차에 타고 그 모습을 바라보는 강아지들의 시크한 표정들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곳이다. 도쿄에서 개는 종종 아이보다 더 어엿한 가족 구성원처럼 대접받는다.
아카사카 쪽에서 미드타운으로 넘어가는 브릿지는 미드타운 뒷면의 또 다른 휴식 공간을 볼 수 있는 좋은 시점이다. 봄에서 가을까지는 넓은 잔디밭에 조각 작품들이 놓여 있다. 미드타운 가든(ミッドタウン・ガーデン)에는 매년 국내외 아티스트의 조각과 설치 작품들이 야외에 배치되어, 산책하다 자연스럽게 미술과 마주치게 되는 구조다. 여름에는 직장인이나 거주민들이 잔디밭에 시트를 깔고 공원의 여유를 만끽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특히 봄에는 그 브릿지에서 노기자카 쪽을 바라보면, 도쿄에서 제일 비싼 아파트 중 하나인 파크코트 아카사카 히노키초 더 타워(パークコート赤坂檜町ザ・タワー)가 혼자 쭉 하늘로 뻗어 있는 모습도 보이지만, 미드타운 지하 차량 진입로 도로 양쪽으로 벚꽃들이 만발한 모습은 파란 잔디밭과 고층 빌딩과 함께 도쿄 도심의 절경 중 하나이다. 비싼 동네여서 그런지 벚꽃들도 비싸 보인다.
도쿄 미드타운은 은근히 볼거리가 많은 곳이다. 미드타운 웨스트 1층에는 후지필름 스퀘어(FUJIFILM SQUARE)가 있다. 카메라와 사진 관련 상설 전시는 물론, 수시로 기획 사진전이 열리는 공간으로, 카메라에 특별한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잠시 들러 작가의 설명과 함께 전시를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필름 카메라의 역사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클래식 카메라의 매력에 빠지게 되는, 입장료도 없는 소박하지만 정성스러운 공간이다.
3층에는 산토리 미술관(サントリー美術館)이 있다. 구마 겐고(隈研吾)가 설계한 이 공간은 일본의 고미술과 공예품을 주로 다루는 미술관으로, '생활 속의 미(美)'를 테마로 도자기, 옻칠 공예, 유리 공예, 섬유 등 일본 전통 공예의 정수를 소개한다. 전시 기획이 탄탄한 편이고, 특히 뮤지엄 숍의 굿즈가 제법 살 만한 곳이다. 전시와 공간의 분위기가 잘 어울려, 미술관 자체보다 그 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기억에 남는 곳이기도 하다.
미드타운 후면의 가든 안쪽에는 21_21 DESIGN SIGHT가 있다. 창립자는 패션 디자이너 이세이 미야케(三宅一生)이고, 설계는 건축가 안도 다다오(安藤忠雄)가 맡았다. 이 건물은 이세이 미야케의 A-POC, 즉 '한 장의 천으로 모든 것을 만든다'는 개념에서 영감을 받은, 강철 지붕과 노출 콘크리트 디자인을 특징으로 한다. 지상 1층에 지하 2층 규모로, 지상에 드러난 부분보다 지하 공간이 더 큰 친환경적인 디자인 미술관이다. 겉에서 보면 그냥 납작한 온실 같다. 그런데 들어가서 지하로 내려가 보면, 빛의 마술사라 불리는 안도 다다오 특유의 방식대로 사선 천장의 다양한 방향에서 들어오는 빛이 별도의 조명 없이도 전시장을 가득 채운다. 시멘트 벽면이 그대로 드러난 전시실은 화려함과 거리가 멀지만, 그 정직함이 오히려 매력적이다. 사진 한 장 건지기에도 좋은 곳이다.
미드타운에서 좀 걸어가면 노기자카 쪽에 국립 신미술관(国立新美術館)이 있다. 물결치듯 굴곡을 이룬 유리 파사드가 매력적인 이곳은 상설 전시 없이 기획 전시만 운영하는 특이한 형태의 미술관이다. 과거 불가리 보석전 전시나 루이비통 컬렉션 전시처럼, 아트와 럭셔리 브랜드의 경계를 넘나드는 기획력 있는 전시를 열어온 곳이다. 미술품보다 오히려 3층 유리 난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역원뿔 형태의 거대한 콘크리트 기둥들이 마치 팽이처럼 바닥에 세워진 모습이 시선을 잡아끈다. 마치 거대한 파티장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느낌이다. 1층 카페 야외 데크는 한여름에도 도심 속 녹음을 즐기기에 아주 편안한 곳이다.
