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장손>을 보고. 스포일러 살짝 있을 수도?
영화를 보고 감동을 받는 순간은 대략 오백 스물두 가지 정도가 있지만, 게 중에서도 당장 일어나 감독에게 찬사를 보내고 싶을 때가 있다. 유난히 내가 이런 마음이 들 때는, 영화의 어떤 서사나 장면이 유년 시절이나 오래된 기억 저 너머에 나조차도 잊고 있던 무언가를 떠올리게 할 때다. 무언가 익숙한데 뭔지는 잘 모르겠는데, 도대체 이게 뭔지 전두엽이 떠올리기도 전에 몸이 먼저 아는 그런 감정. 또는 너무나 추상적이고 감정적이라 도저히 나의 언어로 설명하지 못한 채 지나쳤던 기억을 감독 나름의 언어로 풀어낼 때. 누군가는 그 순간을 흘려보내지만, 감독은 기어이 그 순간을 잡아내고, 포착해 내고, 그림을 그려 우리에게 전한다. 그럴 때 나는 영화의 감동을 넘어 감독과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런 포착들로 잔뜩 채워진 영화가 바로 영화 <애프터 썬>이었다. 영화를 보고 난 후 울기도 많이 울었지만, 몇십 년 전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온 듯한 기분이었다. 어린 소피에게는 막연히 이상한 공기 정도로만 느껴지던 아빠의 이야기. 아빠의 등, 아빠의 얼굴, 아빠의 표정. 어렸을 때 내 옆의 어른은 그저 어른일 뿐이다. 고작 나 정도 나이나 나보다 조금 더 많았을 텐데. 내가 지금보다 5살 정도 더 먹는다고 해서 갑자기 번듯한 어른이 될 거 같지도 않은데. 겨우 나 정도였을 그 어른들이 겪던 부침을, 어린이이던 내게는 기어코 숨기고 싶었을 그 공기를 나는 결코 제대로 알 수 없었다. 생각해 보면 웃기다. 나는 아빠와 그렇게 애틋한 관계도 아니었고 소피처럼 아빠와 단둘이 여행을 떠나지도 않았다. 아빠뿐 아니라 그때의 어른 중 누구와도 그러지 않았다. 소피와 소피의 아빠 사연과 정확히 겹쳐지는 어른이 없음에도 <애프터 썬>은 내가 그렇게 기억하지 못하고 흘려보냈던 수많은 기억과 어른들의 등을 소환해 냈다.
그리고 어제, 되게 오랜만에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친구의 강력 추천으로 영화 <장손>을 보고 왔다. 영화는 너무 재밌었고 - 극장에서 혼자 너무 티 나게 큭큭 거려 일행이 쳐다볼 정도였다 - 마냥 즐겁고 웃길 줄만 알았던 이야기가 후반부로 가면서 다소 가족 미스터리로 전환하며 더더욱 큰 만족감을 주었다. 서사 특성상 웃음뿐 아니라 깊은 한숨도 몇 번을 내쉬었지만 어쨌거나 할 이야기가 많고 잘 만들어진, 무엇보다 정말 아름다운 영화였다. 주인공 몇 명의 어색한 사투리 속에서 순간 내 고향 대구, 안동으로 순간 이동한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한 캐릭터가 있는데, 바로 오만석 배우가 연기한 ‘태근’이다. 태근의 말투는 내가 자라며 평생 봐온 주변의 남자 어른들과 똑같았다. 너무 놀라 찾아보니 오만석 배우는 경북 영주 출신으로, 내 주변 어른들의 고향인 안동과 지리적으로 가깝다. 어쩐지. 장례식장에서 부의금을 정리하는 장면에서 태근의 말과 장난은 내가 자라며 숱하게 봐온 류의 농담이다. 솔직히 그 순간만큼은 우리 아빤 줄 알았다.
오만석 배우가 보여준 모든 연기가 내겐 유년 시절의 그 ‘순간’들이었다. 생각해 보면 태근처럼 대학을 서울로 갔다가 데모를 한 어른은 없다. 그러다 다리를 다쳐 평생 장애인으로 살고 있는 어른도 없다. 이루지 못한 꿈과 평생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해 마음속 깊이 한을 켜켜이 쌓아둔 어른도 없다. 정확하게 태근과 겹치는 어른은 없다. 하지만 태근은 내가 봐온 어른들의 조각조각들을 한 데 꿴 모습을 하고 있다. 영화가 시작할 때 제사를 위해 잔뜩 집안일을 하고 있는 여자들 사이에서, 옆방에 모로 누워 전을 좀 가져오라는 태근의 모습은 그저 (조금 짜증 나고) 웃겼지만, 술에 취해 소리를 지르고 몸부림을 치는 그 장면은 PTSD가 올 정도로 익숙했다. 어떻게 저렇게 많은 응어리를 끌어안고 살고 있는가 싶을 정도로 한을 풀어낸다. 얼마나 많이 봐온 어른들의 초상인가.
영화 <장손>은 태근뿐 아니라 가족과 친척 관계에서 정말 숱하게 봐온, 그러나 지금은 잊어버리고 또는 그냥 흘려보낸 온갖 순간들을 떠올리게 했다. 이게 대체 뭐였더라 하기도 전에 마음이 먼저 덜컹하는, 그때의 공기부터 떠올리게 하는. 영화를 보고 나서는 이 감독님의 삶에 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질 정도였다. 이렇게 슈퍼 초 하이퍼 리얼리즘의 영화를 만들어낸 대구 출신의 감독님. 그의 포착 뒤 순간들은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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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과 좀 별개로.
경상도 집안에서 여성으로 나고 자란 건 쉬운 일이 아니지만 유난히 힘들 때가 있다고 느낀다. 그러다 이번에 장손을 보면서 좀 더 힌트를 얻었다. 장손에서 나오는 여성들이 겪는 정말 입 아프고 손 아픈 수많은 부조리들. 예를 들면 남자들은 앉아 있고 임신부가 집안일을 하는 장면은 물론이거니와 딸보다도 독자 장손이 우선되는 그런 가족 관계성이라든가. 나는 여성으로, 딸로, 손녀로 태어나 이런 일을 겪기도 하지만, 동시에 또 장손과 다름없는 역할도 부여받았다. 첫째로서, 또 집안 전체에서도 첫째의 첫째 딸로서. 또한 아이들 중 맏이로서. 또한 가장 정상성에 기반해 돈 벌어먹고사는 사람. 그러니까 나는 분명 딸이지만 동시에 집안의 기둥이고 기대다. 이 중복된 역할 안에서 딸로는 집안일을 싹싹하게 해내면서 양보도 하고 감정 노동도 해야 하지만 동시에 장손 역할로서 동생들을 잘 챙기고 모범이 돼야 하고 집안 경제에 기여해야 한다. 하지만 실제 남성 장손이 가져갈 수 있는 그런 어드밴티지에서는 배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