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나_26
또 아빠와의 비밀도 생겼다. 프랑스 베르사유궁전에 갔을 때였다. 어렵게 줄을 서서 베르사유궁전에 갔는데 와, 입이 딱 벌어질 궁전이었다. 그럴 만도 했지. 한편으로는 우리나라의 궁전도 보전되었다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베르사유궁전은 화려했다. 들어가는 순간 이렇게 사치스러울 수가 있나 싶었다. 빼곡히 가득 찬 관광객들 사이로 화려함과 복잡함과 정신사나움이 공존했다. 방마다마다 돌아다니다 보니 그 옛날의 촌스러움과 고전미 그리고 화려한 미가 아름답다 여겨졌다. 나는 관광객들 사이에서 복잡함속에 혼자 감상하는 그런 느낌. 주위사람들이 블러처리된 채 침대도 보고 그 시대의 촛대도 보았다. 생각보다 내가 감상적이지 않은 건가 싶기도 하고 뚜렷하게 표현할 단어가 생각나지 않기도 하다.
그리고서 정원을 보기 위해 나왔다. 꽉 막힌 마음이 망울 터지듯 탁 터지기도 했고 갇혀있던 마음이 탁 트인 기분이기도 했다. 그걸 보니 나가야 할 시간이었음에도 베르사유궁전을 떠나지 못했다. 아빠와 함께 바쁘게 뛰어다니면서 눈에도 담고 마음에도 담았는데 더 담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그다음 여행은 오스트리아였고 오스트리아궁전과 비교해서 보고 싶었었다. 그렇게 30분만 30분만 외치다 결국 어쩔 수 없는 시간에 파리 택시를 탔다. 파리의 교통체증을 우습게 봤던 탓이었다. 샤를드골공항에 가던 길은 정말이지 시간이 멈춰버리는 것만 같았다. 차의 바퀴는 달리긴 했을까 싶을 만큼 차는 움직이지 않았고 그 악명 높은 샤를드골공항에 비행기출발 30분 전에 도착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공항에서 체크인은 하지 못했고 비행기를 타지도 못했다. 온전히 비행기 금액을 날리기도 날렸지만 오스트리아도 가지 못했다.
지금은 좀 어른이지만 나는 그때 몹시 어렸다. 내 탓이라는 생각에 화가 머리끝까지 났고 공항에서 그 화를 주체하지 못했다. 화도내고 되지도 않는 영어로 고성을 지르기도 했다. 마치 옛날의 아빠처럼. 그 순간 그걸 깨닫고는 더 화가 났다. 내가 싫어했던 모습을 그대로 따라 한다는 사실에 너무 슬펐다. 나와 같이 화를 낼 거라 생각했던 아빠는 오히려 괜찮다며 새로 한국으로 가는 직항 비행기를 결제했다. 엄마가 걱정하니 이건 우리 둘만의 비밀로 하자고. 아빠는 그 비행기값을 아빠용돈으로 냈었다. 물론 우리는 한국으로 오는 그 긴 시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부끄럽고 화가 났고. 아빠는 그런 날 보면서 화를 내지도 못한 채 바라보기만 했다. 그렇게 우린 서로의 긴 생각으로 한국 오는 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우린 비밀이 생겼다. 반갑지 않은 비밀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뭔가 어려웠던 아빠가 조금은 가까워졌던 것 같다. 내가 아빠에게 한 발 더 다가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사실 어렸을 때 엄하기도 했고 짜증내거나 화날 때 편했던 나를 향해 토해내기도 했었던 아빠였다. 아빠도 아빠가 처음이니까. 그랬었겠지. 그땐 밉기만 했다. 그땐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이 먹은 나는 이젠 아빠가 왜 그랬는지 조금은 이해한다. 왜 아빠가 서툴렀는지. 이젠 이해한다. 사랑하는 마음이 어떤 것 인지도 이해한다. 다는 아니어도 이해한다.
우리 아빠는 이상하게도 사랑할 때 화를 낸다. 내가 대학원을 다닐 때 퇴근을 제때 하지 못할 때였다. 새벽 2시 3시는 기본으로 택시를 타고 귀가하던 때였다. 그때 화를 냈다. "여기가 하숙집인지 알아?" 그때 그게 그렇게 화가 났다. 아빠는 그게 사랑이었다. 교수를 향한 화를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교수에게 전화해서 화를 낼 수도 없었다. 그러다 딸이 해코지를 당할 수 있으니까. 아빤 그게 최선이었다.
대학원에서 쫓겨나다시피 하고 집에 와있던 때였다. 그냥 멍하게 있었는데 아빠가 그랬다. 조용히 말했다. "네 뒤에는 항상 내가 있다." 여전히 나는 그 말을 떠올린다. 아빠는 늘 내 뒤에 있다. 나를 향해 화를 내는 우리 아빠가 있다고. 그 말이 그렇게 울림이 클지 몰랐다. 늘 저 말만 생각하면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린다. 왜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아빠는 그런 사람이다. 아마 몇 년 전 더 몇 년 전에는 아무 말도 못 했겠지. 내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겠지. 아빠도 크고 있으니까 하는 말이겠지. 나도 아빠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