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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소설의 죽음, 12일(마지막 회).

하인즈 베커 소설

by 하인즈 베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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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혹은 은혜는 여전히 소설을 쓴다고 믿고 있었다. 문장이 생겨나는 감각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정호는 내 앞에 노트북을 열어 보였다. 화면 속엔 낯설지 않은 제목이 떠 있었다. <쌔드 이미테이션>. 그런데 문서의 하단에는 굵은 글씨가 있었다. ‘치료 기록 29-A’.

“박수현 씨, 당신은 작가가 아닙니다. 한 번도 아니었어요.”
이정호의 목소리는 잔인할 만큼 또렷했다.


나는 웃음이 나왔다. 아니, 나와야 했다. 내가 작가가 아니라고? 그럼 지금까지 쓴 이 원고는 무엇인가. 내 삶은 무엇인가. 조은혜는 어디에 있는가. 그러나 내 손엔 펜이 없었다. 종이도 없었다. 빈 공기만이 있었다.

“그건 치료 과정의 일부였습니다. 당신이 글을 쓴다고 믿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했어요. 당신의 망상은 안전한 틀 안에서만 유지될 수 있었으니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기억이 무너졌다. 출판사, 편집자, 밤을 새워 써 내려간 원고들, 그 모든 장면들이 순식간에 흩어졌다. 나는 단 한 번도 작가가 아니었다. 단 한 줄도 내 것이 아니었다.


... 내가 이 세상에서 읽고, 배웠고, 믿어왔던 동화는 그것으로 끝난다. 고래는 정말 공주가 되었다. 그리고 그다음에 어떤 상황이 생길는지는 일련의 동화들 속에 모두 비슷하게 나타나 있다. 하지만.


“은혜를 불러 줘 붙잡아야 해. 은혜가 내 증인이야.”

“그 분은 간호사님입니다. 조은혜는 여기 없습니다. 처음부터 조은혜는 없었던 사람입니다.”

김인철도 없었고, 은혜도 없었고, 소설도 없었다. 오직 붕괴된 나만 있었다. 아무것도 쓰지 않은 채, 쓰고 있다고 믿었던 환자만이 있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눈을 감았다. 허공에 글자를 그리듯 손가락이 떨렸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문장은 남지 않았다.


... 공주가 된 고래는 결코 아름답지 않았다. 나를 역겹게 만드는 두꺼운 화장과 화려한 보석만이 그녀를 공주로 증명했다. 공주는 그런 모습으로 내 앞에서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바람이 불었고, 그때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불렀다.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 녀. 다.' 나를 떠난 여자, 내가 찾던 여자, 나를 헤엄치게 만든 여자. 그리고 그 순간 공주는 소리쳤다. "마. 녀. 다."


마녀가 된 그녀는 너무나 달콤한 목소리로 계속 나를 불렀고, 공주는 내 손을 꼭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나는 눈을 감았다. 나는 눈을 떴다. 희죽. 웃을 수밖에 없었다.


소설은 끝났고, 동시에 죽었다. 아니, 소설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치료기록 29-A


실험 기록.
환자 박수현(47세, 남)은 12일간의 관찰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작가’라는 허구적 정체성을 고수하였다. 그는 실존하지 않는 인물 ‘조은혜’를 반복적으로 언급하며, 해당 인물이 자신이 쓰는 소설의 주인공이라고 진술했다. 그러나 교차 검증 결과, 환자는 단 한 줄의 창작 기록도 남기지 않았으며, ‘소설’이라는 개념 자체가 그의 망상 체계의 일부로 판명되었다.


11일 차에는 조은혜로 동일시되는 간호사(성명 비공개)를 환각적으로 인식하며 병동 내에서 추적을 시도하였다. 이 과정에서 동료 의료진에게 제압되었고, 이후 격리 병실로 이송되었다. 사건 직후 환자는 극심한 혼란과 저항을 보였으나, 곧 언어적 활동이 급격히 감소하였다.


실험의 결론
박수현은 ‘작가’, ‘소설’, ‘조은혜’라는 세 개의 망상 축을 통해 '김인철' 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해 왔다. 그러나 12일간의 단계적 개입 과정에서, 환자는 이들 망상 사이의 논리적 연결성을 상실하고 붕괴 상태에 도달하였다. 결과적으로, 환자의 창작 행위, 대인 관계, 자아 인식은 모두 허상임이 확인된다.


추가 치료 여부는 미정.
본 보고서는 ‘소설의 죽음’ 사례로 분류한다.


끝.




1화부터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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