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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셀러의 허와 실


*베스트셀러의 허와 실

이승하(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



다수의 시집을 몇 십만 부 찍을 수 있는 나라는 대한민국밖에 없을 것이다 대형 서점에서 매달 시집 베스트셀러 순위를 따로 매기는 나라도 대한민국밖에 없을 것이다 해마다 출간되는 시집의 수도 엄청나지만

한두 해에 10판 이상을 찍는 시집도 상당수 출간된다

'홀로서기'를 필두로 하여 100만 부 이상 팔려나간 시집도 여러 권이나 우리나라는 시인의 왕국,시의 나라라고하기에 손색이 없다 이러한 외적 화려함이 문화의 전반적인 성숙함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일까

독자층의 확대와 문학의 문화적 영향력의 측면에서

'문학의 시대'로 간주해도 좋을 1980년대의 우리 시단은 초대형 베스트셀러 시집을 몇 권 갖게 된다 250만 권이 팔렸다는 '홀로 서기"외에 도종환의 '접시꽃 당신' 김초혜의 '사랑굿' 김대규의 '사랑의 팡세'등이 그것이다

1976년에 나온 이해인의 '민들레의 영토'도 1980대에 수십 판이 나간 시집 중 하나이다

1990년대의 베스트셀러 시집은 류시화가 여러 권을 점하고 있다 그는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 "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같은 시집 외에 번역한 책도 예외가 없이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리는 저력을 발휘하였다

이밖에 이정하의 '너는 눈부시지만 나는 눈물겹다'

예반 '누군가에게 무엇이 되어' 용혜원의 '네가 내 가슴에 없는 날은'그대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원태연 '원태연 알레르기' '손끝으로 원을 그려봐 네가 그릴 수 있는 한 크게 그걸 뺀 만큼 널 사랑해'등이 있다

이들 시집은 낙양의 지가를 올릴 것 외에도 이성(혹은 절대자)에 대한 사랑과 이별,그리고 그 뒤에 그리움을 노래한 시,연시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우리 시문학사에

연시의 전통은 1925년에 출간된 '진달래꽃'과 1926년에 출간된 만해의 '님의 침묵'으로 거슬러 올라가므로 많이 팔린 연시집이라고 하여 '상업적'이라는 수사를 붙여 비판을 가할 수는 없다 1980~1990년대의 유명 연시집은

시 독자층의 확대에 공헌한 문단사적 의의를 지닌 시집으로 훗날에도 거론될 가치가 있다고 본다

정통문학권 출판사에서 낸 시집 가운데 베스트셀러 가 된 시집으로 80년대는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과 기형도의

'입속의 검은 잎'을 90년대는 최영미의 '서른,잔치는 끝났다',황지우의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 정호승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등을 갖고 있다

1 상업적 연시의 특징

첫 번째 특징은 두말할 것 없이 사랑의 시, 그리움의 시 우정의 시라는 점이다 시집의 제목에, 시의 제목에 , 편편의 시에 '사랑'이라는 명사는 무수히 등장한다

시집을 펼쳐보면 소녀 취향의 조악한 삽화가 등장하는

경우도 많고 시인의 잘생긴 얼굴이 여러 장에 걸쳐

소개되는 경우도 있다(원태연의 알레르기)

시 본문 하단 여백에 고딕체 활자로 "서로 만나고 서로 알고 서로 사랑하고 끝내 헤어짐은 많은 사랑의 슬픈 인생인 것을"이나 "안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그리고 또 안다는 것은 미워한다는 것"등의 사랑에 관한 유치한 소리가 적혀 있기도 하다, 작은 웃음이 나온다

시집 말미에 여러 쪽을 할애해 " 이 순간을 소중히 사랑해야 합니다, 한 사람을 사랑하는 길은 기쁨이 아닌 고통이게 합니다"느니, 잃어버린 것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아픔을 느끼는 것은 곧 성숙을 느끼는 것, 하는 식의 사랑에 관한 치졸한 경구가 나열되기도 합니다

사춘기 청소년들의 연애편지에 인용하기 좋은 글귀를

시와는 무관하게 적어놓는 이런 행위는 시집의 품격을

떨어뜨릴지는 몰라도 상업적 성공에는 지대한 공헌을 하는 것이다


지금 나는 누군가 절실히 그립습니다

혼자란 사실이 너무도 싫습니다

나이를 들어가면서 더욱더 느껴지는 이 고독

이제는 혼자 있기를 원치 않건만

세상은 언제나 나를 외톨이로 만들며,

그대로 혼자 있는 시간을 필요하게 하며

진실된 마음을 더욱 그립게 합니다


- 박 렬, <만남에서 동반까지 6, 1연>



친구야!

우리들의 꿈이 현실이 되었을 때,

커다랗게 웃었지.

우리들의 꿈이 산산이 깨져버렸을 때

얼싸안고 울었다.

욕심 없는 날

우리들의 꿈은 하나였지.


