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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인터스텔라 X 알랭 바디우

사랑이란, 둘의 관점에서 세계를 다시 보는 경험.

by 하인즈 베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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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놀란의 <인터스텔라>는 낯설고도 절실한 질문으로 시작된다. "이 모든 것이 무너진 후, 우리를 끝까지 붙잡아 두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영화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장대한 우주 서사 속에서 찾아낸다. 놀란이 제시한 답은 과학이 아닌 ‘사랑’이다.


과학적 이론으로 출발한 이야기는 결국 과학으로 환원할 수 없는 힘, 인간을 존재하게 만드는 가장 근원적인 진실로 회귀한다. 이 거대한 서사는 현대 철학자 알랭 바디우가 평생 탐구했던 주제와 정확하게 겹쳐진다. 바디우에게 사랑은 결코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기존의 세계를 허물고 새로운 세계를 열어가는 ‘진리의 절차’이기 때문이다.


<인터스텔라>의 무대는 인류의 생존이 불가능해진 멸망 직전의 지구다. 기아와 식량난에 시달리는 인류는 더 이상 이곳에 머무를 수 없고, 새로운 터전을 찾아야만 한다. 한때 우주 비행사였지만 이제는 농부로 살아가던 쿠퍼는 NASA의 비밀 프로젝트에 합류하여 인류를 위한 마지막 희망의 탐험에 나선다. 웜홀과 블랙홀을 넘나드는 여정에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극적으로 구현된다. 시간은 상대적인 중력에 따라 극단적으로 팽창하거나 수축하고, 어떤 행성에서는 단 몇 시간이 지구의 수십 년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과학의 정교함이 아니라,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다른 힘에 의해 박동한다. 쿠퍼를 극한의 상황에서 끝까지 붙잡는 것은 블랙홀의 복잡한 방정식이 아니라, 지구에 남겨둔 딸 머피를 향한 절대적인 사랑이다.


쿠퍼의 조력자인 브랜드 박사의 대사는 이 영화의 철학적 진실을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사랑은 우리가 아직 이해하지 못한 어떤 것, 증명할 수 없는 힘이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로 존재한다.” 이 말은 바디우가 정의한 ‘사건(Event)’과 연결된다. 바디우에게 있어서 사건은 기존의 질서로는 설명되지 않는, 그러나 삶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바꿔놓는 돌발적이고 근원적인 경험이다. 쿠퍼가 블랙홀 속 5차원의 초입체 공간인, ‘테서랙트’에서 과거의 머피에게 중력 데이터를 보낼 수 있었던 것도 단순히 물리적 법칙 때문이 아니었다. 그 힘을 가능하게 한 것은 바로 쿠퍼와 머피가 맺은 사랑의 고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시공간을 초월하는 사랑의 사건을 통해 서로에게 연결되었고, 이 사건이 그들에게 새로운 진리를 열어준 것이다.


20130930_AlainBadiou259-2.jpg 알랭 바디우


바디우는 "사랑은 둘의 관점에서 세계를 다시 보는 경험”이라고 썼다. 맞다. 사랑은 ‘나’라는 단독적인 주체의 시선만으로 구성된 세계를 넘어, ‘너’와 함께 공유하는 새로운 세계로의 도약이다. 쿠퍼와 머피의 관계가 보여주는 것은 바로 이 도약의 모든 과정이다. 쿠퍼는 단순히 개인의 시간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사건을 통해 머피와 공유하는 시간을 살아낸다. 상대성 속에서 과학적 시간이 무의미하게 무너져도, 쿠퍼의 존재를 관통하는 것은 오직 “머피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절대적인 약속뿐이었다. 이 약속은 과학적 물리 법칙을 뛰어넘는, 사랑이라는 진리가 낳은 결과였다. <인터스텔라>에서 쿠퍼와 머피가 맺은 부녀의 사랑은 단순한 개인의 정을 넘어, 결국 인류 전체를 구원하는 거대한 계기가 된다. 그리고 그 사랑은 결국 다른 차원의 세계를 구축한다. 이렇듯 사랑은 인류를 새로운 차원으로 이끈 진리의 절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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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스텔라>는 장대한 스케일 뒤에서 조용하게 우리에게 묻는다. "무엇이 우리를 끝까지 버티게 하는가?" 그 힘은 우주를 가르는 로켓의 추진력도, 수많은 계산이 쌓인 방정식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 곁의 누군가와 맺은 관계, 그 관계가 우연히 열어준 새로운 세계다. 사랑은 우연으로 시작되지만, 한 번 시작되면 그 우연을 절대적인 필연으로 만들며 새로운 진리의 세계를 구축한다. 쿠퍼와 머피의 관계는 그런 진리의 구축이었고, 그들의 사랑은 곧 인류의 구원이 되었다.


따라서 <인터스텔라>는 단순히 상대성 이론을 시각화한 영화라기보다, 사랑의 철학을 우주적 서사로 펼쳐낸 거대한 철학적 텍스트다. 시간은 휘어지고, 우주는 무너지고, 생존은 끝없이 위협받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 끝까지 남는 것은 오직 사랑뿐이다. 바디우가 말한 “사랑은 진리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방식이다”라는 명제는 <인터스텔라>의 장대한 우주 서사를 통해 극적으로 증명된다. 과학의 언어가 닿지 못하는 곳에서, 사랑은 결국 인류를 구원하는 유일한 진리였음을 - 이 거대한 스케일의 영화는 우리에게 속삭이고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lWFkPhFYksg

<인터스텔라> 예고편


https://www.youtube.com/watch?v=LmWjZCSBnAc

쿠퍼와 머피의 재회, 라스트 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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