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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ㅎㅈ Apr 09. 2018

요즘 하루하루의 이야기

와이파이가 너무 느려서 여기까지 오는 데만 10분 걸림

사진은 얼마 전 간 해방촌의 어떤 술집. 아주 비좁은 곳이었는데, 곳곳 군데군데가 모두 왕가위의 것들로 채워져 있었다. 화양연화를 떠올리게 하는 붉은 조명, 고개를 들면 앞에 붙어 있던 해피투게더 엽서, 흘러나오던 캘리포니아 드림, 영웅본색의 노래들, 주윤발의 성냥깨비, 화장실 마저도 장국영의 사진과 패왕별희 카세트 테잎, 그리고 얼마 전이었던 그의 기일을 추모하는 국화꽃 한 다발로 채워져 있었다. 정말로 사랑하면, 취미나 덕후 정도가 아니라 정말로 진실로 마음을 다해 사랑하면 이럴 수 있겠구나, 싶었다. 정말로 왕가위와 장국영을 사랑하구나. 



얼마 전 번아웃 이후로 팀도 옮겼지만 삐끄덕 어딘가 문제가 생겼다. 감정적인 부분은 많이 회복이 됐는데, 문제를 떠올리고 풀어나가는 방식을 까먹은 것 같다. 소규모의 팀으로 움직이면서 그렇게도 놀고 먹고 떠들면서 아이디어들을 뿜어왔는데. 그게 삐끄덕 거린다. 회사원이 된 느낌이다. 누군가는 부러워하겠지만(그리고 나도 그들을 부러워 한다), 몇 년 간의 거의 동일한 패턴으로 이뤄진 일들이 나를 소진시킨 모양이다. 2014년, 15년, 16년, 17년, 18년. 이건 파이팅 넘치게 소리 지르고 다독인다고 될 일이 아니다. 영감을 받을 수 있는 것, 이야기를 나눌 사람들, (경쟁의 영역 말고) 사고에 자극을 줄 수 있는 사람들과 시간이 필요하다. 



세수를 하다가 코피어싱이 불쑥 튀어나왔다. 평소보다 많이 튀어나왔다. 평소처럼 집어넣으려고 손을 댄 순간, 거의 삐져나온 피어싱이 순식간에 세면대로 떨어졌다. 하필 세수 중이었던 터라 세면대엔 물이 흐르고 있었다. 세면대로 떨어진 피어싱은 내가 눈을 좇을 틈도 없이 냄새나는 하수구로 여행을 떠나버렸다. 아쉬운 마음에 헛된 희망 하나 잡고선 한참을 물끄러미 세면대 구멍을 쳐다봤다. 가버렸는데.. 


막힐 새라 영등포구 지하상가로 달려가 새로운 피어싱을 샀다. 링 피어싱을 하고 싶었는데 검정색 링밖에 남지 않아 그냥 원래 끼던 큐빅 피어싱을 들고 왔다. 원래 피어싱도 트위스트 형태여서 자신있게 사왔는데, 코에 꽂는 데 한참 걸렸다. 끙끙. 아파.. 코가 부었다. 아마추어 같이! 태국에서 사온 항생제 연고를 꼼꼼이 발라주었다. 



지하상가에서 피어싱을 사고 영등포 신세계 백화점 쪽을 구경하다, 문득 동생이 여기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단 사실이 떠올랐다. 2월 말 즈음에 서울로 올라온 19살의 동생은 어떤 하루를 보내고 있을까. 어떤 대학 생활을 보내고 있을까. 무슨 태국 음식점이랬는데. 두리번 거리다 한 태국 음식점이 보였고, 가게의 통 유리창 너머 주방에서 일하고 있는 실루엣만 보고도 동생인 걸 알아차렸다. 손을 몇 번이나 흔들었지만 동생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한참을 흔들다 뛰어나온 동생은 반가워 했다. 그러더니 짜증이 난다고 말했다. 왜냐는 물음에, 자기 바지를 가르켰다. 오른쪽 주머니가 있는 허리 즈음에 바지가 터져있다. 바지가 터져서 당황하고 있는데 주방 이모님이 고추가 보이겠다며 이상한 소리를 했단다. 화가 났다. 바지가 터져도 바지가 이것 밖에 없는 걸 알아 화가 났고 그 주방 노동자에게도 화가 났다. 


음식점을 빠져나와 타임스퀘어에서 동생 옷을 살펴봤다. 무슨 사이즈를 입는지도 어떤 취향인지도 잘 모르겠어서 보다 관뒀다. 대신 나중에 같이 와서 옷을 좀 사자는, 카톡을 넣었다. 한편으론 다행이라 생각했다. 부모는 가난하지만 그래서 나도 가난하고 얘도 가난하지만, 어정쩡한 나이 차이가 아니라 다행이다. 애매하게 너댓살 차이가 났으면 여전히 나도 가난하고 얘도 가난했을 거다. 적어도 튿어진 바지를 보고 안타까워만 하는 게 아니라 바지 두 벌은 사줄 수 있는 상황이 된 게 다행이다 싶었다. 


지금의 20대 여성들에게 주요한 성장 기제 중 하나는 '엄마(부모)처럼 살지 않겠다'라는 거란다. 대구에서 꾸역꾸역 공부해 서울로 올라가겠다고 마음 먹은 것도 계층 이동 사다리를 타보겠다고 매달린 거다. 한쪽에선 방값을 대느라 부모 허리가 휘고 있었지만, 한쪽에서 나는 서울에 살며 서울에 있는 대학을 다니고 있는 것만으로 대구의 부모와 다른 삶을 살고 있다고, 정말 이렇게 믿었을 때가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나는 그 꿈을 가지고 있다.



