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X 질 들뢰즈

포획될 수 없는 없는 삶의 강도. 혁명가가 아니라 그 누구라도.

by 하인즈 베커


폴 토마스 앤더슨의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를 지배하는 정서는 역동성이다. 영화의 제목, ‘하나의 전투 뒤에 오는 또 다른 전투’는 시지프의 끝없는 굴레로 읽히곤 하지만, 질 들뢰즈의 렌즈를 끼우는 순간 이 문장은 전혀 다른 생명력을 얻는다. 이것은 혁명의 성공담이나 실패담이 아니다. 오히려 국가와 힘이라는 거대 장치가 결코 포획할 수 없는,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탈주’에 대한 기록이다.


들뢰즈에게 삶은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끝없는 ‘생성(Becoming)’의 과정이다. 주인공 밥 퍼거슨의 삶은 들뢰즈가 말한 ‘차이와 반복’의 정수를 보여준다. 시시한 혁명가였던 그는 16년 만에 다시 문제가 발생하자 더 이상 과거의 영광에 머물러 있는 박제된 혁명가가 아니다. 딸을 찾기 위해 밥은 새로운 관계에 접속하고, 새로운 무기를 들며, 어제의 자신과는 다른 존재로 변이 한다. 이 반복은 닫힌 원이 아니라, 매번 새로운 차이를 만들어내며 시스템의 균열을 넓히는 나선형의 운동이다. 그는 이제 진짜 혁명가가 된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연대의 방식은 수직적인 위계가 아닌 ‘리좀(Rhizome)’의 형상을 띤다. 권력이 뿌리와 줄기라는 명확한 질서로 시민을 관리하려 할 때, 밥과 그의 동료들은 중심 없는 네트워크로 흩어지고 연결된다. 그들의 조직에는 명확한 명령 체계가 없다. 대신 그들은 필요에 따라 우발적으로 마주치고, 그 마주침의 강도에 따라 폭발적으로 확장된다. 밥이 딸 윌라의 흔적을 좇아 이동하는 경로는 이미 그려진 지도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발을 내딛는 순간마다 새롭게 구성되는 유목적 여정이다. 여기서 밥의 ‘도망’은 패배의 증거가 아니라 가장 급진적인 공격의 형태다. 들뢰즈에게 탈주란 단순히 장소를 옮기는 것이 아니라, 체제가 부여한 정체성—‘실패한 혁명가’ 혹은 ‘무기력한 중년’—이라는 포획 틀을 찢고 나가는 행위다.


들뢰즈는 모방이 아닌 '전염'을 말했다. 윌라는 결국 밥과는 다른 투쟁의 강도와 공명하며 자신의 길을 계속 전진한다. 혁명은 교육되는 것이 아니라 감염되는 것이며, 두 주체는 서로를 복제하지 않은 채 각자의 전장에서 생성된다. 우리는 이제 감옥에 가두지 않고도 개인을 수치화하여 관리하는 ‘통제 사회’를 산다. 이러한 시대에 단 한 번의 결정적 승리란 환상에 불과하다. “One Battle After Another”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주체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전술적 선언이다. 승리라는 고정된 결과물에 안주하는 순간 주체는 포획되지만, 투쟁의 상태를 유지하는 한 주체는 결코 정의되지 않는다.



들뢰즈 철학에서 가장 고귀한 감정은 ‘기쁨’이다. 그것은 안락함이 아니라 자신의 역량이 증대되는 순간의 고취다. 밥이 만신창이가 되어서도 멈추지 않는 이유는, 그 투쟁의 한가운데서만 자신의 존재가 최대치로 발현되기 때문이다. 그는 승리자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있기 위해 싸운다. 살아있어야만 누군가를 살릴 수 있다.


영화의 엔딩이 남기는 기묘한 고양감은 바로 이 ‘포획 불가능성’에서 기인한다. 권력은 여전히 견고하고 전쟁은 끝나지 않았지만, 밥과 윌라는 시스템이 끝내 소화하지 못한 이질적인 입자로 남는 데 성공했다. 들뢰즈라면 이 영화를 보고 이렇게 평했을 것이다.


“전투는 계속된다. 그러나 그것은 결핍을 메우기 위한 고통의 반복이 아니라, 매 순간 포획을 거부하며 폭발하는 삶의 긍정 그 자체다. 그리고 삶은 전염되고 지속된다. ”



https://www.youtube.com/watch?v=0CMAIpDWL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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