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백기행)과 첫사랑 박경련 과 김영한 나타샤


*백석(백기행)과 첫사랑 박경련 과 김영한 나타샤


통영엔 박경리, 윤이상, 김춘수, 유치환, 전혁림 등 외에도 통영 출신이 아닌 평안북도 정주가 고향인 시인 백석(1912~1996)이 있다

18세의 나이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그 모(母)의 아들'로 등단해 조선일보의 후원으로 일본 유학(영문학)까지 다녀온 후 1936년 시집 '사슴'을 간행해 시단에 혜성과 같이 등단한 수려한 외모의 촉망받는 '모던 보이' 백석.

그에게도 열병처럼 아프게 앓은 첫사랑이 있었다. 통영에 사는 아가씨 '난'이 그 주인공으로, 백석이 써내려간 통영에 대한 시엔 그녀가 그립게 그려져 있다. 그가 남쪽 끝 항구도시 통영에 대해 시를 세 편이나 남긴 것은 그만큼 '난'에 대한 그리움이 컸기 때문

구마산(舊馬山)의 선창에선 좋아하는 사람이 울며 나리는 배에 올라서 오는 물길이 반날

갓 나는 고당은 갓갓기도 하다

바람 맛도 짭짤한 물맛도 짭짤한 전복에 해삼에 도미 가재미의 생선이 좋고 파래에 아개미에 호루기의 젓갈이 좋고 새벽녘의 거리엔 쾅쾅 북이 울고 밤새껏 바다에서 뿡뿡 배가 울고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곳이다

샘터엔 오구작작 물을 긷는 처녀며 새악시들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그이가 있을 것만 같고

내가 좋아하는 그이는 푸른 가지 붉게 붉게 동백꽃 피는 철엔 타관 시집을 갈 것만 같은데

긴 토시 끼고 큰머리 얹고 오불고불 넘엣거리로 가는 여인은 평안도서 오신 듯한데

동백꽃이 피는 철이 그 언제요

옛 장수 모신 낡은 사당의 돌층계에 주저앉아서 나는 이 저녁 울듯 울듯 한산도 바다에 뱃사공이 되어가며 녕 낮은 집 담 낮은 집 마당만 높은 집에서 열나흘 달을 업고 손방아만 찧는 내 사람을 생각한다.

- 백석 <통영2>


시인의 애끓는 첫사랑, 통영 사는 천희 '난'

1936년 1월 백석은 통영 출신의 '천희' 중 하나인 '난'을 다시 만나기 위해 두번째로 통영을 방문한다. 경상도 말로 처녀를 '천희' 혹은 '처니'라고 부른단다. 하지만 통영 천희 난은 겨울방학이 끝나가자 서울로 상경해 버린 탓에 서로 길이 엇갈린다. 이때 상실감을 안고 쓴 시가 충렬사 건너편 시비의 <통영 2>로, 난이 살던 마을, 명정골까지 찾아가 그 애틋한 마음을 털어 놓는다. 백석은 그해 3월에도 다시 통영을 방문하지만, 이때도 결국 난을 만나지 못한다.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러 통영까지 왔다가 못 만나고 그녀가 살던 집과 동네만 하릴없이 기웃거리다 서글픈 마음으로 쓴 시.말없고 수줍었던 백석과 난의 사랑

처음 백석이 난을 만난 건 1935년. 당시 시인이자 조선일보 기자였던 백석은 절친한 친구의 결혼식 축하모임에서 같은 신문사 동료인 신현중의 소개로 당시 서울의 이화고교 학생이던 통영 여자 난(본명 박경련)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백석은 스물넷, 난은 열여덟 꽃다운 나이였다. 백석은 후일 그의 산문 <편지>에서 난의 모습을 이렇게 그린다.


남쪽 바닷가 어떤 낡은 항구의 처녀 하나를 나는 좋아하였습니다. 머리가 까맣고 눈이 크고 코가 높고 목이 패고 키가 호리낭창 하였습니다.