최근에, 내가 인정투쟁이 심한 사람이란 걸 원래도 알고는 있었지만 더 절감했다. 페북 피드에서 함께 일하면 힘든 사람의 유형을 정리해둔 글을 우연히 읽었는데, 인정투쟁이 심한 사람의 유형이 딱 나였다.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려 아득바득 노력하고 사람들의 입에서 칭찬으로 내 이야기가 오르내리는 걸 좋아하고 내 이야기를 들어주길 바라고. 내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을 미워하고 정도가 심하면 적으로도 두고, 정도가 이만큼이나 심하진 않지만 내 얘기 맞다. 


왜 이렇게 인정투쟁이 심한 걸까. 자신에게 부족함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 아닐까. 자괴감과 열패감이 이러한 데서 발현되는 건가. 이런 인정투쟁은 회사에서도 끊임없다. 스스로를 옥죄로 다그치고, 문제는 첫 문단에서 말했듯 그 다그침이 만족할 만한 과정과 성과를 가져오지 않을 때 열패감은 말로 표현하기도 힘들다. 그래도 괜찮아. 성장의 동력이 될 수도 있으니까. {{{{{돈 받는 만큼 당연히 일해야지}}}}} (인생의 중요한 모토 중 하나). 단톡방에서조차도 묘한 감정선과 기류를 끊임없이 느끼는 나는 정말이지 예민하고 피곤한 사람이다. 얼마 전 친구와 이야기 하면서도 느끼는 바가 많았고, 반성해야지. 



요즘은 가급적 시켜 먹지 않고 집에서 음식을 해먹는다. 최저임금 상승 이후 대부분 가게들이 배달료를 올리는 바람에 이 참에 잘 됐다 싶어 배달을 거의 시켜먹지 않고 있다. 냄새 빼는 게 귀찮고 설거지가 더 귀찮지만. 그래도 예전에 요리하며 느꼈던 즐거움을 다시 느끼고 있다. 알리오올리오 파스타, 시금치 들기름 파스타, 떡국, 칼국수, 감바스, 각종 찌개류. 맞아요. 귀찮아서 반찬은 안 하고 일품 메뉴들만 만들고 있어요..



요즘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를 본다. 너무 달달해서 녹아 없어질 거 같다. 정해인 너무 좋다. 손예진은 술, 특히 소주에 너무 찰떡이다. 연애 초반의 그 모습을 잘 그려낸 거 같아 너무 달달하고 설레고 좋다. 쉴새 없이 후려치는 직장 상사와 엄마와 등등등이 있지만 서준희는 언제든 떠날 수 있는 행복한 섬이다. 


라이브도 본다. 노희경을 좋아해서 보게 됐는데. 뭐랄까.. 다 좋은데 극 중 배우들이 소리를 너무 많이 지른다. 경찰이라는 직업 특성상 그러려니 하겠지만, 안 그래도 준 알탕급인데 탕 속의 알들이 시도때도 없이 소리를 버럭버럭 질러대니 귀가 먹먹할 지경이다. 특히 염상수 캐릭터는 정말 극혐이다. 극-혐. 진짜 극-혐. 아침 일일드라마에 거드럭 거리며 아내와 딸을 노예 부리듯 부려먹는 아버지 역할보다 더 극혐이다. 오히려 그들은 지나간 세대 같지만, 염상수의 캐릭터는 지금 나와 00년은 함께 살아야 할 수많은 2030대 남성의 표상 같다. 다같이 부대끼고 부침 있고 지난하고 힘들고 가난하게 살아가지만(그래서 둘 다 경찰 공무원의 길을 택한다), 그 분노는 외않만나죠 따위나 '학벌, 스펙, 경제 능력이나 보는 골 빈 기지배들'에게 향한다. 극 중 동료인 여성 경찰 한정오에게 대뜸 좋아한다느니 사귀자느니 뻘소리를 지껄이다 한정오가 다른 남성과 연애 관계인 것을 보고도, 난 자유가 있으니 계속해서 너를 좋아할 거라며 협박에 가까운 으름장을 놓는다. 광수가 그렇게 극 캐릭터를 해석한 건지는 모르겠으나, 시종일관 재수없는 표정을 하고서 한정오에게 막무가내로 협박에 가까운 어투로 말들을 늘어놓는다. 그 전 회차들에서는 심각하게 인정투쟁을 요구하는 모습이 극혐이었는데(염상수를 보며 또 반성한다) 그때부터 마음에 안 들었는데 이제는 염상수가 나오면 진심 끄거나 스킵하고 싶다. 



이제 내가 20대 후반이라 그런지(=떠날 때가 돼서 그런지), 20대가 늘 대상화 되는 방식을 보자면 너무 지겹고 버겁다. 같은 현상이어도 왜 이렇게 이십대들에게 관심들이 많은지. 피해자 서사로 다분히 깔려버린 이십대의 목소리들은 어쩌면 지나치게 무관심하던 윗세대들이 갑작스레 몇 년 전부터 지나친 관심을 갖는, 그런 태세변화로 인한 반작용은 아닐까. 어느 세대의 사람이든간에 다른 세대에 속해 있는 타인과의 갈등은 있을 법한데. 왜 유난히 이십대 그룹의 개인과의 갈등은 특이한 문제로 떠오르는 걸까. 모든 행동에 20대의 플래그가 붙는 것도 늘 불편하다. 여느 그룹들이 그러하듯 이십대 역시 단일하지 않은데. 종종 아주 납작한 눈으로 관찰 당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게 쿨하고 젊게 사는 그들의 방식인가. 나도 30대가 되고 40대가 되면 20대들을 그렇게 관찰하려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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