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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죽음, 11일.

하인즈 베커 소설

by 하인즈 베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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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차가운 시트 위에 누워 있었다. 손목에는 밴드가 감겨 있었고, 어깨와 가슴은 여전히 누군가의 손길에 눌린 듯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눈을 뜨자 형광등이 천장을 잔인하게 밝히고 있었다.

문이 열리고 이정호가 들어왔다. 흰 가운 자락이 내 시야를 잘라냈다. 그는 의자를 끌어다 침대 옆에 앉았다.

“박수현 씨.”
그가 낮게 부르자 목이 바싹 말라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조은혜라는 사람은 없습니다. 선생님이 본 건… 기억이 만들어낸 환상일 뿐입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아니야. 내가 봤어. 오늘도 은혜를 봤다고. 웃고 있었어, 계단 위에서.”

이정호는 숨을 고르며 두꺼운 파일을 내게 건냈다. 거기에는 보고서, 부검 기록, 사진들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 그는 페이지를 넘기며 내 앞에 펼쳐 보였다. 시체 위에 덮인 흰 천, 국과수의 도장, 아내와 딸의 사진과 사망진단서. 모두 차갑고 확실한 활자들이었다.


... 더 이상 처녀가 아닌 채로 섬으로 돌아와야만 고래로 변한 공주의 저주가 풀리기에 나는 고래의 안에서 잠들고 깨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어느 밤에 공주는 나에게 '사랑해'라고 말했고, 나는 그 말을 믿어 버렸다. 그리고 아침이 왔다. 그 아침엔 섬도 왔다.


“이게 현실입니다. 선생님.”

나는 그 글자들을 똑바로 볼 수 없었다. 활자가 물결처럼 흔들리며 흩어졌다. 종이 위에서 얼굴이 솟아올라 은혜가 웃고 있는 것 같았다.

"박수현 씨는 교통사고로 아내분과 따님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셨기에 조은혜가 생겨났고, 지금까지 오신 겁니다."

“거짓말이야…”
나는 침대 위에서 몸을 뒤틀었다. 밴드가 손목을 파고들며 피가 멎는 듯 아팠다.

그때 문이 다시 열렸다. 발소리가 다가왔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그곳을 보았다. 은혜였다. 분명히 은혜였다. 그러나 그녀는 간호사 복장을 하고 있었고, 무표정하게 내 혈압을 재고, 펜으로 차트를 적고 있었다.

“은혜…”
내 목소리는 절박한 속삭임이었다. 그녀의 눈빛이 잠시 나를 스쳤다. 그 순간만큼은, 예전 그 눈빛과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곧 시선을 거두고 아무 말 없이 나를 지나쳤다.


..."안녕하세요?" 처음보는 사람이었지만 나는 그녀가 누군지 알고 있다. 다시 공주가 된 고래였다. 하지만...


“보셨죠?”

이정호가 조용히 말했다.
“그녀는 조은혜가 아닙니다. 그저 이 병원의 간호사일 뿐이에요. 선생님의 기억이 만들어낸 허상일 뿐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김인철 작가가 아닌 박수현 씨입니다.”

나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눈물이 번져 천장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아니야. 아니라고. 속임수야. 전부 속임수야! 백재현 선생을 불러줘”

"이미 옆에 있지 않습니까?"

백재현의 침대는 내 옆에 바로 놓여 있었다. 그곳에는 앞니가 빠진 중년의 한 남자가 나를 보며 히죽거리고 있었다.

"벡재현씨도 이번 실험의 참가자이자 조력자입니다."

내 울부짖음이 병실 벽에 부딪혀 돌아왔다. 이정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류를 덮었다.

간호사 은혜가 차트를 들고 문을 나서는 순간, 나는 마지막 힘을 짜내어 몸을 일으켰다.
“은혜! 제발, 나 좀 보라고!”

그녀는 잠시 멈췄다. 그리고 아주 미세하게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 눈빛은 공허했다. 환자와 간호사 사이의 거리만 남아 있었다.

나는 무너져 내렸다. 온몸이 침대에 파묻히며, 눈앞의 형광등이 점점 희미해졌다.

마지막 순간, 내 머릿속에서 은혜의 웃음소리가 어렴풋이 흘러나왔다. 그것이 진짜였는지, 아니면 또 하나의 속임수였는지 나는 아직 알 수 없었다.






1화부터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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