- 산문 <편지> 가운데


난은 신현중 누나의 제자였던 터라 신현중과 잘 아는 사이였다. 백석은 내친김에 신현중과 함께 친구의 통영 신행길을 따라나섰다. 사랑하게 된 여인의 고향과 집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때 쓴 시가 1935년 12월 <조광(朝光)>에 발표된 <통영>이다.


옛날에 통제사가 있었다는 낡은 항구의 처녀들에겐 옛날이 가지 않은 천희라는 이름이 많다.

미역오리 같이 말라서 굴껍지처럼 말없이 사랑하다 죽는다는

이 천희의 하나를 나는 어늬 오랜 객주집의 생선가시가 있는 마루방에서 만났다

저문 유월의 바닷가에선 조개도 울을 저녁 소라방등이 불그레한 마당에 김냄새 나는 비가 나렸다 - <통영>


남녘 끝 항구도시에 사는 옛 여인의 사랑은 미역오리같이 마르고 굴껍지처럼 말없고 투박했나보다. 벅찬 마음에 그 먼 길을 단걸음에 찾아간 그이지만 막상 그녀와의 만남은 수줍고 담백하다. 말없이 앉아있는 여인과 먼 길을 달려온 무뚝뚝한 사내가 오랜 객줏집 마루방에서 설렘을 마음속에 품고 통영 충렬사 계단에 주저앉아 엇갈린 사랑의 안타까움을 써내려간 백석

이후 두 번 더 통영을 찾아가지만 운명의 장난인지 서로 엇갈려 못 만나게 되고 백석은 상실감속에 충렬사 계단에 주저앉아 두번째 시 <통영2>를 남기게 된다. 이 두번째 '통영' 시는 백석이 통영을 다녀왔다는 증거처럼 자신이 근무하던 조선일보를 통해 발표를 했다. 서울에서 그 공개구혼 같은 시를 읽었던 통영여자 '난'은 얼마나 가슴이 뛰었을까.


1936년 12월 마침내 백석은 친구 신현중과 함께 또다시 통영을 방문해 난의 어머니에게 난과 혼인할 뜻이 있음을 전한다. 난의 어머니 서씨는 서울에 사는 오빠 서상호를 만나 난의 혼사문제를 상의하고 백석에 대해 알아봐 줄 것을 청한다. 당시 난은 외삼촌 서상호의 집에서 돌봄을 받으며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서상호는 아끼는 고향 후배 신현중에게 백석에 대해 묻는다. 그때 신현중은 숨겨주어야 할 친구 백석의 비밀을 발설하고 만다. 그것은 백석의 어머니가 기생 출신이라는 소문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 때문에 백석과 난의 혼사는 깨져버린다. 대신 그 자리에서 신현중은 서상호에게 자신이 난과 혼인할 뜻이 있음을 밝히고 단번에 승낙을 받는다. 1937년 4월 7일 신현중과 난은 혼인을 한다.

청혼을 했으나 거절당하고, 자신의 절친한 친구에게 사랑하는 여인을 잃은 백석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자신을 배반한 절친했던 친구, 연모하는 여인을 잃은 슬픔까지... 너무나 애절했던 첫사랑을 잃은 백석은 이런 시를 남긴다.

후반부에 연이어 나오는 '내가 좋아하는 그이, 여인, 내 사람'이 누굴까 궁금하게 한다. 알고 보니 그녀는 백석의 나이 스물넷에 만난 애끓는 첫사랑이었다.

