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객관화

by 장지영

사람이 상처를 받는 것은 필연적이다.

개개인은 자유를 원하고, 그 모든 자유의 개수가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자유로워야 행복할 수 있는데, 하나의 자유는 다른 누군가에겐 억압이고 구속이다. 심지어 사람은 무지하다. 살아온 환경이 달라서, 그의 자유가 왜 자유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다름과 다양함을 인지하지 못해서 그가 침입자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사람은 무지하다. 그리고 이기적이다. 그래서 스스로 상처받는 것을 선택한다.


초등학생 때인가, 친구가 나의 모습을 후면 카메라로 찍었다.

나의 모습이 괴물같이 보였다. 그것은 내가 거울 속에서 보던 나의 모습이 아니었다. 처음 보는 나의 모습에 너무나도 충격이어서 그냥 무시했다. ‘저건 내가 아니야.’

정말 그 상태로 평생 살았다. 나의 모습을 부정하면서, 내가 믿는 나의 모습만을 믿으면서.

난 그랬다. 생각해 보면 내가 상처받았던 많은 순간들은 사실 내가 멍청하기 때문이었다. 마치 자기 뜻대로 장난감을 사주지 않아서 떼를 쓰는 어린아이처럼 바닥에 뒹굴고 나서, 그것이 내게 상처가 되는 순간이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았다.


연기를 배우면서 내가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이는지 더 잘 인식하게 됐다.

내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어떤 호흡으로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더 세부적으로는, 현재 나의 상태가 어떻고 그에 따른 목소리 높낮이가 어떻게 들리는지, 순간순간 상대방과 소통할 때 나의 시선이 어디 쪽으로 향하는지 등등.

이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지 더 잘 파악할 수 있게 됐다.

보이고 들려지는 것들을 인식하게 되니까 내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더 잘 전달할 수 있게 되었고, 나의 생각을 조금 더 정당성 있게 납득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나의 많은 결핍들을 이제야 인식하게 됐다.


나는 싸가지 없게 생겼다.

눈이 옆으로 쭉 째지고 입꼬리는 살짝 내려가 있어서, 입을 다문 채로 아무 생각 없이 가만히 있으면 기분이 안 좋아 보인다. 실제로 살면서 잘 놀게 생겼다, 여자 많아 보인다는 말을 정말 많이 들었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이제는 실제로 그렇게 생겼다는 것과, 보기에 그렇게 보인다는 것을 이제는 알아서 그렇다. 사람들의 통계적 정보들 속에, 관상학적으로 그런 사람들의 이미지가 많았던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나를 그렇게 보는 것이 나에 대한 편견일 수도 있지만, 어느 정도의 사실 관계도 있다.


실제로 사람의 몸은 행동과 습관에 따라 형성이 된다. 그리고 나의 태도나 기분 상태가 오래 지속될 때 보여지는 내 고유의 분위기가 있다.

예를 들면 내가 망상과 생각에 자주 빠져서 그 생각에 빠져 있을 때, 그곳은 깊숙한 어느 곳이어서 나의 표정이 굳는다. 그 표정은 나의 일반적인 표정이 되고, 나의 얼굴 근육은 그렇게 형성이 된다. 차가운 얼굴과 팔짱을 낀 채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 동상처럼 자세를 취하고 있으면, 난 당연히 싸가지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분명 이 것뿐만 아니라, 나를 구성하는 다른 많은 요소에도 그런 것들이 있을 것이다.


재밌는 것은, 이런 것들을 이해하면 할수록 진심으로 괜찮아진다.

내가 안 좋은 의도를 가지지 않았고, 상대방은 보이는 것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진심으로 이해했기 때문일까? 단지,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진다. 아니, 오히려 내가 미안할 때가 많다. 보여지는 것을 상대방에게 배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개팅을 나가는데 머리도 안 감고 슬리퍼 질질 끌고 가면 누가 좋아하겠는가. 우리가 옷을 잘 입는 사람이 매력적으로 보이는 이유도, 무의식 속에 그 사람이 보이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그 사람이 선택하는 옷 색깔과, 스타일에 그 사람의 센스와 배려가 담겨있다. 이처럼 싸가지가 없어 ‘보이는’ 것도 나의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순 없다.


“어휴, 네 주제를 좀 알아라.”

‘주제를 알아라’라는 말은 주관적인 말이다.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상대방에 대한 자기 객관화가 잘 안 되어있다고 판단해서 말하는 ‘주관적 해석’이다. 하지만, 그러한 주관적 해석이 곧 객관화의 시작이다.

그 말을 한 사람이 왜 나 자신이 납득이 안된 것인지, 정말 ‘내가 바라보고 있는 나 자신’이 ‘내가 바라는 자신’과 같은 지 판단하는 것은 평생 살아가는 숙제일 것이다. 내가 ‘보여지고’ 싶어 하는 모습과 실제로 ‘보이는’ 모습을 동일시하게 만드는 것.


우리는 어차피 모든 사람을 납득시킬 수 없다.

그것은 아마도, 세상엔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있고, 그 사람들은 상처와 결핍을 가지고 있고, 그리고 내가 그 사람들 중 한 명이기도 하기 때문이 아닐까.

결핍을 가진 채로 자신을 드러내고, 버리고, 내려놓으면서 용기를 얻고, 자존감을 높인다는 것은, 단지 결국 자신에게 자신을 스스로 납득시키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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