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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ㅎㅈ Jun 02. 2023

사이렌과 위급재난문자가 알려준 것

간만에 푹 잔 날이었다. 아직 아침 밤낮으로는 바람이 선선한 계절이다. 약간 쌀쌀한 공기가 코에 내려앉지만 몸은 따뜻한 이불속에 있는 딱 좋은 계절. 새벽의 차가운 기운을 느끼면서 기분 좋게 잠에서 깰락 말락 하던 순간. 집 안 곳곳 열어둔 창문 안으로 웬 사이렌 소리가 내리 꽂혔다. 너무 기이한 시간에 너무 기이할 정도로 크고 불쾌한 소리라 깜짝 놀라며 벌떡 일어났다.


민방위를 이 시간에 해? 애인에게 중얼거리는데 갑자기 내 휴대폰과 애인 휴대폰에서 사이렌보다 더 귀를 찢는 소리가 울렸다. 코로나 이후로 안전안내문자는 수신을 꺼놨다. 대신 재해나 전쟁을 알리는 긴급재난문자만 켜놨던 게 떠올라 소름이 돋았다.


’서울 지역 경계경보. 국민 여러분께서는 대피할 준비‘.


휴대폰에 뜬 믿지 못할 문장을 반복해 읽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웬 목소리가 쩌렁쩌렁 온 동네를 울린다. 대체 언제 적 설치한 스피커인지 심하게 지글거리는 음질에, 돌림 노래처럼 울리는 방송에서 겨우 단어 몇 개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국민 여러분...’, ’실제 상황입니다..‘, ’지금 당장 대피할 준비..‘.



나는 실제 상황이라고 정말로 믿었다. 창문 밖 거리를 살펴보면서 조금 우습지만 돈룩업이 떠올랐다. 나 이제 30대인데 생각보다 이렇게나 빨리 세상의 끝이 오는구나. 가족에게 전화를 걸어야 하나. 서울 지역이면 대구에 있는 가족들은 무사할 수 있는 건가. 사이렌 소리, 위급재난문자, 그리고 거리의 방송까지 삼박자가 착착 갖춰지면서 믿은 것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어느 순간부터 이런 ‘알림’과 ‘경고’를 그냥 넘기면 안 된다는 걸 알게 됐기 때문이다. 안전불감증 사회에서 보아 온 여러 사건들을 보며 다짐했다. 아닐 거라 생각하지 말기. 경보가 울리면 무조건 행동하기.


게다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한몫했다. 물론 아주 옛날부터 세계 곳곳에서 전쟁은 계속 벌어져 왔고 내 관심이 덜 했던 것뿐이었겠지만, 2차 세계대전 이후 전혀 전쟁에 연루돼 있지 않던 유럽 한 복판의 국가에서 전쟁이 발발한 건 내게도 적잖은 충격을 줬다. 아 우리 휴전국이지. 우리도 이렇게 언제든 전쟁이 날 수 있지. 창문 밖을 내다보는 애인 등을 보며 온몸의 피가 쭉 빠지는 기분이었다. 최근 나를 괴롭게 하던 일상의 문제들이 다 별 거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게 별 대수야. 이렇게 끝나는데.



어디로, 어떻게 대피해야 할지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물론 위급재난경보는 엉망진창이었다. 왜도 없고 어디로도 없다. 지진인지, 폭격인지, 거대한 산사태인지 무엇이냐에 따라 대피할 곳도 달라지고 방법도 달라진다. 경보가 엉망임을 차치하더라도 나는 아는 바가 너무 없었다. 당장 어디로 대피해야 할지 모른다. 집 주변에 대피소가 어디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라기엔 그전에 4년간 살던 동네 대피소도 모른다. 오로지 지하철만 떠올랐다.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지만 무얼 들고 가야 할지도 몰랐다. 대피할 준비를 하라는데, 잠옷에서 외출복으로 갈아입는 것 말고는 대체 무슨 준비를 해야 하지? 몇 달 전, 자기는 겁이 너무 많아서 위급시 자신과 고양이 대피를 위한 생존 배낭을 늘 준비해 둔다던 직장 동료의 말이 떠올랐다. 다년간의 백패킹 경험으로 집에 배낭과 캠핑 용품은 넘쳐 나는데 정작 유사시 생존을 위해서 어떤 것들을 싸야 하는지는 전혀 아는 바가 없다. 한 바탕 소동이 끝나고 처음으로 지도앱과 국가재난포털에서 내 집 주변 대피소를 검색했다. 단톡방에서도 친구들이 생존 배낭 싸기 따위의 유튜브 링크를 보내왔다.



어떻게 정보를 받아야 할지 모른다. 위급재난문자를 확인하자마자 본능적으로 한 다음 행동은 휴대폰에서 사파리를 켜는 일이었다. 네이버가 먹통이 된 걸 보고 더 공포를 느꼈는지 모르겠다. 황급히 구글과 트위터를 켰다. 트위터도 새로고침이 버벅 거리고 뜨는 거라곤 단신 뉴스뿐이었다. 순간 약간의 패닉이 왔다. 만약 인터넷이 이렇게 터지게 되면 어디서 정보를 얻지? 새고로침 버튼만 열심히 누르고 있는데, 마침 애인과 통화하던 애인의 회사 선배가 티비를 틀라고 했다. 아ㅎ 티비가 있었지 참. 집에 티비가 있지만 ott만 보는 용도라 티비 리모컨을 찾는 데도 한참 걸렸다. 리모컨을 찾고도 건전지가 없어 여기저길 찾다 티비를 켰다. kbs와 ytn에서는 관련 소식을 계속 전해왔지만 sbs와 mbc에서는 정규 편성된 프로그램이 나오고 있었다. 이 어긋난 온도차에 당황스러웠다. 한쪽에선 사이렌이 울려대고 긴급 대피 방송이 나오고 있는데 한쪽에선 일상의 모습이다.


뉴스에서는 발사체가 위성으로 확인 됐다는 일본 언론의 소식을 속보로 전했다.

그때 또 한 번 위급재난문자 알림이 울렸다. 행안부에서 알리는 오보 메시지였다.


오보라니. 허탈하고 허무했지만 당연히 안도했다. 이제껏 즐겨 온 온갖 아포칼립스며 디스토피아 영화, 드라마들이 머릿속에서 가라앉았다. 생각해 보면 휴전 국가임에도 이런 유사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교육을 받아 본 기억이 없다. 남자들은 민방위 교육으로 받나? 학생 때 지진 대피 훈련으로 책상 아래 들어가 본 게 다였던 거 같은데 이마저도 진짜 받은 건지 기억 조작인지 잘 모르겠다. 오늘 새벽의 소동으로 이것 하나만큼은 알게 됐다. 위급 재난 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는 바가 전혀 없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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