- 후지필름 스퀘어 https://maps.app.goo.gl/tfXSkoAhjsLTjyTw5
- 21_21 디자인 사이트 https://maps.app.goo.gl/cWrVa7Coo1CWvgDb8
- 국립신미술관 https://maps.app.goo.gl/gtid4ZLFEHdXNPcQ6
도쿄를 다니다 보면 '힐스'가 붙은 지명이 많다. 힐스는 언덕을 뜻하는 보통명사이기도 하지만, 도쿄에서 힐스는 곧 하나의 브랜드다. 롯폰기 힐스(六本木ヒルズ), 아자부다이 힐스(麻布台ヒルズ), 도라노몬 힐스(虎ノ門ヒルズ), 아크 힐스(アークヒルズ), 모토아자부 힐스(元麻布ヒルズ) 등은 모두 '모리 빌딩(森ビル)'이라는 부동산 개발회사가 재개발한 지역에 붙이는 이름이다. 모리 빌딩은 도쿄도 미나토구(港区)를 거점으로 하는 도시 개발업체로, 아크 힐스와 롯폰기 힐스, 오모테산도 힐스(表参道ヒルズ) 운영 등으로 알려져 있다. 단순히 건물을 짓고 분양하는 방식이 아니라, 직접 관리·운영하며 임대료 수입을 얻는 방식으로 작은 도시를 '운영'하는 타운 매니지먼트 개념을 실현해 왔다. 그렇게 모리 빌딩은 단순한 부동산 회사가 아닌, 그 자체로 하나의 도시 브랜드가 되었다.
한편 '미드타운'은 다른 이야기다. 롯폰기, 히비야, 야에스에 있는 세 곳의 미드타운은 미쓰이 부동산(三井不動産)이 개발한 복합시설 브랜드로, 모리 빌딩과는 별개의 회사다. 도쿄의 두 거대 부동산 개발사가 만들어낸 두 세계가 롯폰기라는 한 동네 안에 나란히 공존하고 있는 셈이다.
그 중 롯폰기 미드타운은 세 곳의 미드타운 중 가장 오래되었고, 내부 매장들은 주변 고급 주택가의 수요에 맞춰져 있다. 갤러리아(ガレリア)를 중심으로 명품 브랜드, 디자인 브랜드와 편집형 브랜드들이 입점해 있고, 지하 1층에는 슈퍼마켓과 다양한 식음 매장들이 들어서 있다. 낮에 지하 매장 안을 들여다보면 도쿄의 여느 번화가와 달리 관광객보다 현지 주민들이 주 고객임을 느낄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슬람교도들을 위한 기도실(礼拝室)이 마련되어 있다는 점이다. 도쿄의 다른 대형 상업 시설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배려로, 국제적인 거주민 구성을 반영한 롯폰기다운 디테일이다.
- 도쿄 미드타운 https://maps.app.goo.gl/LCXePueSZsahB5rj8
도쿄 미드타운 쪽이 거주민의 공간이라면, 롯폰기 힐스 쪽은 여행객의 공간이다. 롯폰기 힐스에는 쇼핑 센터가 있다. 유나이티드 애로우(UNITED ARROWS) 같은 편집숍부터 자라(ZARA) 등도 있고, 명품 매장도 있지만, 건물 구조 상 매장 위치를 찾기도 어렵고 쇼핑에 특별한 메리트는 없는 곳이다.
- 롯폰기 힐스 https://maps.app.goo.gl/6aEDFvKuW8tN2SUFA
하지만 이곳의 전망대 쪽은 사뭇 다르다. 모리 타워(森タワー) 52층에는 실내 전망대 '도쿄 시티 뷰(東京シティビュー)'가, 53층에는 모리 미술관(森美術館)이 자리하고 있다. 도쿄 시티 뷰는 해발 약 250m, 높이 11m를 넘는 360도 유리로 개방감 넘치는 전망 공간으로, 날씨가 좋으면 멀리 후지산(富士山)까지 조망할 수 있다.
