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장을 읊는다



이현우




고집스럽게 여문콩 가마솥에서 삶아져 단단한 하루 부끄러운 껍질을 벗고 살며시 돌아눕는다


찹쌀 장밥에 고운 가루로 부서지는 아픔 속에 밀봉하여 점점, 점을 찍으며 숙성되어 가는 매콤한 시나리오는 감출 수는 없는 딜레마인가


장맛이 좋아야 집안이 잘 된다는 패러독스는 아스팔트 위에 헐렁한 꽃무늬 몸뻬바지의 외출 심심한 오후 떡볶이 만나면 쫄깃해지고 시큼한 퇴근길은 막걸리 한 사발에 위로를 깁는다


어느 배고픈 날의 심심풀이 학교 앞 계집아이들의 단골 레시피 알 수 없는 지독한 사랑은 소리 없이 참아내며 차곡차곡 쌓은 장독대의 고집스러운 족보 손끝에서 손끝 이어져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를 동의보감은 잠들지 않는다


지글지글 얼큰한 서사시의 마침표 알 수 없는 거미줄 같은 근현대사 육교밑 만화주인공들 아무도 모르는 순간에도 텅 빈 속주머니를 뒤지다가 운 좋게도 너를 만날 수 있다면,


놓칠 수 없어 챙겨보는 막장드라마의 주인공들은 문득 그렇게도 비 오는 날이면 떠오르는 히아신스 얼 큰 달콤하게 다가오는 조선왕조실록의 지울 수 없는 숙명들은 곰삭고 곰삭은 우리들의 소원


낡은 독 안에서 부르는 판소리, 재즈, 칸초네, 알 수 없는 희미한 메뉴판은 입안 가득 얼얼하게 파도치듯 철 지난 사랑의 눈물을 삼키며 빨갛게 자서전을 토해낸다



*작가후기

옹기종기 장독대 고추장을 담으시는 어머님의 모습을 바라보며 쓰게

된 글이다 문학상, 최우수상 받은 작품 중 1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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