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 세계를 가다 (1)

한류 변천사

by 하임

한국의 문화콘텐츠가 코로나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코로나 이전보다 더 폭넓고 강하게 진화하고 있다. 넷플릭스 등 전 세계적인 OTT가 한국에 상륙했을 때 어떤 전문가들은 한국 콘텐츠 소비자들이 압도적인 해외 영화와 TV시리즈 물 등을 경험하면서 한국 자체 드라마나 영화가 경쟁력을 잃게 되고, 한국 드라마 시장을 붕괴될 것이다라는 예측을 하기도 했다. 코로나로 국가 간 이동이 막혀버렸을 때 어떤 전문가들은 K-POP 기획사들의 주요 수입원이었던 해외 현지 공연이 당분간 불가능하니 K-POP의 종횡무진도 끝났다는 예측도 했었다. 하지만 이러한 예측들은 현재의 결과치에서 한참이나 벗어났다. 이쯤에서 많은 사람은 질문을 던질 것이다.


- 지칠 줄 모르는 한류 성장의 힘은 어디에서 왔는가?

- 위드 코로나 그리고 애프터 코로나에도 한류는 지속 가능할까?


이 연재 글은 전 세계 10 여 개국에서 K-POP 공연을 이어갔던 필자의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그간 축적된 자료와 한류 연구들을 찬찬히 살펴보면서 위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아보려고 한다.


출발점은 한류의 시대 변천사이다.


한류변천사 .png 한류 변천사 (참조 현대 경제 연구원 경제 주평 888호)


한류 1.0


1997년 중국 CCTV를 통해서 방영된 MBC의 <사랑이 뭐길래(1991)>가 큰 인기를 끌면서 중국 일간지 <베이징 청년보>에 '한류(韓流)'라는 단어가 처음 사용되었다고 한다. 전통 예절을 강조하면서 가정에서 아버지의 권위를 세우고 근검절약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던 대발이 아빠(이순재 역)는 당시 가정에서 점점 전통적 권위를 잃어가는 중국의 가장들에게 위로와 공감을 선사하면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후 1998년에 중국에 수출되었던 <별은 내 가슴에(1997)> 덕택에 중국에서 안자이쉬로 불린 안재욱의 인기는 급 상승했고 드라마 삽입곡 <forever>의 인기로 기반으로 안재욱 측은 당시로는 국내에서 상상하기도 어려웠던 중국 10개 도시 콘서트 투어를 계약하였다. 또한 1997년 <행복>으로 한국 대표 아이돌이 되었던 H.O.T. 는 1998년 5월 중국 현지에서 <행복>이라는 타이틀로 베스트 앨범을 발매하였다. 그 외에 NRG, 코요테, 베이비복스 등이 중국에 진출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한류의 물결은 중국과 동남아를 넘나들었다.


2002년 1월부터 3월까지 KBS에서 20회 방영되었던 <겨울연가>는 아시아 도처에서 끊어 오르고 있던 한류를 폭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2003년 NHK가 수입해서 BS 2 위성에서 <겨울 소나타>라는 제목으로 방송하였는데 공전의 히트라는 표현이 적절할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고, 시청자들의 뜨거운 요청으로 이듬해 지상파에 다시 방송될 정도였다. <겨울연가>의 일본에서의 인기는 당시 권위적인 가부장으로 대표되는 일본 남성상과 대비되는 순애보 주인공다운 이미지로 일본 중년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들은 남이섬 등 <겨울연가> 촬영지 순례를 다녔고, 한국 배우들이 일본을 방문할 때에는 공항에 몰려 나가는 등 적극적인 팬 활동의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 당시 일본의 일부 매체는 이런 중년 여성들을 아주머니를 뜻하는 오바상(おばさん)과 외계인을 뜻하는 에일리안(エイリアン)을 합성하여 오바리안(おばリアン)이라고 비꼬기도 하였다. <겨울연가>의 일본 지역 성공은 해외에서의 수입이라곤 안정성이 떨어지는 중국과 동남아 시장에 한정되어 있던 국내 드라마 업계에 일본으로부터의 콘텐츠 수입 증대와 투자의 확대가 이루어지는 계기를 촉발하였다. <겨울연가>의 외주제작사인 팬 엔터테인먼트와 KBS는 계약서가 작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드라마가 방영되었는데, 양측의 제작비, 판권 등 계약조건에서 이견이 커 쉽게 결론이 나지 않았었다. 당시는 지상파의 위세가 대단한 시절이라 많은 부분들이 갑 KBS의 뜻대로 관철되었다. 계약에서 심하게 밀린 팬 엔터테인먼트는 당시 아무도 관심이 없었던 일본 판권을 요구하였고, 중국과 동남아 판권 외에는 관심이 없었던 KBS가 이를 수용해주었다. 결과적으로 팬엔터테인먼트는 판권에서 KBS보다 거의 10배가 넘는 수익을 올렸다. 이후 NHK의 <겨울 소나타>로 인한 마케팅을 확인한 일본의 각 매체들이 한국 드라마 수입에 열을 올렸다.


한류 1.0 시대에 K-POP 부분에서 선두는 SM의 보아였다. 중국에서 국내 여러 가수들에게 행사 및 방송 요청이 이어지고 있었지만, 2001년 중국 선양에서 베이비복스와 NRG 출연의 슈퍼 한 콘서트의 경우처럼 현지 프로모터가 티켓 판매 후에 잠적하여 문제를 일으키는 일 등이 비일비재하여 한류 진출의 안정성 측면에서는 회의적인 시각도 많았다. K-POP 역시 산업적인 발전을 위해 개척하여야 하는 시장은 일본이었다. 그런데 보아를 성공시킨 SM도 직전에는 H.O.T. 와 S.E.S. 로도 일본 진출에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내지 못했다. 당시 한국 가수들의 일본 진출에서 첫 번째 문제는 계약한 현지 기획사의 한계였다. 한국의 기획사들이 현지에서 컨트롤하기 쉬운 마이너 기획사와 계약을 맺고 활동을 하다 보니, 일본 연예 산업 전반에서 영향력이 없는 마이너 기획사가 일본 진출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설사 마이너 기획사가 어렵게 일본 지상파 TV 출연을 잡아오더라도 두 번째로 부딪히는 벽이 의사소통이었다. 한국 출연자들이 통역을 통해 의사소통을 하다 보니 제대로 어필하지도 못하고 어설픈 리액션만 하다 끝나버리는 경우가 허다했다.

앞 선 실패로 수업료를 치른 SM은 일본 내 대표적인 기획사인 AVEX TRAX와 손을 잡아 배급 문제를 해결하였고, 일본어를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는 신인 보아로 2001년 3월 쇼케이스를 시작으로 일본 시장에 데뷔시켜 일약 K-POP 해외 진출의 선두주자로 부상하였다. 보아의 성공을 본 일본의 여타 기획사들이 한국에서 협업할 기획사나 아티스트를 찾고, 투자도 확대하였다. 이에 따라 디지털 음원의 등장으로 수익 악화의 우려가 있던 가요 기획사에 새로운 성장의 계기가 마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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