도쿄에는 여러 전망대가 있다. 최근에는 스카이트리(東京スカイツリー)나 시부야 스크램블 스퀘어 전망대(渋谷スクランブルスクエア展望台)가 유명하다. 그런데 높이 올라가서 모두 발 아래로 본다고 다 좋은 건 아니다. 내가 세상을 즐길 만한 적당한 높이, 그게 모리 전망대의 높이이다. 스카이트리는 너무 높아서 겉에서 보면 그 위엄이 대단하지만,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면 도쿄가 너무 작아진다. 시부야 스크램블 스퀘어 전망대는 야외가 유리로 구성되어 있어 석양을 배경으로 서 있는 인물을 담기 너무 좋은 곳이다. 하지만 도쿄 자체를 즐기기엔 너무 높다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도쿄라는 도시와 나의 거리감이 더 크게 느껴진다. 그에 비해 모리 전망대는 내 눈이 디테일을 인식할 수 있을 정도로 도시와 교감이 된다. 도쿄 타워(東京タワー)의 노랗고 빨간 색감을 여지없이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작년 연말에 올라갔을 때에는 에반게리온 전시회를 함께 하고 있어서 유리창에 에반게리온 모형의 네온이 반사되어 깔끔한 야경을 볼 수 없었는데, 그럼에도 마음속에 도쿄 야경하면 킷테(KITTE) 7층 루프 가든에서 본 도쿄역과 함께 모리 전망대에서 본 도쿄 타워가 도쿄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요즘 일본 드라마를 보면 스카이트리가 도쿄의 상징처럼 자주 등장하지만, 여전히 내 마음의 1순위는 도쿄 타워이다.
모리 미술관은 현대 미술을 중심으로 패션, 건축, 디자인, 사진, 영상 등 다양한 장르의 기획전을 연다. 일본과 아시아, 그리고 세계 각국의 참신한 작가들의 전시를 선보이는 국제적인 현대 미술관으로, '살아 있는 미술관'을 지향한다. 여러 번 다녀왔지만 작품보다 그 공간이 주는 사고의 확장, 낯선 소재에서 받은 영감 같은 것들이 더 오래 남는 미술관이다. 밤 10시까지 운영해 저녁 식사 후에 올라가도 여유롭게 즐길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롯폰기 힐스 아래에는 TV 아사히(テレビ朝日)가 있다. 유리 아트리움으로 구성된 본사 건물 로비는 일반인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데, 안으로 들어가면 도라에몽(ドラえもん), 짱구(クレヨンしんちゃん), 코난(名探偵コナン) 같은 TV 아사히의 인기 캐릭터 등신대 피규어들이 여기저기 자리를 잡고 있다. 일본 애니메이션 1세대들에게는 짱구와 한 컷을 통해 어린 시절의 향수를 연장하는 것도 여행의 재미있는 한 장면이 될 것이다. 입장료도 없으니 잠깐 들러보는 것을 추천한다.
롯폰기에서 들르는 매장은 거의 정해져 있다. 미드타운 2층에 하브스(HARBS)라는 카페가 있다. 도쿄 안에 여러 지점을 가진 케이크 전문점으로, 이곳의 밀크레이프와 과일 타르트는 도쿄에서 먹을 수 있는 케이크 중 최상위에 속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격은 케이크 한 조각에 1,000엔 안팎으로 비싼 편이지만, 부자 동네에서의 부자 흉내로는 더없이 좋은 경험이다. 물론 케이크가 정말 맛있다. 강추한다.
- 하브스 도쿄 미드타운 https://maps.app.goo.gl/vrfKURiCSU88VR1r5
미드타운 지하 1층의 음식점 코너는 예상 외로 근처 직장인을 위한 공간이다. 오야코동 가게, 한식 가게, 카이센동 체인 '츠지한(つじ半)' 지점, 샐러드 가게 등이 있다. 그중 우동집이 있는데 아주 굵은 면에 멸치 베이스의 국물이 진하다. 일본에서 우동을 주문할 때 재미있는 것 중 하나가 면의 양을 지정한다는 건데, 1.5배, 2배 등을 지정해도 별도 요금을 받지 않는다. 도쿄에서 외식할 때 뭐든 조금이라도 추가하면 야박하게 돈을 받는데, 우동 면 추가만큼은 그냥 해주는 경우가 대다수다. 도쿄는 우동 인심, 밥 인심만은 최고인 것 같다.
이래저래 롯폰기 일대를 돌아다니면 금방 해가 지고, 고가도로에 'Roppongi' 네온 사인이 빛나기 시작한다. 슬슬 집에 들어갈 때다. 여기서 잠깐, 전철로 가기 전에 사거리에서 롯폰기 도리이자카(鳥居坂) 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약간 굽은 2차선 좁은 도로의 높은 빌딩들 사이로 도쿄 타워가 떡 하니 버티고 있다. 이를 배경으로 사진 한 장 찍으면, 감성 충만한 도쿄 여행은 완성될 것이다.
롯폰기의 밤은 알 수가 없다. 다녀보지 않았으니까. 마찬가지로 내가 아무리 많은 도쿄 경험을 했더라도, 나는 단지 여행자일 뿐이고 도쿄의 만 분의 일도 모를지 모른다. 그렇게 도쿄의 밤은 깊어간다.
(다음은 도쿄 자전거 투어 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