-용혜원< 네가 내 가슴에 없는 날- 친구야 8>


상업적 연시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랑과 이별,우정과 진실의 노래는 이렇게 유치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 유치함과 감상성이야말로 독자의 감정에 호소하는 힘을 발휘함으로써 이들 시집을 장기 베스트셀러가 되게 한다

상업적 연시조 특징은 생활의 구체적인 실감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박 렬의 시를 보면 혼자 있는 시간을 필요로 하는 데 나는 혼자 있는 시간이 너무 싫다는 것이다 앞뒤가 맞지 않는 넋두리다 '고독' '외톨이' 극단적으로 추상화되어 있어 대중가요 수준보다 못하다

용혜원의 <친구야> 연작에는 꿈이 나오는데 꿈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꿈이 관념어로 처리되었기 때문이다 사업적 연시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사랑' '이별' 일 것이다 누구를 왜 사랑하게 되었고 어떻게 이별하게 되었는지 사건의 추이는 생략된 채 그저 사랑은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고 이별은 대단히 슬프다는 식으로 통속적인 얘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관념화가 지나쳐 우리 삶과는 철저히 유리되어 있는 것이다

연시라도 얼마든지 사람의 숨결과 생활인의 온기를 느끼게 할 수 있거늘 이들 시집은 하나같이 사춘기 청소년들의 설익은 감정에만 호소하려 든다

또 하나의 특징은 저자의 약력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는다 점인데 상업적 연시집이 대부분 무명 시인의 시집이므로 이는 불가피한 현상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제목이 긴 시집이 많다는 것이다

제목이 너무 길어 암기하기 어려운 베스트셀러 시집은 부지기수이다 이풀잎의 ' 이별은 헤어짐이 아니라 간직함이라더니 거봐 너도 울잖아!' 와 고은별의 '마지막이란 말보다 더 슬픈 말을 나는 알지 못합니다'저자명도 본명이 아닌 듯 하다

이들 제목은 문법에도 맞지않고 하나같이 통속의 극을 보여주고 있어 어처구니 없다 제목이 짧은 경우도

'친구가 화장실에 갔을 때' ' 원태연 알레르기'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하려고 애쓰는 모습이 가관이다

원태연은 독자의 반응이 알레르기에 가깝다는 것인지

시인이 알레르기에 고생한 내용이 들어있는지 제목만으로

알 수가 없다 또한 놀라운 사실은 대학가 화장실과 도서관 벽 낙서와 동아리 방(서클룸)의 노트를 수집해 낙서를 행과 연으로 구분해 출판한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적도 있다니 놀랍다


2 연시가 넓은 독자층을 갖고 있는 이유

연시가 넓은 독자층을 갖고 있는 이유는.

가, 시집이란 상품이 10대 청소년들과 20대 직장여성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이다

나, 상업적 연시가 학교에서 배운 시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다, 교과서에 나오는 시가 케케묵은 시조가 아니면

대개 일제시대에 생산된 시로서 현대적인 감각을

갖추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라, 우리 현대시의 대중성 상실을 들 수 있다

일제시대에 활동한 김소월,윤동주,김영랑,이상화가

국민의 시인으로 인정받은 이유는현대시의 난해성에

책임이 있다 유치환이나 김춘수의 시는 말할 것도

없고 한국 현대시사에 큰 획을 그은 김수영의

대부분의 시도 일반 독자가 이해하기는 얼마나

어려운가 우리의 시가 한자(관념어)의 난무에서

헤엄쳐 나오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였고,한자가

거의 사라진 시집을 손에 쥐게 된 것은1980년대였다


대부분의 10대 청소년과 20대 초반의 직장 여성들에게 절실한 문제는 계급의 평등과 통일, 민주화와 노동자 해방이 아니었다 이렇듯 순수시와 민중시의 틈바구니에서 수 많은 무명 시인이 저급한 사랑의 찬가를 열심히 불렀고 이는 독자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성장하기에 이른다


3 상업적 연시의 성공은 바람직한 것인가


나는 학교 교육에서 시 학습 방법에 문제가 아주 많다고 본다. 시가 설사 어렵지 않더라도 어렵게 배움으로써 독자는 시에 대한 동경과 거부의 이율배반적인 감정을 갖게 되는데 이는 결국 상업적 연시에의 경도로 이어진다

시 공부는 지식습득이 아니라 인격의 고양 차원에서 논의하는 수업, 시경의 시와 호머의 시를 일부분이라도

배워 동서양의 변천을 알게 하는 일,시가 왜 탄생했고

온갖 문예사조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는가를 대강이라도 알게 하는 일,시의 존재 의의를 깨닫게 하는 일 등이 학교에서 제대로 이루어지면 상업적 연시집을 베스트셀러로 만드는 일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소월과 만해가 죽은 지 벌써 몇 해인데 우리 시인들이

아직도 그들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시인들

스스로 반성해야 될 일이다

기원전 10~6세기경에 불려 진 노래를 모은 '시경'의 '

'시편을 봐도 시란 사랑 노래임이 분명하지만 '공허한 사랑'노래가 아니었다 이 지상에서의 삶의 모습들이 아무리 지긋지긋한 것일지라도 시는 바로 이 지긋지긋한 삶으로부터 출발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프랑스 자크 프레베르처럼 전 세계적으로 독자를 확보하고 있으면서도 우리네 일상적 삶에서 우러나오는 희노애락을 그려낼 줄 아는 국민의 시인, 혹은 참다운 민중 시인의 탄생을 기대해본다



*프랑스 국민작가 "자크 프레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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