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체인소맨 레제편 X 미셸 푸코

안락한 통제와 위험한 자유 그리고 Bomb.

by 하인즈 베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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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 공중전화박스라는 좁고 폐쇄된 공간에서 시작된 덴지와 레제의 만남은 그 자체로 하나의 은유다. 쏟아지는 비를 피하기 위해 찾아든 그 작은 유리 상자 안에서, 레제는 덴지에게 꽃을 건네받고 수줍어 하면서도 깔깔거리는 어린 소녀같은 웃음을 짓는다.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소년과 소녀가 만난 이 공중전화박스는 하지만, 풋풋한 첫사랑의 시작이 아니라 앞으로 일어날 폭발을 숨긴 치명적인 유혹의 인큐베이터였다.


미셸 푸코는 현대 권력이 인간의 신체를 어떻게 길들이는지 분석하며 ‘훈육된 신체(Docile Bodies)’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레제는 그 개념이 육신을 입고 태어난 존재다. 구 소련의 비밀 실험실, 이름 대신 숫자로 불리던 아이들 사이에서 레제는 ‘무기’라는 본질을 이식받았다. 푸코의 관점에서 레제의 신체는 자아의 터전이 아니다. 그것은 국가가 효율적인 살상을 위해 세밀하게 분해하고 재조합한 생체 권력의 전시장이다. 그녀가 덴지에게 보여준 그 다정한 눈빛과 목소리조차, 사실은 목표물을 안심시키기 위해 최적화된 ‘길들여진 신체’의 출력값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이 서사를 한층 더 비극적으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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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제가 덴지에게 던진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 “시골 쥐와 서울 쥐 중 어느 쪽이 좋아?”는 사실 푸코의 ‘파놉티콘(Panopticon)’적 실존에 대한 가장 처절한 물음이다. 안락한 통제(서울 쥐)와 위험한 자유(시골 쥐) 사이에서 레제는 평생 전자를 강요받았다. 권력의 시선은 외부의 감옥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레제는 덴지와 밤 수영을 하고 축제를 즐기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임무 완수의 타이밍을 잰다. 설렘과 살의가 공존하는 그 기괴한 이중성은, 권력이 개인의 내면 깊숙이 침투해 ‘자기 감시’의 체계를 구축했을 때 벌어지는 영혼의 잠식 상태를 보여준다. 그녀는 자유를 꿈꾸면서도 동시에 감시자의 시선을 내면화한, 가장 완벽하게 통제된 ‘서울 쥐’였다.


축제의 밤. 밤하늘에 불꽃이 터지는 순간 소년과 소녀의 관계도 터져버린다. Bomb. 이 순간부터 러브스토리는 정신없는 폭력의 향연으로 바뀐다. 하지만 이 비극의 진짜 미학은 레제의 ‘서툰 저항’에서 발생한다. 모든 임무를 마치고 사라질 수 있었던 레제가, 기차역 대신 덴지가 기다리는 카페로 발길을 돌린 순간. 그것은 국가가 설계한 ‘폭탄’이라는 궤도를 이탈해, 이름 없는 ‘소녀’라는 실존으로 나아가려 한 최초의 반항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목에 걸린 폭탄 핀은 언제든 뽑을 수 있었지만, 정작 자신을 옭아맨 권력의 시선으로부터는 단 한 걸음도 자유롭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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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카페 앞 골목길에서 지배의 악마 마키마와 마주한 레제의 최후는 서늘하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중앙 통제실’ 그 자체인 마키마 앞에서 레제의 저항은 무력하게 짓밟힌다. 덴지의 뒷모습을 향하던 그녀의 시선이 바닥으로 떨어질 때, 우리는 시스템 밖으로 나가려 했던 한 개인의 실존이 거대 담론에 의해 어떻게 소멸하는지를 목격한다.


레제는 끝내 시골 쥐가 되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가 죽기 직전 떠올린 것이 덴지와 처음 가본 학교와 둘 사이에 나누었던 실없는 농담들이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권력조차 완전히 점유하지 못한 인간의 마지막 파편을 본다. 우리 모두 각자의 목에 보이지 않는 핀을 달고 살아가는 서울 쥐들이라면, 레제의 비극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시스템의 규율 속에서도 끝내 ‘나’로 남고 싶어 하는 모든 존재의 서글픈 투쟁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제를 만난 이후 덴지는 지배의 악마와 싸울 수 있는 비로소 시골 쥐가 된다. 결국 덴지를 '진짜 체인소맨'으로 만든 것은 한 여름의 이 짧은 러브스토리였다. 그러기에 푸코가 옳다. 권력이 있는 곳엔 언제나 저항이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dOihGQCIw_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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