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나_17
하루하루 뭔가 갑갑한 마음으로 지냈다. 사람들은 회생을 할 정도가 되면 딱 몇 년만 참자라고 다짐하면서 열심히 돈을 갚는다고 허리띠를 졸라맬 수도 있을 것이고, 그리고 좀 더 단단하게 사람을 조심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 평범하게 지내진 못했다. 그냥 벗어나고 싶었다. 이 삶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내가 돈을 갚을 일만 없다면, 내가 사기를 당하지 않았다면, 내가 고소만 당하지 않았다면. 좀 더 정상적으로 잘 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것은 여행이었다. LCC와 같은 저가 비행기를 이용해서 짧게 여행 가는 것을 선택했다. 도깨비여행이었다. 금요일에 비행기를 타고 타국에 갔고, 하루 이틀 여행을 하고 월요일에 도착해서 회사로 바로 갔다. 만만하게 갈 수 있는 곳은 일본과 동남아였다. 오키나와도 가봤고, 구마모토도 가봤다. 일본어를 잘하지는 않았지만 드라마를 보면서 들어왔던 말들을 들으면서 말이 통하면 통하는 대로 아니면 아닌 대로 돌아다녔다.
오키나와에 갔었다. 연차도 하루 정도 사용했고, 비행기왕복은 16만 원 정도로 매우 저렴하게 다녀왔다. 지금은 화재로 재건사업 중인 슈리성도 다녀왔고 투어를 다니면서 여기저기 다녀왔다. 뭔가 가볍게 갈 수 있는 곳이 일본이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신기한 곳이었다. 낯설기도 하고 뭔가 특별했었다. 오키나와의 그 파란 바다도 동해바다와는 달라 보였고, 셀카봉을 가지고 다니면서 하나하나 나를 찍는 일도 흥미로왔다. 아무도 나를 알지 못했고, 나도 그들을 알지 못했다.
길을 걸어가다가 보이는 우동집에 들어갔다. 할머니는 영어를 하나도 하지 못하셨다. 메뉴판도 없었다. 그냥 7명 정도 들어가는 작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우동집이었다. 사실 별거 없는 우동집이었다. 우동면을 따로 만드는 수타면인 것도 아니고 그냥 일반 휴게소에서 판매하는 우동과 다를 게 없었는데도 맛있었다. 그 할머니의 손길이 우동을 맛있게 만들어주었다. 아마 여행지의 마법이 음식을 더 맛있게 만든 게 아니었을까?
슈리성은 내가 봐왔던 일본의 성들과는 달랐다. 뭔가 붉은색의 흙내음이 나는 성이었다. 앞서 보았던 다른 일본의 성들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투어를 다니면서 알게 된 이야기였는데 오키나와는 일본 본토와는 다른 곳이라고 했다. 식민지로 있었던 곳이라 아주 옛 어르신들은 본인들이 일본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투어를 다니면서 배운 오키나와의 이야기도 너무 색달랐다. 그냥 예쁘기만 한 곳은 아니었다.
아메리칸 빌리지라는 곳은 미군이 주둔하면서 형성된 마음이라고 했다. 색색이 꾸며진 마을이라 또 색색이 예뻤다. 특히나 파란 하늘색과 어울려서 너무 아름다웠다. 왜 투어일정 중 하나에 들어가는 이유를 알았다. 오키나와에 있는 현민광장 거리도 뭔가 달랐다. 기념품도 팔고 관광객들이 잔뜩 있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한국인들도 보였고, 한국말로 떠드는 말도 들렸다.
그 공간에 있는 동안에는 나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한국에 있었던 일들이 떠오르지 않았고, 그냥 떠드는 사람들 틈에 있는 한낱 관광객이었다. 현실도피였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아무 사람도 없는 곳에서 모국어가 들리지 않는 곳에서 혼자 고독을 즐기는 것조차 행복했다. 일본에 와서 쇼핑도 하고 멋들어진 가방 같은 것을 사지 못해도, 돈이 부족해서 고기 같은 걸 먹지 못해도 좋았다. 편의점에 가서 컵라면을 사고 기념품 가게에서 그리 비싸지 않은 과자를 사서 숙소에서 먹는 게 그렇게나 행복했다. 그래서 여행에 빠져들게 된 것 같다. 그렇게 여행일지가 하나 둘 쌓이기 시작한 것 같다. 특히나 오키나와는 그러고도 몇 번을 더 갔었다. 뚜벅이라 렌트는 하지 못하고 투어로만 다녔는데도 부족함 없이 잘 다녔다. 오히려 한국에서 돌아다니는 것보다 더 잘 다녔던 것 같다. 나의 여행은 그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