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의 나_3
다사다난했던 연애도 끝이 났고 무더운 여름도 어영부영 끝이 났다. 의외로 하루이틀 조금 슬펐던 것 말고는 이별의 아픔이라는 건 쉽게 지나간 것 같다.
이과생이다 보니 늘 시험기간이 되면 외울게 천지였고 친구들과 도서관에서 메뚜기도 뛰고 족보도 외우면서 시험을 쳤다. 가끔 도움이 1도 안 되는 커닝도 해보고 백지도 내봤었다. 물리나 수학시험을 칠 때면 그때마다 "수지만의 공식"이 생겨나곤 했다. 그래도 시험을 또 치고 나면 시간이 남아돌아서 근교에 여행도 다니고 취미활동도 하고 그랬었다.
지금생각해 보면 부잣집딸이었나 싶을 정도로 근처 백화점에 가서 화장품을 사고 신발을 사고 또 커피도 마셨다. 그땐 과외라는 걸 했었던 때였고 학교등록금은 장학금과 아버지네회사의 혜택으로 과외비 모두 내 돈이었던 때였다. 쉽게 버는 돈은 쉽게 나간다는 말이 틀리지 않았다. 남들은 돈 벌어서 등록금으로 모은다는데 지금생각해 보면 참 어리석었다.
여담이지만 우리 엄마는 어릴 적 해 보지 못한 게 많아서 내가 하고 싶은 건 다 하게 해 주셨다. 철없던 나는 그래도 부족하다고 징징거리기 일쑤였는데 그때의 나는 왜 그랬나 모르겠다. 모두가 그렇듯 나이가 들면서 보이는 게 달라진다. 그땐 그 세상이 전부였는데 지금 보면 별거 아닌 일 든. 그냥 어렸던 것이었다. 지금 그때로 돌아가면 좀 더 어른스럽게 굴 수 있었을까?
그때 나는 그 와중에 교환학생을 가보겠다고 토플을 준비하고 있었다. 학원도 다녔고 문제집도 많이 풀곤 했는데 성적이 맘처럼 높게 나오지 않은 탓에 지원을 해도 뽑히진 않았었다. 허영심이었던 건지 늘 외국학교에 대한 환상에 꼭 한번 가고 싶었는데 쉽지 않았던 나의 벽. 아님 어학연수라도 갔었어야 했는데 꼴에 돈만 주면 갈 수 있는 어학연수는 또 내키지 않았던 것이었다. 결국은 그 어디도 가지 못했지만 그만큼 영어실력은 어느 정도 쌓였기에 윈윈이었다고 인간승리를 해본다. 회화수업도 많이 듣고 또 학교에서 외국어행사도 많이 참가해 봐서 언어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서 좋았다. 교내외국어신문사에도 지원을 해봤는데 같이 해보자고 했던 친구는 붙고 나는 떨어졌는 대학교 다니는 내내 부러웠던 기억이 있다.
이때 좀 하고 싶었던 취미활동 많이 해볼걸 이땐 봉사활동이다 과학생회활동이다 바쁘게 지낸 탓에 그런 취미활동을 하지 않았고 지금 뒤늦게 취미활동을 한다고 돈도 시간도 많이 쓰고 있다. 그런 건 좀 아쉽다. 그때의 나에게 제일 하고 싶은 말은 그때만 할 수 있는 배낭여행이나 취미활동은 더 많이 많이 해두라고 그게 다 나의 밑거름이 된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래도 타고난 산악인인 부모님 덕에 운동신경이 있는지라 여름에 수영, 겨울엔 스키나 보드는 어렵지 않게 배우고 탈 수 있었다. 달리기도 좋아하기에 과체육대회 계주는 기본이고 체력이 필요한 곳은 어디든 달려갔다. 그렇다 보니 남들과 어울리는 게 어려움이 없었달까. 꽤나 활동적인 친구로 알려졌었다. 또 뭔가 배우는 것에 주저함이 없어서 이것저것 배우고 도전하는 게 좋았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학과학생회나 외부모임참여도 꽤나 많이 참여하게 되었다.
학과학생회를 할 때도 괄괄한 성격 탓에 선배들과도 맞선적도 많고 또 재미있게 일한 적도 많았다. 날 미워한 선배들도 있겠지? 또 내가 회계담당이라 회식비도 잘 지원 안 하고 뭐만 하면 곱게 들어주지 않았는데 그래도 너무 밉게 안 봐주셔서 지금생각하면 감사하다. 조금은 덜 열심히 일했어도 되었을 텐데 사실 학과학생회는 회장이나 부회장이 아닌 이상 덕 보는 건 없었는데 말이다. 그래도 교수님이나 학과행정실 분들이랑 조금 가까워졌었어서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좋고 학교생활 편히 했던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