시인의 애끓는 첫사랑, 통영 사는 천희 '난'


흰 바람 벽이 있어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 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의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을 끓여 놓고 저녁을 먹는다/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늬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백석은 그는 당시 참으로 매력적인 모던보이 이었다고 한다. 넘치는 매력으로 연애에도 능수 능란했던 것으로 보인다. 백석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사랑하는 사람에서 자신만의 애칭을 붙여줬다고 한다. 그의 대표작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선물로 준 김영한에게 ‘자야’라는 애칭을 붙여준 것처럼 말이다. 이런 백석은 일평생 동안 두 여자를 사랑했다. 한 명은 그의 첫 사랑 박경련 이었고, 다른 한 명은 김영한 이었다. 첫 사랑 박경련에게도 역시 자야 처럼 ‘난’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백석이 사랑한 여자, 백석을 사랑한 여자가 김영한이지요. 김영한이 자야고 자야가 나타샤 백석의 사랑으로 익히 알려진 연인은 그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1938)> 속 나타샤의 모델로 알려진 고(故) 김영한은

남과 북으로 헤어져 백석은「나와나타샤와 흰 당나귀라는 시(詩)를 남기고

자야는 길상사 를 남깁니다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사찰로 삼각산 남쪽 자락에 자리잡고 있다. 고급요정 '대원각'을 운영하던 김영한(법명 길상화)이 대원각을 송광사에 시주하여 탄생하였다. 1995년 6월 13일 대한불교 조계종 송광사의 말사인 '대법사'로 등록하였으며 1997년에 길상사로 사찰명을 바꾸어 창건하였다. 사찰 내의 일부 건물은 개보수하였으나 대부분의 건물은 대원각 시절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백석이 사랑했던 저 남쪽 통영여자, "蘭"이라 했던가요, 박경련은 어찌 해야 하나 싶기도 합니다.

나타샤는 영한일까요 아니면 난일까요

아무려면 어쩌겠습니까 북쪽의 백석은 평생 자야만을 사랑한 것은 아니지만

남쪽의 자야는 평생 백석만을 사랑했다고 생각한 것을.

자신의 전재산을 시주하면서, "천억 원이 백석의 시 한 줄만도 못하다"는 여자가 길상사를 기부한

김영한 과 젊은 시절 시인 백석(白石)과의 소설 같은 러브 스토리.

서울에서 태어난 김영한은 열 여섯살에 집안이 몰락하자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스스로 한성 기생

''眞香''이 되었다.

가곡과 궁중무를 배워 권번가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잡지에 수필을 발표하며 미모에 시와 글, 글씨, 그림,춤, 노래 등 다재다능한 기생으로서 명성이 자자했다.스물 세살. 영한은 흥사단과 조선어학회에서 활동했던 스승 신윤국의 도움으로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하지만 스승이 투옥됐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해 함흥감옥을 찾아가지만 면회를 거절당하게 된다. 신지식 여성에서 다시 기생의 길을 택하여 함흥기생이 되면서 지역유지의 도움으로 스승의 모습을 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때 시인 백석과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된다.김영한 보다 네 살 더 많았던 백석은 일본 유학을 마치고 함흥 영생여고 영어교사로 있다 우연히 만난 기생 김영한.

백석은 첫만남에서 그녀의 손을 잡고 다짐한다.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이별은 없을 것”

하지만 백석 집안에서 아들이 기생에게 빠져있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다른 여자와 결혼을 시키게 된다.

그러나 결혼식날 밤 집을 빠져 나온 백석은 영한에게 달려와 만주로 달아나자고 설득하지만 영한이 거절하자 백석은 1939년 만주로 떠나게 된다.

이것이 두 사람 사이에 영원한 이별 백석은 만주를 유랑한 뒤에 광복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그녀가 떠난 후 그녀가 서울로 돌아간 뒤였기에 만날 수 없었고 그후로 영영 이별한 백석은 그후 북한 체제 속에서 핍박을 받으면 기구한 삶을 살게된다.늘 사랑과 고향 같은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에 관심이 있었던 그에게

정치이념은 의미가 없었고 당성이 부족하고 늘 사랑타령이나 하는 시인으로 북에서 어떤 대우를 받았을지

1950년대 사망한 것으로 잘못 알려졌지만 최근에 1990년대 중반까지 살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백석을 평생 그리워한 영한은 백석의 생일인 7월 1일이 되면

하루동안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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