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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ㅎㅈ Aug 26. 2023

잡덕의 비애를 아세요?

나도 오딱후가 되고 싶어!!

사실 잡덕이라 쓰는 것도 살짝 용기가 필요했다. 잡덕도 덕후란 말이니까. 그런데 난 덕후가 아닌걸? 나 스스로 잡덕이라 말해도 되나? 이 고민을 진지하게 한 건 지난 금요일 저녁 당근 거래를 하고 나서였다.


학생이 내민 거래 내용물은 학생만큼이나 귀여웠다. 키티와 마이멜로디가 그려져 있는 작은 약통. 그리고 쿠로미가 그려진 볼펜이었다. 이걸 왜 거래했냐면 마침 구로 쪽에서 캔들 워머를 거래할 일이 있었는데 또 마침 요즘 휴대용 약통이 필요했더랬다. 캔들 워머 거래 약속을 잡고 당근마켓 피드를 보는데 워머 거래지역 근처의 약통 글이 우연히 내 눈에 걸렸다. (쿠로미 볼펜은 5천 원 이상 사야 거래를 한다고 해서 껴 넣은 아이템이다)


학생이 수줍게 내민 귀여운 봉투 안에는 각종 귀여운 스티커도 함께 들어 있었다. 약통과 볼펜과 스티커는 너무 귀여웠지만 왠지 잠깐 현타가 밀려왔다.


‘내 취향.. 퇴행하는 걸까?’.


그러고 보면 요즘 내 주변은 온통 핑크빛이다. 어린 시절 그 숱한 핑크색과 반짝이는 캐릭터 홍수에도 나는 거세게 다른 것들을 고집했다. 스스로 ‘공주 같은 것’들은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유치하다고, 나는 좀 더 쿨한 사람이라고. 우습게도 그랬던 아이가 마치 어린 시절 못 가진 한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서른이 넘어서야 핑크색을 끌어 모으고 있다. 모자, 티셔츠, 팔찌, 쪼리, 약통, 볼펜 등등. 물론 핑크색 자체가 가지는 사회적 기의의 타당함 같은 거시적인 이야기는 뒤로 두고, 아무튼간에 요즘 내 취향이 퇴행하는 걸까 고민하다, 그래. y2k 유행에 휩쓸리고 만 것이겠거니, 내가 결국 유행에나 따르는 줏대 없는 잡덕이기 때문이겠거니, 하고 결론 내렸다.


나는 잡덕이다. 뭐하나 진득하게 좋아한 게 없다. 신화를 좋아하다 투피엠을 좋아했다. 좀 더 커서는 엑소도 좋아하다가 몬스타엑스도 잠깐 봤다. 노래도 듣는 장르가 주로 pb r&b일뿐, 아티스트 하나 진득하게 판 게 없다. 요즘은 락도 깔짝 거린다. 그나마 검정치마를 가장 좋아하지만 그의 공연에 가서 가사를 잘 몰라 주변 눈치를 보며 흥얼흥얼 거린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운동도 폴을 했다 발레를 했다 요가를 했다 서핑을 했다 아주 깔짝 거린다. 요즘은 스케이트 보드에 관심을 갖고 있다. 어제 들른 스케이트 보드 파크에 초등학생 저학년 애들이 힙합 패션에 드레드를 땋고 신나게 보드 타는 걸 보니 또 한번 현타가 밀려왔다. 나는 저 나이 때부터 지금까지 저렇게 열정적으로 파고든 게 있었나? 없다.


진정한 덕후들은 어린 시절부터 싹이 보였다. 그들은 스트리밍 서비스도 없던 시절부터 일본 노래나 미국 팝을 찾아들었다. 그들은 주로 80년대 태생 언니들이 그랬던 것처럼 일본 문화의 샤워를 받은 것처럼 보였다. 분명 나랑 같은 연생인데 나와는 다른 세계에 사는 것만 같았다. 또는 그들은 시네필이기도 했다. 또는 그들은 성인이 되고 서른이 넘어서도 파는 아이돌이 있다. 또는 뮤지컬을 파든가. 또는 어느 정도 경지까지 오른 운동이 있다. 또는 매년 가는 페스티벌이 있다. 또는 게임이다.


그런 그들을 보고 있으면 나는 뭐랄까.. 취향이 없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그런 경험과 취향은 한 사람을 지탱하는 힘이 되는 것 같은데. 나는 그게 뭘까. 늘 고민해 봐도 ‘그것’은 없고 그럴 때마다 마치 콤플렉스 같다. 긴 고민 끝에 결국 이렇게 정의한다. 세상 모든 사람은 오타쿠와 오타쿠가 아닌 자로 나뉜다. 그리고 세상은 오타쿠가 바꾼다. 다만 내가 오타쿠가 아닐 뿐.. 결국 나를 마치 문어 같은 사람으로 정의했다. 이것도 찔러봤다 저것도 찔러보는 다리 여러 개의 문어. 나는 진정한 덕후가 될 수 없는 걸까. 숱한 노력을 해왔으나 잘 되지 않는다. dna 문제인가. 덕후들은 잡덕의 이 비애를 모른다.


하지만 너무 귀엽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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