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을 관찰하지만, 아무것도 경험하지 못하는 존재의 슬픔.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두이노의 비가(悲歌)>는 아득한 질문으로 문을 연다. "내가 이렇게 소리친들, 천사들 중 대체 그 누가 내 목소리를 들어줄까? 한 천사가 느닷없이 나를 가슴에 끌어안으면, 나보다 강한 그의 존재로 말미암아 나 스러지고 말 텐데." 그리고 릴케는 고백한다. "무섭지 않은 천사는 없다."
릴케에게 천사는 구원의 존재라기보다는 인간의 유한성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초월적 거울이다. 영원히 존재하기에 결코 죽음을 알지 못하는 천사야말로 삶의 가장 깊은 본질로부터 배제된 자이기 때문이다. 빔 벤더스의 영화〈베를린 천사의 시(Wings of Desire)는 이 릴케적 긴장을 영상 언어로 치환한 아름다운 철학적 선언이다. 릴케가 천사를 ‘무섭다’고 정의한 것은 그들의 힘 때문이 아니라, 영원의 시선이 내포하는 공허 때문이다.
영화 속 천사 다미엘(Damiel)은 도시를 떠돌며 인간의 내면을 읽고 고통을 어루만지지만, 자신은 배고픔도 상처도 알지 못한다. 그는 모든 것을 관찰하지만, 아무것도 경험하지 못한다. 이 투명한 고독 속에서 삶은 의미 없는 흐름으로 전락한다. 다미엘의 흑백 시야는 영원의 시간에 갇힌 세계를 상징하며, 그 침묵은 삶의 충만함을 끝내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다르다. 인간은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이기에 역설적으로 매 순간 의미를 얻는다.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이야말로 사랑과 고통, 연대의 가장 근본적인 조건이다. 우리는 상처 입을 수 있기에 서로를 껴안고, 덧없음을 알기에 순간의 아름다움에 찬사를 보낸다. 릴케가 끊임없이 강조했던 “삶은 찬미할 만하다”는 긍정은 고통과 죽음을 회피하라는 말이 아니라, 그것들을 삶의 조건으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삶이 완성된다는 역설을 담고 있다. 결국 천사 다미엘이 영원을 버리고 인간이 되기를 갈망하는 순간, 그는 바로 이 유한성의 긍정을 실천한다. 더 이상 불개입의 관찰자가 아니라, 상처 입을 수 있는 몸, 커피의 온기를 느끼고 서커스 소녀를 사랑하며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존재가 되고자 한다. 릴케의 언어로 말하면, 그는 “죽음을 내 안에 살게 하려는” 것이다. 죽음을 종말이 아니라 삶을 구성하는 근본 조건으로 내면화할 때, 인간은 비로소 충만한 존재가 된다.
빔 벤더스가 분단된 베를린을 영화의 배경으로 삼은 것 역시 우연이 아니다. 역사적 비극과 정치적 불안 위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은 무너짐 속에서도 삶을 붙든다. 천사들이 침묵하는 자리에서 인간의 말과 몸짓, 상처는 오히려 더 강렬하게 빛난다. 그 불완전한 몸부림이야말로 영원의 공허에 맞서는 유한한 삶의 저항이다.〈베를린 천사의 시〉는 결국 우리에게 천사의 시선이 아닌, 인간의 시선으로 삶을 바라보라고 촉구한다. 다미엘의 선택은 단순한 로맨스가 아니라, 유한성만이 삶을 진실하게 만든다는 철학적 선언이다. 릴케의 시가 남긴 문장들은 벤더스의 카메라 속에서 피와 살을 가진 몸짓으로 다시 살아난다. 천사는 영원의 타자로서 우리에게 유한함의 가치를 상기시킬 뿐이다. 삶의 진정한 찬미는 천사의 계단 위가 아니라, 이 불완전하고 덧없는 세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죽음이 우리를 한정할 때, 비로소 우리는 무한한 의미를 창조한다. 그것이 릴케가 노래한 시의 진실이자, 빔 벤더스가 영화를 통해 증명한 삶의 찬가다.
https://www.youtube.com/watch?v=0pwgFOCBa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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