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삶은 ‘무형식’이다.
기준이 있는 것 같으면서도, 지켜야 할 것들이 있는데도, 사실 광범위하다. 조금만 다르게 생각하면 모든 것들이 사라지며, 증발해 버린다.
그래서 그것은 언제나 미완성이다.
1.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 이유는 애초에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의 몸은 모두 분리되어 있고, 다른 생각을 가진 채 살아간다.
그 ‘다른 생각’들을 우리는 말로 설명할 수 없다. 말은 ‘언어’로, 우리의 생각을 표현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이기 때문에 그렇다.
글을 쓰면서 항상 한계를 느끼는 것 또한 어찌 보면 당연하다. 글자는 언어를 기호로 나타낸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
뇌를 통째로 전달하지 않는 이상, 모른다. 보이는 것은 아주 작은 일부분이다. 만약 전체를 이해하고 싶다면, 우리는 그 사람의 인생 전체를 똑같은 유전자로, 똑같은 환경에서, 아주 사소한 사건조차 똑같이 겪으며, 아주 얕고 깊은 생각조차 똑같이 해야 그 사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각자 다른 이상(理想)을 가진 채 살아가기 때문이다.
자신이 지금껏 살아오면서 쌓아왔던 정보에, 조금이라도 어색하고 어설픈 정보가 들어오거나 낯선 사람이 들어오면 그 사람은 침입자가 된다. 원초적으로 조상으로부터 많은 방어에 대한 정보를 쌓아왔던 유전자는, 기를 쓰고 그것들을 차단하기 위해 애쓴다.
보편적이지 못한 사실, 이상함, 안전하지 못함.. 어디쯤 있는 그것을.
2.
하지만 우리는 착각을 하며 살아간다.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 있다. 착각하지 않았다는 것. 우리는 언제나 착각을 착각한다.
3.
하지만 우리는 사랑하고 있다.
어떻게든 사랑하려 하고, 사랑을 찾기 위해 움직인다.
4.
하지만 그 사랑은 여러 가지 각자의 기준에 막힌다.
... 반복.
1.
그것의 대부분은 역시 현실적인 이유들 그리고 다시 ‘이상함’들이다.
‘내 이야기 좀 들어줘. 나의 이야기는 사랑으로 가득한 이야기인데, 내가 꿈꾸는 건 핑크빛 세상이고…’
그럼에도, 또는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사랑을 찾기 위해 자신을 드러내려 한다.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하거나 보통의 방법으로는 너무 쉽게 차단된다.
여러 가지의 예술로 그 사랑을 표현한다. 예술은 효과적으로 사랑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었다. 좀 더 직관적으로, 짧은 시간 안에 나의 복잡한 생각을 표현할 수 있었다.
예술은 보통 네 가지로 분류된다.
음악 : 소리, 무용 : 신체의 움직임, 미술 : 형태, 문학 : 언어.
우리가 보통 ‘아름답다’, ‘멋있다’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예술에 가깝다. 노래를 부르고 듣는 것, 춤을 추는 것, 시각적인 것, 글자 그리고 중요한 상황에서 뱉는 대사들. 그래서 그것들은 단지 일상에서도 존재한다.
그것은 모두 사랑이자 예술이다. 아주 얕은.
’ 저게 뭐야?’라고 호기심을 갖기도 하고, '예술이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 사랑을 조금 더 알아보고 싶을 때 ‘욕구’를 가지고 다가간다. 그리고 그 욕구에 대한 행동, 그 사랑에 다가가려 하면 할수록 개인의 의미를 스스로 생성하고, 그 의미에 대한 기준이 생긴다.
기준이 거대해진다.
사랑을 느낄 때와 예술을 볼 때의 순간은 닮아있다.
사실 그 의미는 만물에 존재하지만(-모든 것에는 사랑이 깃들어 있지만), 그러한 모든 것들에 의미를 가지기 에는 인간이라는 그릇이 한없이 작은 존재다.
그래서 결국 자신이 자신의 인생에서 선택한 사랑이 예술이며, 그것이 아름답고 멋있는 ‘자신만의’ 기준이다.
사랑에는 사실 색깔이 없다.
하트는 심장과 닮아서 빨간색으로 묘사된다고 알려져 있지만, 막상 실제로 형태도 없고 아무 향기도 나지 않는 ‘사랑’은, 눈으로 식별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눈 뜨고 찾아봐도 어디에도 없지만, 어디에나 존재한다. 그래서 때로는 빨간색, 때로는 하얀색. 때로는 와인색, 때로는 검은색이다.
예술은 소통으로 존재한다.
사랑이 너무 보이지 않아서, 사랑을 말하기 위해, 더 잘 소통하기 위해 예술을 자연스럽게 사용하게 되었다.
상대방이 못 알아들어서, 나의 의미를 잘 전달하기 위해 말의 빠르기와 목소리 크기를 높였다. 그것은 ‘언어’였다.
상대방은, 이전보다는 조금 더 이해를 하긴 했지만 아직 부족했다. 소리를 좀 더 섬세하게 만들어내고, 음정의 높낮이를 사용해 나의 마음을 전달하려고 했다. 그것은 ‘노래’가 되었다.
제스처를 사용한다. 나의 마음을 시각화시키고 싶다. 몸을 좀 더 크게 사용한다. 그것은 ‘춤’이 되었다. 다른 방법의 시각화로 도구를 사용해 그림을 그렸다. ‘미술’이 되었다.
오감을 느끼는 인간에게, 내가 느낀 느낌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소통을 좀 더 효율적으로 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예술은 사랑이자, 오감의 전달이자, 소통이었다.
2.
우리는 소통의 부재가 있다.
아니, 소통의 오류라고 하는 것이 맞겠다. 모든 예술이 사람들을 감동시키지 않는다. 예술은 ‘이상함’ 속에 존재한다. 개인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예술을 포함한 모든 것들이 그렇다.
동물, 식물, 그리고 곤충조차 소통을 하고 있다. 우리는 그들의 언어, 그들의 소통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들도 소통을 한다. 저마다의 방법은 각자 다르지만 모든 소통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언젠가 그 모든 소통을 할 수 있을 때, 모든 예술을 이해할 수 있을 때는 신이 될 수 있을까. 나의 신(身)이 초월적인 존재가 되는 걸까.
모든 존재를 아우르기 위해, 그렇게 하면 내가 좀 더 나은 존재가 되지 않을까, 그런 기대감을 가지고 살아간다.
각박한 세상 속에서 무엇과도 조금은 더 잘 소통하고 싶어서, 그 무엇도 ‘이상하다’고 느끼지 않고 싶어서, ‘사랑’이라는, 사실은 증발해 버릴 수도 있는, ‘무형식’인 나만의 의미를 만들고, 나의 신체로 그것을 느끼려고 애를 쓰며, 어쩌면 나 자체가 종교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영성(靈性)에 다가갈 수 있을까- 하며.
3.
이 악물고 나의 몸을, 인생을 ‘예술’로 만들기 위해 애를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